‘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문제의 배경과 본질
1) 문제의 제기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참배가 그 유족이나 친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몰자(戰沒者)에 대한 단순한 ‘위령’추도 행사라면 이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 이는 극히 비정치적인 개인의 매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추도가 공적·국가적으로 행해지고, 또한 위령·추도를 넘어 전몰자를 ‘영령’(英靈)으로 현창(顯彰)하려고 하게 되면 자연히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다. 즉 전몰자가 관련된 과거의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제가 제기되게 된다.
야스쿠니 신사는 영어로 ‘War-shrine'이라고 번역하듯이, 천황의 군대인 전사자들을 제신(祭神)으로 하고 있는 일본 근대 역사상 대외침략·영토확장의 상징으로, 여기에는 현재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도 안치되어 있다. 이러한 신사에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수상이나 각료가 공식참배를 하기 때문에 인방(隣邦)인 한국이나 중국에서 비판하는 것이다. 즉 공식참배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전쟁범죄를 면죄하고, 거꾸로 침략전쟁을 미화·정당화하는 것이 된다.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일본인의 국민감정‘이니 ’일본 종교의 특수성‘이니 하며 이웃 나라의 비판을 무시한다면 이는 동북아 국가간의 우호와 평화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마침내는 군국주의부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는 일본 국내적으로는 종교법인인 야스쿠니 신사라고 하는 특정 종교를 국가가 원조·조장·촉진하는 행위로,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원칙에 반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일본 국민의 문제이며 일본의 내정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일본 국내외의 강한 반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집요하게 공식참배를 강행하려고 하는 이유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단순한 일본 국내만의 종교 문제가 아니라 인방과도 관련되는 정치·외교문제이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일본은 페르시아 만(灣) 전쟁을 계기로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기(國旗)·국가(國歌)법은 이미 마련되었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유사입법(有事立法) 체제도 정비하고 있다. 또한 정계도 이미 재편되어 헌법개정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이 의석이 3분의 2이상을 점하고 있어, 헌법개정과 교육기본법의 개정도 이미 정치 일정에 올라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를 포함한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도 이러한 정치 정세에 맞추어 국민정신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1985년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수상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헌법을 개정하여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새로운 전사자가 나올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적 성격과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문제의 배경을 알아보고, 종교단체, 사회 시민단체의 비판 논리와 야스쿠니 소송을 통해 야스쿠니 문제의 본질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2)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과 성격
일본에는 전국 어디를 가나 신사가 많이 있다. 현재 종교법인으로 되어 있는 신사 총수는 약 8만 1천 개 정도이다. 그 중 신사 본청(本廳)이 통할하는 신사가 7만 9천 개, 그렇지 않은 단립(單立)신사가 2천 개 정도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현재 도쿄(東京) 도지사(道知事)가 관할하는 단립 종교법인으로 신사 본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보통 신사라고 하면 그 대부분은 지방적인 마츠리[祭]가 행해지는 곳으로 농경, 어로, 해운, 상업, 광업, 기타 생업과 관련하여 개운(開運)을 빌거나 액땜·액막이를 하는 등 일상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지연사회 혹은 직능사회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따라서 이 같은 신사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는 경우가 많고 지연사회 직능사회를 배경으로 한 우지코 단체에 의해 그 존립이 유지된다.
일찍이 고대 덴무[天武] 천황(673~686년) 무렵부터 황조신(皇祖神)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던 이세 신궁마저도 황실의 힘이 쇠퇴했던 중세 이후엔 농업신으로서 민중의 신앙에 의해 번성했다. 이세 신궁이 황실만의 조상신으로서 국가신도(國家新道)의 신사 체계상 최고의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메이지시대의 국가신도 체제 하에서였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메이지5) ‘중고(中古) 이래’로 대등한 지위에 있던 황조신을 모시는 내궁을 농업신을 모시는 외궁의 상위에 놓고, 1899년에는 신자 집단인 우지코 단체로서 조직 정비된 신궁교회를 해산시켰다.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7)과 더불어 시작된다.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은 1869년에 도쿄 구단에 창건된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이다. 처음엔 메이지 유신의 내전에서 희생된 신정부군의 전몰자를 제사지내다가 거기에 1858~59년에 일어난 정치탄압 사건이었던 안정대옥(安政大獄, 막부말 지도자였던 이이 나오스케가 반발하던 세력들을 탄압) 이후의 막말 정쟁의 희생자인 소위 ‘지사(志士)들을 합사(合祀)하고, 1877년의 서남전쟁(1877년 일본 서남부의 가고시마[鹿兒島]의 규슈[九州] 사족(士族)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앞세워 일으킨 반정부 내란)을 거쳐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하면서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야스쿠니란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는 뜻으로 ’안국(安國)이나 마찬가지 의미이다.
