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돌아오는 브라질대통령 룰라와 브라질 경제와 미래
순서
1. 룰라 당선 전의 브라질상황과 경제
2.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그는 누구인가?
3. 룰라의 경제정책과 변화
4. 남겨진 과제와 브라질의 미래
1. 룰라 당선 전의 브라질상황과 정치와 경제
우선 브라질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브라질brazil은 남아메리카 남미에 위치한 거대한 나라죠
수도는 가끔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로 착각하기 쉬우나 브라질리아이고 언어는 포르투갈어를 쓰며 헤알이라는 돈을 씁니다 국가면적은 세계5위로 아마존이 숨쉬고 있고 인구는 2022년 기준 2억1531만명으로 세계7위국가입니다
GDP는 2021년 기준 1조6089억원으로 세계12위권이며 1인당 GDP는 2021년 기준 7518달러로 세계69위
최근에는 정열적인 삼바문화와 삼바춤, 그리고 브라질축구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대항해 이후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하고 브라질이라는 국명은 염료재료로 쓰였던 파우브라질(pau-brasil)이라는 나무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거대한 자연에 둘러쌓여있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왕실에 의해 세계최대의 사탕수수생산지로 식민사업개척활동에 이용되었으며 향후에는 금과 다이아몬드 채광업으로 이어나가다가 포르투갈이 1807년부터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패퇴하게 되고 포르투갈왕실은 브라질로 이주하였다가 귀국하였지만 브라질에 남아있었던 동 주앙6세의 장남이었던 동 페드로왕자는 오히려 포르투갈로부터의 브라질독립을 외치며 브라질의 황제에 즉위하여 브라질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 브라질은 1공화국과 2공화국을 거쳐 군부권위주의체제를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됩니다
그 이후 브라질역사에 룰라가 등장하는 시기서부터 다시 자세히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964년 브라질군부는 기존 굴라트 정권을 무너트리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내면에서야 암흑이 드리워졌지만 그 와중에도 브라질 경제는 매년 성장을 거듭해 1973년에 그 정점에 달했다.
이후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들이 있어왔으나 경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높은 국제 이자율과 낮은 가격의 브라질 수출품으로 인해 브라질은 심각한 채무불이행 상태에 놓였다.
1985년, 인플레이션이 233퍼센트에 이르고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자 결국 정부는 1986년 두 번째 모라토리엄을 선포했다. 경제적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 의회는 1988년 새로운 민간 헌법을 승인했다.
1960년 이후 거의 30년만에 자유로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난도 콜러가 당선되었다.
그는 브라질 경제를 국제 무역에 개방하고, 정부소유의 회사를 민영화시켰다. 콜러는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지킬 수 없었다. 경제발전 계획이 실패하고 콜러마저 부패혐의로 1992년에 탄핵되자 부통령이었던 이타마르 프랑코가 콜러의 남은 임기를 채우게 된다. 그도 여러 차례 경제안정 대책을 실행했으나, 역시 실패하여 1993년에 인플레이션은 2447퍼센트라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1994년, 프랑코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페르난도 엔리케 카르도소는 한때 사회학자였던 인텔리로 군부통치시절 추방당해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낸 인물이다. 카르도소는 재무장관으로 일하면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경제계획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때 새로운 화폐인 레알이 도입되었는데, 이를 달러에 연동시키고 고이자율과 임금동결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통제했다. 당시 정부가 도입했던 안정화 정책에는 예산축소, 민영화, 경제개방 등이 포함되었다. 안정화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자 마침내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기 시작했고, 경제도 회복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경제 부문에서 보여준 뛰어난 능력으로 카르도소는 1994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정부 예산을 축소시키고 무역관세를 낮추는 등 개혁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또 통신, 철도, 고속도로, 항만, 은행 분야의 국영회사를 민영화했다. 카르도소는 1962년 이후 최초로 정상적인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었다. 그는 1998년에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연정을 구성한 동맹 정당과의 갈등, 고위 공무원스캔들,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으면서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룰라는 노동계에서 정치활동에 투신하였다.
