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1. 김옥균과 신시대의 태동
2. 혁명으로 나아가며
3. 혁명이 아닌 정변. 갑신정변
4. 김옥균, 그의 선택, 그리고 나의 선택
1. 김옥균과 신시대의 태동
김옥균은 1851년에 태어나 1894년 사망하였으며 충청남도 공주출생 본관은 안동 김씨였으며 호는 백온, 자는 고균, 고우
1872년 22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실학파 개화파들에게 영향을 받아 젊은 정치인들과 개화파, 개화당을 결성하는 듯한 움직임까지보였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큰 벼슬을 받지 못하고 말직을 떠돌았다.
1881년부터 3년간 일본을 방문하며 시찰하다가 일본의 영향과 도움을 받고 1884년 34세의 나이로 갑신정변을 주도하나 3일만에 삼일천하로 실패해 일본에 망명하였고 1894년 44세의 나이로 중국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해 삶을 마감했다.
젊은 김옥균에게 처음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은 환재 박규수였다
북학을 계승하여 발전시켰으나 중국중심주의 세계가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소중화(小中華)사상에서 탈피하여 세계관의 변화를 주도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파에게 영향을 끼쳤다.
19세기말 조선의 상황..모든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정치상황이나 경제상황, 대외상황등 문제점이 겹겹이 노출되었다.
1863년에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였으나 1873년 대원군이 경복궁중건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공격을 받고 실각하여 고종이 친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외세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친일파와 친러파, 친미파를 비롯한 수구세력등 정치세력의 갈등으로 국내적으로도 여러 사회상의 혼란의 연속이었다.
대외적으로는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 1876년 강화도조약등 외세의 침입과 내정간섭, 불평등조약등 거의 반강제개항과 서구열강의 진입으로 위기감이 커져가던 시기였다.
조선을 두고 종주국을 자처했던 중국 청나라를 비롯해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등 서구열강과 제국주의세력들이 조선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서구열강과 계속 된 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1894년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하면서 한반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후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기도 하고 러시아는 수호통상조약과 밀약시도에 이어 공사관설치와 내정간섭등 후에 아관파천등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승리이후 중국 청나라를 제치고 한반도 조선에서의 우위를 점하였고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등을 제치고 조선과 조약을 맺어나가며 식민지를 만들기에 이른다.
세세한 과정과 조선침탈과정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19세기말 이미 조선은 중국 청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2. 혁명으로 나아가며
홍영식, 민영익, 유길준, 서광범등을 위시한 개화파들의 사진
이런 한반도 조선을 둘러싼 내외부의 어려움과 갈등속에서 조용히 정치세력화하던 인물들이 개화파였다.
세력이 미진한 개화파는 민영익, 박영효등 조선왕실의 외척들과 손을 잡고 힘을 키워 정치세력화를 시도하였다.
위의 사진에 있는 서광범과 김옥균 그리고 박영효가 개화파의 중심이었다
민영익, 박영효로부터 힘을 얻은 김옥균과 개화당은 대경장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자주근대화개혁을 시도하려했으나 청나라를 비롯한 민씨친청세력과 수구파들에게 방해를 넘어선 정치탄압을 받고 힘을 잃게 되었다.
김옥균과 박영효등 개화파는 이런 정치적갈등과 대립상황에서 우선 정권을 장악하고 그 힘으로 개혁을 이뤄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청나라와 수구세력과 반대상황에 있는 일본의 힘을 빌리게 된다.
김옥균은 1881년과 1882년 1883년 3년간 매년 일본을 방문한다.
근대문물과 기구, 과학, 규범, 일본의 상황을 살펴본다는 이유였지만 실상 제일 큰 목표 중 하나는 국채를 모집해 일본의 차관을 얻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여 귀국하게 되면서 개화당은 더 수세에 몰리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일본 방문후 귀국한 김옥균은 개화파들과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를 발간하는 것부터 발걸음을 나아가게 된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많은 영감과 영향을 받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수 있다.
일본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김옥균은 내심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된다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리라"
(일본이 동방의 영국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한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개화기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 중 하나로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본우익의 시초로 평가하고 있는 인물이다. 일본의 1만엔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화가 쓰이기도 했다.
일본의 젊은 정치인과 사상가들뿐 아니라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에게도 스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처음에는 삼화(三和)주의를 주창하여 아시아의 세 나라 중국과 조선, 일본이 화합하여 아시아의 발전을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개화파와 담론을 나누었으나 청나라에서의 청프전쟁(청불전쟁)과 갑신정변이후부터는 확실한 탈아론으로 일본이 아시아의 통합주체국으로 나아가는 배경을 제공했다.