일본에는 오래된 신도적 민간신앙으로 비명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다타리[崇り]’라 하여 앙화(殃禍)가 일어난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메이지 신정부가 메이지 원년인 1868년에 교토[京都]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초혼사·(招魂社)를 처음 지었을 때만 해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유신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 신사 융성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정권이 붕괴되자 이제까지 국교적인 지위를 누렸던 불교를 대신해 신사가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유신정부의 신불분리정책(1868)이 마침내는 배불훼석(排佛毁釋)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이 같은 새로운 풍조 속에서 새로운 신사가 전국적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관폐사 중에서 천황·황족을 모신 관폐사와 별격관폐사의 대부분은 메이지 이후에 창건되었다. 이 같은 신사들은 그 존립과 제사를 우지코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에 의존했다.
초혼사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초혼사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현재의 교토 호국신사인 교토 초혼사이다. 1868년 5월 15일에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초혼사(지금의 교토 호국신사)를 세우고 무진전쟁(戊辰戰爭)에서 죽은 사쓰마[薩摩]·조슈[長州] 연합국 측의 병사를 제사지낸 것이 처음이다. 교토 교외인 도바[鳥羽]·후시미[伏見]에서 시작된 무진전쟁은 천황 정부군이 동북의 거점인 아이즈[會津]을 함락하고 1869년 5월에 막부(幕府)측의 마지막 거점인 훗카이도[北海道]의 하코다테[函館]를 항복시킴으로써 천황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869년 5월에 천황 정부군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자 6월에는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고 에도[江戶]성에 가까운 구단 위에 도쿄 초혼사를 세워 교토 초혼사를 합사했다. 이 같은 초혼사는 처음에는 초혼장(招魂場)이라 했는데, 다른 번(藩)으로도 확산되어 1870년에는 105곳이나 되었다. 그 중 23개가 지금의 야마구치[山口] 현인 조슈 번 내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조슈번 출신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각 부현(府縣)에 초혼장으로 세워졌다가 1877년 서남전쟁 이후 부현의 초혼사로 불리면서 그 수가 점점 늘어 전국에 150개나 세워졌다. 이에 정부가 통제에 나서 1939년부터는 각 부현의 초혼사를 호국신사(護國神社)로 개칭하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 중에 부현 출신은 동시에 각 부현 호국신사의 제신이 된다. 말하자면 각 부현의 호국신사는 야스쿠니 신사의 분사(分社)인 셈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다른 신사와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다른 모든 신사는 내무성(內務省)이 관할했는데 야스쿠니 신사만은 제2차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육군성과 해군성이 관할해 왔다. 신사의 유지와 제사 등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군사예산으로 충당했고, 전시에는 최고위직 신관(新官)인 궁사(宮司)를 육군대장이 맡았던 때도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군사시설로서 ‘군국(軍國)의 신사’였던 것이다.
둘째로 신사에 모셔진 제신(祭神)이 다른 신사와는 달리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람이 죽어 제신이 된 신사는 소수이긴 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도쇼구[東照宮]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년), 도요쿠니[豊國]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년), 미나토가와[湊川]신사는 구스노키 마사시게(1296~1336년)등이 각각 제신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모두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런 의미에선 이름 없는 일반 민중이 제신이 되어 있는 경우는 야스쿠니 신사와 호국신사뿐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다른 신사는 제신이 고정되어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는 새로운 제신이 합사됨으로써 계속 늘어나고 있다. 메이지 이후 전쟁이 있을 때마다 제신이 늘어나 현재는 246만6천이지만, 앞으로도 일본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제신은 계속 늘어날 수 있다.