급진적 노동 운동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여 기득권세력의 배척을 받고 거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는 IMF의 권고안 수용의사를 밝히고 보수세력과 연합하면서 온건 좌파로 변신했고, 빈민층과 서민층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3년 룰라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브라질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며 경제 침체를 겪고 있었다.
룰라는 강력한 통화정책을 실시하고, 공무원의 부패를 단속하는 등의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2006년 룰라는 안정적으로 노동자당pt의 지지를 업고 브라질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승리 2007년 재선에 성공한다.
2.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그는 누구인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우리가 흔히 부르는 룰라는 별명이자 애칭이다
룰라는 1945년생으로 브라질 농촌 카에치스에서 태어났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는 늘상 폭력을 휘둘러 룰라의 어머니는 상파울루주 산투스로 이주했고 룰라는 그런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10세까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상태로 10살에나 국민(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마저도 초등학교4학년에 돈을 벌고자 행상이나 구두닦이로 가정형편에 도움을 주고자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초등학교4학년이 브라질대통령 룰라의 학력 전부였다.
그 이후 금속공장에 들어가 금속노동자로 선반자격증도 취득하였으나 사고를 당해 왼손새끼손가락이 절단되어 없다..
위의 룰라의 사진을 보면 정확히 드러난다...
산업재해 금속노동자출신이 된 룰라는 자기 부인이 가난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뱃속의 아기와 함께 사망하자 분노를 느끼고 노동운동에 본격 투신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였다. 노동조합을 구성하였고 이후 노동자당으로 변신하였다.
금속노조위원장으로 일하며 룰라의 진심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룰라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여러 총파업을 주도하며 룰라와 노동자들은 정치세력화하여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되어 대표적인 브라질좌파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룰라는 급진적인 민주사회주의 좌파쪽의 정치운동가였으나 계속된 대선낙선에 룰라는 대대적으로 변신을 꾀하고 미디어친화적인 활동과 경제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획기적인 복지정책과 외채문제를 해결하려는 공약들이 브라질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어 2002년 10월27일 브라질대선에서 승리해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룰라는 재선에 성공하고 80-90프로에 육박하는 엄청난 브라질국민의 지지를 얻으며 퇴임하였으나 이후 브라질 정치적상황에 따라 라바 자투작전등에 휘말려 부패혐의로 기소되어 2018년에 징역9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게 된다
하지만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와 재판부가 정치적으로 룰라를 탄압했다는 정황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어 2019년 룰라는 석방되었고 2021년 브라질대법원은 룰라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고 유죄받은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판결한다.
바로 대선에 나가겠다고 선언한 룰라는 2022년 브라질대통령 대선에서 아슬한 승부끝에 3선에 성공, 2023년 1월1일부터2026년까지 39대 브라질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룰라는 브라질 헌정사상 최초의 3선대통령이다.
3. 룰라의 경제정책과 변화
수많은 경제개혁 조치가 이루어진 뒤, 1994년 레알 플랜이 브라질에 실시되면서 보다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안정화 프로그램 덕분에 1998년 인플레이션은 4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
1998년부터 1999년에 걸친 쇠퇴기를 지나 브라질 경제는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고 실업률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1년에 나타난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여파가 브라질 경제에도 영향을 끼쳐 지속적인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브라질 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바로 막대한 외채부담이다.
브라질의 채무수준은 개발 도상 국가중 가장 높아서 미국 다음으로 많을 정도다.
이런 막대한 외채부담 때문에 브라질은 국제경제 위기에 매우 취약한 면을 보이면서 세계 경제에 상대적으로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2002년 브라질대선 당시에 미국의 저명한 좌파 남아메리카 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는 2002년 브라질 선거정국에서 좌파의 누가 당선되든 “그들은 경제붕괴에 직면할 것이고, 실패가 확실한 국제통화기금과의 계약관계에 묶여 있을 것이고, 사회적 불안정과 늘어가는 사회적 불만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선거 이후의 시기는 곧 부의 양극화 심화와 경제붕괴로 이어질 것” 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현재 적용되고 있지 않다. 룰라의 실용주의 리더십은 우파와 좌파의 우려를 모두 불식시켰다.
