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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ind&history/이성계의 조선건국과 북방민족 여진 8

이성계가문과 동북면 북방민족 여진족에 대한 결론 -8

이성계가문과 동북면 북방민족 여진족에 대한 결론 마무리-동북면 지역의 이성계 가문의 성장과 그가 중앙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 그의 군사적 기반에 대해 특히 이성계 세력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던 동북면 지역의 여진족이 차지하였던 역할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성계 가문과 여진족과의 관계와 이성계가문이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래 여진족계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먼저 고려말 동북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은 추장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으로부터 만호·천호 등의 관직을 세습적으로 받았으며, 고려의 경제적 정치적으로 국가 우대정책에 고무되어 고려의 영내로 다수가 자발적으로 번번히 귀화하였다. 여진 추장들은 사병적 성격을 지닌 가별초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고려로 귀화하는..

태조실록으로 본 이성계가문의 조상계보와 분석 -7

3. 『태조 실록』에서의 이성계 가문대이름기술태도관직이동경로20이한간략신라 사공 19이자연간략신라 시중 18이천상간략신라 시중 17이광희간략신라 아간 16이입전간략고려 사도 15이염순간략  14이승삭간략  13이충경간략  12이경영간략  11이충민간략  10이화간략  9이진유간략  8이궁진간략  7이용부간략고려대장군 6이인간략고려 내시집주 5이양무간략고려 장군 4이안사(목조)상세고려의주병마사몽골 천호 겸 다루가치몽골 흘찰 백호전주-삼척-의주-이성-알동3이행리(익조)상세부친세습알동-적도-의주-안변2이춘(도조)상세부친세습안변-화주-함주1이자춘(환조)상세부친세습 -이성계(태조)상세부친세습  위의 표는 『태조 실록』 제 1권 총서를 근거로 이성계 조상들의 계보를 정리한 것이다.실록을 보면 5대조까지의 기술내용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여진족 이지란 -6

3.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이지란 그리고 동북면우왕 14년(1388)에 단행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조선건국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일거에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민망(民望)을 모으는 유력한 무장으로서, 개혁세력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게 된다. 이지란이 이성계가 참여한 전투의 중요한 고비에서 든든한 무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지란이 여진족에서 고려로 투항한 귀화인이니만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지란은 어떠한 입장에 있었는지를 살피고자한다. 그럼으로써 이성계와 여진족의 관계를 조금 더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우왕 14년의 요동정벌은 두 가지 배경으로 촉발되었다. 명의 세공요구와 철령위설치문..

고려말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군사활동과 세력확장-5

2. 이성계 군사활동과 정치적 성장1) 이성계 군사활동과 세력확장 그렇다면 이성계의 군사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성계가 신흥 무장세력으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겠다. 이성계는 공민왕 5년(1356)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가 중앙에 진출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기량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데 공헌한 바에 힘입음이 컸다. 이성계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활동하는 기록은 공민왕 10년(1361) 이자춘이 죽고 난 이후에야 확인된다. 이성계의 공식적인 군사활동은 강계만호 박의(朴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친병 1,5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이다. 이성계의 직함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태조실록1 총서 공민왕 10년 9월). 이성계..

이성계가문과 동북면 그리고 가별초 -4

ㅇ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그리고 가별초대간에서 시무책을 올렸는데, 동북면의 함주 등지에 가별초라고 불리는 자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고 국역을 지지 않으며 별도가 가병(家兵)이 되어 사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마음대로 하니 주현에서 통제하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태종실록 5, 태종 2년 12월 신해비록 왕실 소속이라고는 하나 일반 백성을 가별초라고 부른다. 왕(태종)이 불가함을 알고 신묘년(태종 11년, 1411) 에 가별초를 혁파하여 관군으로 삼으니, 종실도 모두 감화되어 혁파하였다. 오직 도총제(都摠制) 이지영(李知英)은 이지란(李之蘭)의 자식으로 아직 혁파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왕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동북면의 백성은 공역도 지고 사역도 지니 고통이 심하다. 비록 세전(世傳)이라고 하나 ..

이성계가문의 동북면정착과정 -3

이성계 가문과 동북면이성계의 선조가 동북면에 정착했던 시기는 원(元)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이성계의 고조부였던 이안사(李安社)가 어떠한 과정으로 동북면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떠한 세력을 갖게 되었는가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1) 목조(이안사)가 그 사실을 듣고 마침내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170여가의 백성들이 따라서 이주하였다.예전 산성별감이 새로이 안찰사로 부임하려 하였다. 목조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식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동북면 덕원(德源)에 이르렀다. 170여호 백성 역시 목조를 따랐다. 많은 동북면 백성이 목조에게 복종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목조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에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때 영흥 이북은 개원로..

이성계가문과 고려말 동북면 여진족의 실태 -2

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고려말 동북면 여진족의 실태 1258년 12월 고려의 동북 변경지역인 和州(永興)에 원의 관부인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으며, 이 관부의 설치로 고려는 동북면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5년 7월 고려군에 의해 수복될 때까지 99년 간 존속하였다. 쌍성총관부의 관할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과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다.당시 원나라는 1350년대부터 황실 내부의 반목과 빈발한 내란으로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세력에게 수도를 내어주고 응창부로 도주하였다. 그로부터 북원시대가 시작되었고, 중원은 명의 통치 아래에 들어갔다. 원·명 교체기인 14세기 중엽부터 동북면의 대부분 지역은 실질적으로..

이성계가문의 조선건국과 북방민족 여진과의 관계-1

14세기말, 중국에서는 원·명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이루어졌다.그런 동북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이성계가문은 동북면에서 기반을 확충하고 세력을 강화시켰다.이성계 가문은 원나라로부터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고 이들이 이후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기본 무력이 되었다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다. 그리고 1388년 5월의 위화도 회군은 북원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이성계가 그 직전 북원의 기본 무력이 무너졌음을 파악한 데서 나온 14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의 결과물이다. 그런 가운데 이성계 가문의 기반이 주목되어 무력집단인 가별초를 국가의 간섭 없이 개인사병으로 이성계가 통솔하였음이 기존 연구들로 밝혀졌다.이성계 세력의 군사적 성장배경이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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