넷째로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이 자주 참배를 한다는 의미에서도 특별한 신사이다. 천황은 자신의 조상신으로 되어 있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미에[三重]현의 이세 신궁과 역대 천황 중에 유명한 천황을 제신으로 모신 신사처럼 특별한 신사에 대해서만 참배를 한다. 예를 들면 멀리는 초대 천황이라고 하는 진무(神武)천황을 모신 나라현의 가시와라[橿原]신궁, 가까이는 메이지 천황을 모신 도쿄 도(都)의 메이지 신궁 등이 그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의 신하들을 제신으로 하고 있지만 그 신사의 격이 높아 별격관폐사로 되어 있다. 메이지 정부는 사격(社格)제도를 정하여 모든 신사를 관폐사와 국폐사(國弊社), 부현사(府縣社), 향사(鄕社), 촌사(村社), 무격사(無格社)로 나누었다. 관폐사는 신화에 나오는 천신·천황·황족을 제신으로 받드는 신사이고, 국폐사는 신화에 나오는 국신으로 지방의 유력한 개척신을 모신 신사이다.
별격관폐사는 그 대부분이 천왕·황족을 모시는 관폐사와 더불어 메이지 이후 국가신도 체제 하에서 창건되었다. 별격관폐사는 야스쿠니 신사이외에도 27개가 있는데 그 내역을 보면 남북조 시대(1336~1392)의 소위 ‘남조의 충신’을 모신 신사가 10사, 막말 유신기의 주요 인물과 근세의 번정(藩政)에 공적이 있었던 다이묘[大名]을 모신 신사가 7사,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모신 신사가 7사, 기타 3사로 되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3대의 걸쳐 천황의 참배를 많이 받은 신사로서도 유명하다. 참배 회수가 황조신을 모신 이세 신궁 다음으로 많다. 천황은 주로 봄·가을의 예대제(例大祭)에 많이 참배를 하는데 메이지 천황(1867~1912)은 7회, 다이쇼 천황(1912~1926)은 2회, 쇼와 천황(1926~1989)은 무려 20회나 참배를 했다. 쇼와 천황의 경우는 특히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부터 시작된 15년에 걸친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전사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천황이 육해군 대원수의 군복차림으로 신하인 전몰자의 신령에게 참배하는 모습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전쟁의 신사’임을 실감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을 위해 충의(忠義)를 다하고 전사<전상자·전병자(戰病者)포함>했다고 육군성과 해군성이 인정한 군인·군속을 국가의 신으로 합사한 특이한 신사이다. 메이지 유신 때의 내전인 무진전쟁 때 전사한 병사라 하더라도 천황에게 반항하다가 전사한 백호대(白虎隊)대원들은 제외되었다. 또한 1877년의 서남전쟁에서 전사한 정부군 전사자는 합사되었지만 반군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 군대의 전사자는 합사되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을 위한 종교시설로서 어디까지나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충사자(忠死者)’를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3)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문제의 발단과 배경
집권 자민당과 보수 우익단체들이 집요하게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를 꾀하는 것은 천황과 신사의 군의 재결합에 의해 국민의 정신적 지배를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1년에 한번 행해지는 무종교의 식전(式典)인 ‘전국 전몰자 추도식’만으로는 그 목적을 충분히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추도’를 ‘위령’으로, 무종교에서 종교(신사신도)로 질적 전환을 이룸으로써, 1년에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상시 ‘전몰자’를 국가가 관리하려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 문제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 국가호지(國家護持)문제이고 또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 문제이다.