좌파 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해서 브라질 경제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는 사라졌다. 그는 전임 카르도주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좌파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으나 전임 정부의 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오히려 국제통화기금에 진 부채를 3년 만에 모두 상환했다. 2004년에 5퍼센트대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이래로 강화된 기초체력을 배경으로 최근의 세계 경제위기 국면에서도 비교적 선전하고 있다. 나아가 경제위기를 초래한 미국과 서방 선진국의 금융관리 체제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신자유주의 국제금융 체제의 개혁을 주문하고 나섰다.
그는 모든 공약을 이행하지는 못했으나 첫 임기 중에는 가족기금(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으로써 빈곤층을 현저히 줄였으며 빈민지원정책인 포미제루fome zero, 학습지원정책인 보우사 이스콜라bolsa escola, 식량무상지원, 최저임금인상, 최저생계비지원등 강력한 빈곤퇴치정책들을 적극시행하였다.
2007년에는 인프라와 에너지 에너지 자원 개발, 저소득층 주거 및 생활 환경 개선 프로젝트가 포괄하는 성장 가속화 프로그램으로 장기적 성장기반을 준비하였다.
2002년 룰라의 선거공약도 주로 수출과 내수시장 확대를 통한 성장과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집중되어 있었다.
룰라가 꿈꾸는 세상은 아마도 안정적인 투자기반 위에 자율적 성장과 사회적 책임이 공존하는 성장경제라고 생각된다.
그로 인하여 2003년 1월1일에 취임한 이래 6년 반 동안 그가 거둔 성과는 2009년 초에 무려 80퍼센트가 넘는 지지율과 지난 수년간 이루어진 5퍼센트대의 성장,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확대와 높아진 위상으로 나타났다. 일부 급진좌파를 제외하고는 그의 정책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일부에서는 연임제한 조항을 폐기하거나 3선이 가능하도록 하는 헌법개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룰라가 카르도주 정부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비교적 지속적인 성장과 빈곤의 완화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경제는 2007년과 2008년 연속 5.7퍼센트, 5.5퍼센트 성장했으며 소비자물가지수(IPCA)는 2002년 12.5퍼센트에서 2007년 4.5퍼센트, 2008년 5.9퍼센트로 안정되었다. 수출 호조로 인해서 무역수지는 2002년의 130억달러에서 2007년 400억 달러로 늘었으며, 세계경제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 2008년에도 247억 달러의 흑자를 유지했다. 외환보유고는 2002년 378억 달러에서 2008년 1,938억 달러로 크게 증가했다. 또한 2005년 말에는 국제통화기금 부채 155억 달러를 완전히 상환하여 국제통화기금의 통제를 받던 10년간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GDP 대비 공공부문 부채는 2002년 50.5퍼센트에서 2008년 36퍼센트로 낮아져 상당한 개선을 보이고 있다. 강화된 경제의 기초 체력을 바탕으로 최근의 경제위기에도 브라질 경제는 비교적 빨리 성장세를 회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업률은 2002년의 10.5퍼센트에서 2008년 7.6퍼센트로 줄었으며 빈곤층 인구는 2002년 5,748만명에서 2007년 4,178만명으로, 극빈층 인구는 2002년 2,335만 명에서 2007년 1,464만 명으로 줄었다. 빈곤층이 상당수 줄어든 데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가족기금의 역할이 컸다. 가족기금은 룰라가 재선에 나선 2006년 당시에 거의 900만 가구의 빈곤가정과 약 3,000만명의 빈곤 인구가 수혜 대상에 포함된 대규모 프로그램으로, 이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45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빈곤가정의 77퍼센트에 매달 65헤알 정도의 지원금을 제공했다. 지니 계수도 2002년 0.589에서 2007년 0.553으로 개선되었다. 카르도주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된 민영화가 중단되었으며 노사관계나 국가-시민관계에서 약자인 노동과 시민의 입장이 강화된 것도 지적할 만하다.