탈아론이란 서구화를 이룩하는 것이 문명화된 것이며 일본은 청나라나 조선의 개화를 기다리지 말고 아시아를 벗어나(탈아,脫亞)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구미열강이 아시아와 나머지 영토에서 급속히 세력확장을 하고 있는데 서양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속도에서 뒤쳐지는 국가는 경쟁에서 뒤쳐지는 국가와 존재로 치부하고 독립을 유지할 능력도 필요도 없다는 인식이었다
일본의 이웃의 두 나라(중국과 조선)은 개혁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유교적문화는 위선적이고 뻔뻔하기까지하니 일본만큼은 이런 걸림돌에서 벗어나 이웃의 나쁜 아시아나라들과 관계를 끊고 탈아입구해야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 내었다.
탈아입구란 한자 그대로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일본 자체에서도 온고지신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잔여 바쿠후 막부는 걸림돌이라고도 인식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에 대한 증오감과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조선의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실패후에 혹독한 형벌이나 사형등을 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조선정부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면서부터라는게 정설에 가깝다
3. 혁명이 아닌 정변,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그야말로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배경으로는 임오군란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개화파와 사대파와의 갈등에 이어 개화파에서도 여러 노선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민영익이 돌아서게 되고 명성황후 민비를 위시한 세력들에게 정치적으로 몰린 김옥균과 개화당은 출구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청프전쟁 청불전쟁으로 인해 청나라가 일시적으로 힘을 더 잃게 되고 그 가운데 개화당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본이 아시아의 대외변화로 인한 조선진입과정에서 개화당을 이용하고자했다.
갑신정변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의 다케조에공사를 만나고 난 후 서로의 이해과정이 일치된 김옥균과 개화당도 일본의 지원약속을 믿고 갑신정변을 단행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수구파의 대신들을 암살하거나 처단하고 고종에게 정변을 알리고 경우궁으로 안내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김옥균과 개화당을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우정국에서 방화를 하고나서 일본공사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케조에공사와 일본군은 바로 궁으로 입궁하였다.
우정총국에 불길이 오르고 동시에 사대당이라 불리던 민씨척족들이 대거 살해당했으며 개화당, 독립당이라 칭하던 세력들은 대조전 인정전에 있던 조선왕실세력을 우선 손에 넣었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파천시키고 150명의 일본군이 고종 및 개화당 독립당을 경호(or 감시)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 5일에는 이재원과 홍영식을 영의정과 좌의정에 임명하면서 신정부를 수립하였고 김옥균은 호조참판을 맡았다. 12월5일 저녁부터 12월6일 새벽까지 밤새 회의를 가져 14개 혁신정강을 제정하였고 공포하였다.
고종도 추인하여 조서를 내려 갑신정변이 아닌 갑신혁명이 이루어질듯 보였다.
갑신정변의 신정부 강령 14개조를 살펴보자.
제 1조 청에 잡혀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제 2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제 3조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제 4조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제 5조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자는 치죄한다.
제 6조 각 도의 상환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제 7조 규장각을 폐지한다.
제 8조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제 9조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제 10조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일정정도 형을 감한다.
제 11조 4명을 합하여 1명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제 12조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합한다.
제 13조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함분 내의 의정부에서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제 14조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어느 정도 혁신적인 내용도 있지만 평가하기 애매한 부분도 많은 갑신정변 정강 강령은 결과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경기감사 심상훈을 비롯한 세력들과 청나라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려는 시도를 한다.
개화당은 계동궁으로 이동하였으나 명성황후 민비의 요청으로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병사 1500명이 창덕궁에 침입, 내습을 감행했고 조선군은 패퇴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던 일본군도 바로 철수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홍영식과 박영교를 비롯한 개화파들이 살해당했고 연경당, 취운정, 재동, 일본공사관, 교동을 거쳐 그나마 고종을 모시고 일본군과 함께 인천으로 후퇴하던 개화당도 후일을 기약할수 밖에 되버린 상황에서 고종을 떠나보내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개화당 독립당이라 칭했던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단 3일만에 실패해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아버렸다.
그 가운데 조선의 왕 고종의 역할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갑신정변은 고종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었으면 일어날수가 없었던 사건이라 생각한다.
갑신정변 전에 김옥균이 입궁하여 국내외의 정세파악과 설명을 하면서 국내정치를 일신할 것을 청하여 수결을 받았다고 알려져있으며 무능력한 왕으로 보이는 고종은 실제적으로는 끝까지 살아남으려했던 정치고단수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정치력과 별개로 고종과 조선정부는 자주적으로 조선을 유지할 힘이 없었고 그것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신정변 후 조선 내에서 개화당세력은 일소되었다.
주요 개화파인사들을 비롯하여 개화파의 가족들까지도 역시 형을 피할수 없었다.