① 야스쿠니 신사 국가호지 문제
야스쿠니 신사 국가호지 문제는 1969년에 ‘야스쿠니 신사 법안’이 자민당에 의해 국회에 제출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야스쿠니 신사 국가호지 운동의 발단은 1945년 12월 미점령사령부에 의한 소위 ‘국가신도 폐지 지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국가신도 폐지 지령’에 의해 신사신도와 국가와의 결합이 금지됨으로써 전전(戰前)까지 육군성과 해군성의 관할 하에 이루어지던 전몰자의 합사(合祀)를 민간의 종교법인이 된 야스쿠니 신사가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 결성된 전몰자 유족 단체인 일본유족후생연맹(1953년에 일본유족회로 개칭)은 1952년 11월 제4회 대회에서 야스쿠니 신사의 위령 행사 비용을 국비로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고, 1956년 제8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의 국가호지를 결의했다. 이리하여 전몰자 유족회, 전국의 신사로 조직된 종교단체인 신사 본청(本廳), 보수세력 등에 의해 본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호지운동이 시작되었다.
1956년 같은 해 이를 받아 집권당인 자민당이 야스쿠니 신사가 아닌 ‘야스쿠니사(社)법 초안 요강’을 마련하게 되었고,1969년 6월 30일에 자민당 국회의원 238명에 의해 ‘야스쿠니 신사 법안’(이하 야스쿠니법안)으로서 국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1969년은 야스쿠니 신사가 창립된 지 100주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이 법안은 그 후에도 1973년까지 매년 제출되었으나 그때마다 야당과 종교계의 반발에 의해 74년에 최종적으로 폐안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 문제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문제는 아니다. 1966년에 건국기념일이 결정되었을 때 이미 이 문제는 예기되었다. 건국기념일의 결정은 전전의 기원절(紀元節)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신사신도의 본종(本宗)인 이세 신궁의 국영화도 주장되었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 문제는 종전 후 폐지된 신사신도의 실지(失地)회복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이데올로기를 보완하기 위해 1966년 12월 9일에 정령(政令)이 공포되고,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문부성(文部省)의 중앙교육심의회로부터 ‘기대되는 인간상(人間像)’이라는 답신이 나왔다. 메이지 100년제에 대한 정부의 캠페인도 같은 해 (3월 25일)에 발표된 점을 생각하면 ‘야스쿠니 사상’의 구조가 1966년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는 이처럼 착실하게 준비되어 온 것이다. 야스쿠니 법안은 건국기념일 결정에 이어 구체화되었다. 법안의 목적은 전몰자 및 국사로 순직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국민의 감사와 존경심을 나타내가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제1조). 또 법안은 신사의 명칭을 살리고 창건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지만 종교단체는 아니며(제2조), 종교적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제5조)했다. 이는 외견상으로 비종교화하여 내각총리대신(大臣)이 관할하는 특수법인으로 국영화를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을 피해 가기 위한 술책이었다.
4) 야스쿠니 소송의 성과의 한계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운동이 1975년부터 야스쿠니 법안 추진에서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 실현 쪽으로 전략이 바뀌면서, 이에 반대하는 투쟁의 방법도 달라지게 되었다. 야스쿠니 법안에 대해서는 주로 반대 집회·결의·서명운동·데모행진·단식투쟁 등과 같은 대중 거리투쟁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에 반해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를 위한 실행목표가 공식참배로 바뀐 후부터는 투쟁의 주된 장(場)이 법정으로 옮겨갔다.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첫째, 법률상 종교단체인 야스쿠니 신사에 천황이나 국무대신이 공식참배하는 것은 헌법 20조가 금지하고 있는 ‘국가 및 그 기관’의 종교활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야스쿠니 신사는 1978년 추계 예대제 전날인 10월 17일에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이하 14명을 합사했다. 이들은 전쟁을 시작하고, 지도하여 다대한 피해를 일본 국내외의 인민에게 입힌 정치적·군사적 책임자이다. 이들은 제신으로 받들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참배 하는 것은 ‘전쟁책임’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 있는 제신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전사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들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이다. 이 같은 사람들을 천황이나 수상이 국가를 대표하여 신으로 숭앙하고 참배하는 것은 아시아·태평양지역 사람들에게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근대 일본인의 종교의식, 야마오리 데츠오, 소화, 2009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 종교로 읽는 일본인의 마음, 박규태, 책세상, 2001
야스쿠니 신사, 오에 시노부, 소화,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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