4. 남겨진 과제와 브라질의 미래
룰라의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판자들은 그가 브라질 경제의 아킬레스건인 공공부채 관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은행부문의 약탈적 수입구조에 거의 손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브라질 재정의 4분의 1 가까이가 공공부채의 원리금 상환에 지불되고 있으며 이는 전임 카르도주 정부의 외국자본 유치를 위한 고금리 정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10퍼센트대 초반으로 낮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수준이다. 그리하여 나타난 고환율로 수출이 억제되고 수입이 증가하면서 국내산업성장이 정체되어 장기적으로 경쟁력 상실로 이어지는 부작용과 함께 현재 브라질의 수출구조가 광물과 원유등 1차상품 위주로 짜여 있는 것도 그런 우려를 뒷받침하고있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룰라는 성장과 분배, 사회정의구현, 브라질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거대 프로젝트와 신에너지개발, 신흥 거대 시장국가의 국제적발언권확보 등의 정책으로 80퍼센트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얻으며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뒤에는 룰라의 리더십, 룰라의 재선을 기대하는 브라질국민들이 뒤에 자리잡고 있었다.
룰라의 통치때에는 브라질경제의 호황기로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하면서 압도적 지지를 이어나갈수 있었다.
재선에 이어 퇴임이후에도 룰라는 브라질정치현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룰라에 대한 핑크색장미빛미래에 대한 기대만큼 재평가와 우려도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제3의 길과 룰라주의를 선택하여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였고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쿠바, 에콰도르등 남미세력들과 외교정책을 꾸려나갔다. 또한 브릭스를 구축하여 신흥국들의 한축을 맡기도 하였다.
브라질외교에서도 획기적인 로드맵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받고 있는데다가 특히 최근 코로나19의 영향과 경제환경의 변화로 경기침체가 길어지고 마이너스성장세를 나타내면서 브라질의 경제상황은 최악일로를 겪고 있으며 해운난이 심각해지면서 물가도 크게 오르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과 원자재가 풍부한 자원대국이라는 점들이 미래를 꿈꾸게 하나 오히려 그 점이 리스크로 작용해 자원의존경제체제를 벗어나 다른 산업을 육성해야할 과제는 브라질경제의 숙명과도 같다.
또한 브라질의 만성고질적인 치안과 교육, 빈부격차, 인프라부족으로 인한 불편한 교통등 쌓여있는 브라질의 과제들도 계속 해결해 나가야하며 미국대통령 바이든도 마찬가지지만 80세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고령의 나이도 우려를 사고 있다.
그리고 재선에 실패한 브라질 반대정파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대통령이 대선결과에 대한 이의신청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대선결과 승복을 하지 않았다. 대선득표차가 1.8%포인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할것인가라는 지속적인 의문이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보우소나루 전대통령의 자유당세력이 상원과 하원, 주지사등에서 모두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룰라와 노동자당의 한계와 부패스캔들로 인해 최근까지 브라질우파세력에게 패배했었으므로 그런 부정부패우려를 완전히 털어낼수 있을지도 숙제로 남아있다.
브라질이 돌아왔다라고 선언한 룰라..
룰라는 선거과정에서 기후변화정책과 아마존열대우림의 보존을 최우선순위로 꼽아왔다.
내일의 브라질을 위한 헌장을 발표하기도 하며 재정건전성, 사회적책임, 지속가능한 발전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은 브라질사람이라고 룰라가 말해왔듯 석유와 철광석, 사탕수수, 커피, 대두등의 에너지와 농산물강국이라는 장점과 함께 브라질의 변화와 전진을 다시 이끌어 재임했었던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아올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2010년 룰라는 대통령에서 퇴임하면서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명언을 남겼다
"왜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하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게 모든 정책의 최우선이다"
-참고문헌
Volker Poelzl, <브라질>, 휘슬러, 2005.
송기도,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개마고원, 2010.
이석형, <브라질: 역사, 정치, 문화>, 까치글방,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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