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에 맞선 제일연합군, 백강구전투(백촌강전투)와 사료고찰
순서
1. 시작
2. 백촌강전역에 담겨진 의미
3. 일본사료의 해석
1) 백강구전쟁에서의『일본서기』의 고찰
2) 사료검토 - 학계연구
4. 백제와 일본관계에서의 사료고찰
1) 일본 구원군 파견의 성격과 연구
2) 사료검토 - 학계연구
* 부록 - 고대일본연표(391~720)
1. 시작
평소에 필자는 고대 한·일관계에서부터 두 나라의 역사연구방향과 지향점이 상당히 다르다라는 데 관심을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컸던 궁금증이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기록부분이었다. 일본 고대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고려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400년이상 연대차이가 난다.
『고사기』는 712년,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되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1145년, 『삼국유사』는 1281년경에 편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舊唐書)』는 945년, 『신당서(新唐書)』는 1160년, 『자치통감(資治通鑑)』은 1084년에 찬술되었다. 이렇게 먼저 지어진 일본사료들이 한국에서는 신빙성없는 사료로, 또 참고가치가 없는 사서로 인식되는 경향이 분명히 있어왔다.
일본사료의 어느 부분이 조작되고 왜곡됐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진행되어왔으나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문헌을 극히 중시하는 역사연구태도가 굳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겠으나 우리나라의 고대사연구만큼은 중국과 일본의 사료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와 관계되어 근래 부각되고 있으며 아직 올바른 해석이 내려지지 않은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백강구전쟁(白江口戰爭)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그리고 그로 인하여 파생된 역사적결과와 그 당시 고대 한일관계를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조명해보면서 사료비판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사와 앞으로의 과제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 백촌강전역(白村江戰役)에 담겨진 의미
7세기 중엽에 일어난 백강구전쟁만 하더라도 일본인에 의한 연구는 거의 일본사(日本史)의 입장에서 조명되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과거 일본의 관학(官學)이나 군국주의에 의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당시의 사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사의 입장에서 조명됨은 당연하다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또한 현대의 일본사학연구가 전전(戰前)의 역사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검토의 여지가 있다.
663년 백강구해전(白江口海戰)은 신라·당군과 백제·일본군 사이에 일어난 연합전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은 이 전쟁의 참패로 큰 타격을 받고 대외진출이 소극·수세화되었고, 신라는 이 전쟁을 통하여 자신을 갖고 삼국통일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또 국제적인 지위도 상승되었다.
당과 신라의 관계는 중화주의적인 대외관계가 바탕이 된 책봉질서(冊封秩序)안에서 유지되었다. 신라가 자발적으로 요청한 관계이다. 그러나 일본과 신라, 그리고 백제의 관계는 일본사서에서는 신속(臣屬) 또는 주종관계(主從關係)의 조공기록이 무수히 보여지고 있다. 또 일본사서에서 신라를 ‘번이(蕃夷)’로 지칭한 예도 있다. 그렇기에 고대 한일관계사를 조명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백강구전쟁에 대한 명칭을 일본에서는 ‘백촌강전역’이라 부른다. 백촌강(白村江)은 백강의 별역(別譯)이라고도 하며, 백촌강의 ‘촌(村)’은 ‘말(마을)’ 로 음독(音讀)하여 ‘백마강(白馬江)의 축사(縮寫)로 보는 연구도 있다. 전역(戰役)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파견한 원병(援兵)의 역사(役事), 즉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해 짜맞추어진 말인 듯하다. 즉 개전(開戰)에서 종전(終戰)까지의 전과정을 총괄하는 의미로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백제를 속국으로 지배하는 후견자적인 입장에서 당군과 싸우기 위하여 출병의 역(役)·역사(役事)·역할(役割) 등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즉 한반도의 동란에 대한 일본 간섭군이 파견된 것이 곧 백강구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해석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신라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백강구전역(白江口戰役)이라 할 때 내포되는 감정적인 의미는 전쟁의 역할, 작용이다. 근래 중국에서는 백강전투를 백강구지전(白江口之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학자들은 일본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내용과 명칭도 일본인이 부르는 ‘백촌강전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의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에서는 백강구(白江口)와 백촌강전(白村江戰)의 항목을 함께 설정하였다. 한자문화권의 동일한 용어일지라도 그 뜻은 각기 달라지고, 역사용어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신중히 선별하여 사용해야겠으며 앞으로의 관계사연구를 통해 통일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할듯 싶다. 그것을 위하여 동아시아사를 정리하는데 관계국들의 공통된 연구로 접근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학계의 다른 시각도 최근에 나타나고 있다. 