김옥균은 일본 내에서 암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고 정치의지를 버리지 않았으나 일본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의욕을 잃는다.
실제로도 일본정부는 1886년 김옥균을 오가사와라섬에 귀양보냈으며 1888년 북해도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하지만 조선과 청나라에 끈질긴 김옥균송환요청에도 보내지 않았던 일본은 김옥균을 보호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김옥균은 일본재야인사들에게 지원을 받았지만 곤궁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일본망명후에는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라는 일본이름을 썼다고 알려져있다. 일본에서 여러가지 사업시도를 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으며 일본내의 압력과 알력으로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그 와중 김옥균은 일본에서 초일류의 서예실력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하고 여자와 도박, 잡기에 빠지는 모습들도 노출이 되었으며 특히 바둑은 초특급의 실력이었다고 일본에서 회자되기도 하였다.
1894년에 동경 도쿄로 돌아올수 있게 된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 상해로 망명시도를 하였으나 자객 홍종우 이일직등에게 상해동화양행 호텔객실에서 권총으로 암살당했다.
홍종우는 개화당 동지 홍영식의 친척으로 김옥균에게 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서울 양화진에 실어져 능치처참을 당하고 머리만 따로 효수되어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귀와 함께 시해능욕당하게 되었다.
물론 김옥균의 형제와 가족들까지 모두 사형을 당했다. 심지어 안동 김씨 문중의 균자 항렬을 모두 규자로 바꾸기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한 개화파출신 인물들은 거의 빠짐없이 후에 친일파로 돌아선다.
박영효와 윤치호를 비롯하여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등을 볼때 개화파에게 있어 일본이 어떤 존재였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며 청나라와의 관계와 조선내부정치상황도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데도 갑신정변 역시 일본이 배후에 없었다면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었다.
4. 김옥균, 그의 선택. 그리고 나의 선택
Q1. 김옥균은 일본 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만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A1. 김옥균은 처음 보는 일본과 일본내부에서의 신시대적 근대화시도와 개혁적성향에 엄청 감명을 받은것 같다.
김옥균의 눈에서 새로 보이는 것이 모두 일본에서 전파받았고 메이지유신이후 뻗어나가는 일본의 정치적상황과 과정, 미래를 짐작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본과 별개로 청나라와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세력과 싸우기에는 현실적으로 일본의 힘을 빌릴수밖에 없었고 나 역시도 당시였다면 일본을 선택했을 것 같다.
Q2. 김옥균은 갑신정변 당시와 전후 과정에서 왜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A2. 김옥균의 사상과 성향과 달리 심상훈을 고종이나 민비를 면담케하고 고종을 환궁시키는 등 세세한 곳에서 전략과 신중함, 준비가 부족했음을 지적안할수가 없다. 하지만 후에 보여진 김옥균의 형태를 봤을때 그건 주어진 천성인듯 싶기도 하다. 나였다면 진중히 다른 개화파와 의견을 더 개진하여 선택하였거나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상황, 국제정세를 더 고려하여 타협점과 실제로 이룰수 있는 것을 찾았을텐데 김옥균은 일본을 너무 믿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김옥균과 개화당을 전혀 믿지 않고 이용만 하려했다는데서 신중함을 떠나 실패할수밖에 없었다.
Q3. 당시 청나라와 일본사이의 국제정세를 봤을때 좀 더 기다렸어도 됐을텐데 청일전쟁을 앞두고 청국 청나라에 건너간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후에 박영효가 청일전쟁 이후 복권된 것을 보면 이미 10년을 기다린 김옥균이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하면 아쉬움에 나였다면 운신을 더 신중히 했을 것이다.
A3. 당시 이홍장의 양자였던 주일 청나라공사 이경방의 설득으로 청나라로 향했다고 한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격렬하게 싸웠고 원수에 가까웠던 중국 청나라와 교섭을 할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에서 김옥균이 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냥 시대에 순응해야했을까.. 그렇게 발버둥치며 변화를 시도하는게 맞았을까..
성공하면 관군, 실패하면 역적
결과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의 힘을 빌렸고 일본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평가받는 김옥균.. 그걸 반성하고 알았기 때문에 청나라로 망명 시도를 했던걸까?
단순히 김옥균을 친일파였다고만 규정할수 있을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도 김옥균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아직도 갑신정변의 상황과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며 언제까지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만을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고 김옥균의 실패에서 어느 정도 배워나갈 필요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100여년전의 김옥균.. 100여년후의 김옥균..
100여년전의 조선...100여년후의 대한민국..
김옥균 완성되지 않은 그의 혁명.. 과연 정변이었을까 혁명이었을까
후에 개화당동지였던 박영효는 김옥균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었다는 것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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