기존 한국학계에서는 일본서기의 백촌강을 백강과 같은 것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본과 백제는 당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백강’의 존재를 일본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백촌강’이라는 낯선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그것이 ‘백강’과는 다른 강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8월조에 보면, ‘백촌강’은 ‘백촌’이란 지역에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즉, 일본의 구원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소식을 들은 풍왕이 장군들에게는 나·당 연합군의 행동에 대처하도록 하고 자신은 ‘백촌’으로 가서 이들을 맞이하고자 했다는 기록 다음에 당의 전선(戰船) 170척이 ‘백촌강’에 진열해 있었다고 하여, ‘백촌’이라는 지역을 먼저 제시한 뒤 ‘백촌강’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백촌강’은 금강을 의미하는 ‘백강’과는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일본인들이 ‘백강’을 ‘백촌강’으로 잘못 기록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엄연히 다른 강이었기에 ‘백촌강’으로 기록한 것이라 여겨지는바, 오히려 300년 정도 지난 후 중국인들이 구당서를 편찬할 때에 이 ‘백촌강’을 ‘백강’으로 잘못 기록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수가 이후 중국의 역사서 및 삼국사기에 그대로 영향을 주어 ‘백강’으로 기록된 것인지, 실제로는 백강이 아닌 ‘백촌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보통 중국 사료의 내용을 받아들여서 백강구전투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 경우의 ‘백강’은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촌강’의 잘못된 기록이기 때문에 종래 백강으로 불리던 금강과는 다른 강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종합해보면 한국학계에서는 한반도 내의 백제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시각을 강조하다보니, 당시의 전쟁이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지닐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을 효과적으로 조명해 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보여주게 되었다. 백강구전투를 다룬 글은 넘치고 있지만, 아직도 전투가 벌어진 백강구라는 지역이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 만큼 기본적인 사실관계 조차 밝혀내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물론 일본사서에는 사료비판 없이 넘어가면 문제될 부분이 많다. 그러나 기존의 한국연구를 볼 때 감정적이거나 민족적인 감정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해도 내면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포함된 연구들이 대부분이다. 이 부분을 앞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도 남겨진 과제이고, 풀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다.
3. 일본사료의 해석
1) 백강구전쟁에서의『일본서기』의 고찰
『일본서기』에 기재되어진 7세기 중엽의 군사출병에 관련된 기사는 중국·한국측의 기록보다 상세하다. 『삼국사기』는 일본군이 백강에 당도하여 정박하고 있을 때부터 나타난다. 이 점은 『구당서』와 같이 나당연합전의 경위를 전체적으로 기술하는 데서 백강구전쟁이 나타난다. 『일본서기』는 ‘출정준비’에서부터 파병·철수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상세히 기록한 점이 다르다.
①『일본서기』권 27 천지<덴지>천황(天智天皇) 2년조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六
◎六月。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取新羅沙鼻岐。奴江二城。百濟王豐璋嫌福信有謀反心。以革穿掌而縛。時難自決。不知所爲。乃問諸臣曰。福信之罪旣如此焉。可斬不。於是。達率德執得曰。此惡逆人不合放捨。福信卽唾於執得曰。腐狗癡奴。王勒健兒。斬而醢首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甲午
◎秋八月壬午朔甲午。《十三》新羅以百濟王斬己良將。謀直入國先取州柔。於是。百濟知賊所計。謂諸將曰。今聞。大日本國之救將廬原君臣率健兒萬餘。正當越海而至。願諸將軍等應預圖之。我欲自往待饗白村。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戊戌
◎戊戌。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艘。陣烈於白村江。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戊申
◎戊申。日本船師初至者。與大唐船師合戰。日本不利而退。大唐堅陣而守。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己酉
◎己酉. 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而相謂之曰。我等爭先彼應自退。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進打大唐堅陣之軍。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須臾之際。官軍敗績。赴水溺死者衆。艫舳不得廻旋.
② 『삼국사기』 권 28 의자왕 20년조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帥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 同趍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艘.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豐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劍. 王子扶餘忠勝忠志等帥其衆. 與倭人並降.
③ 『삼국사기』권 7 문무왕 11년조
至龍朔三年. 摠管孫仁師領兵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艘. 停在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 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④ 『자치통감』 권 201 용삭 3년 9월조
九月,戊午,熊津道行軍總管、右威衛將軍孫仁師等破百濟餘眾及倭兵於白江,拔其周留城。初,劉仁願、劉仁軌既克真峴城,詔孫仁師將兵浮海助之。百濟王豐南引倭人以拒唐兵。仁師與仁願、仁軌合兵,勢大振。諸將以加林城水陸之沖,欲先攻之,仁軌曰:‘加林險固,急攻則傷士卒,緩之則曠日持久。周留城,虜之巢穴,群兇所聚,除惡務本,宜先攻之,若克周留,諸城自下。’於是仁師、仁願與新羅王法敏將陸軍以進,仁軌與別將杜爽、撫餘隆將水軍及糧船自熊津入白江,以會陸軍,同趣周留城。遇倭兵於白江口,四戰皆捷,焚其舟四百艘,煙炎灼天,海水皆赤。百濟王豐脫身奔高麗,王子忠勝、忠志等帥眾降.
『신당서』와 『구당서』, 『삼국사기』, 『자치통감』, 『일본서기』 등의 사료로 당시 상황을 유추해보면 일본군은 4번의 전투에서 모두 참패한 것이 일치하고 있다. 부여풍(豊)이 고구려로 갔다고 짐작한다던지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도 『자치통감』,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다.
『일본서기』는 또한 일본군의 병력을 40,000여명으로 추산하였다. 천지(天智) 2년 3월조에 보이는 해군 27,000명과 같은 해 8월 육군 10,000여명을 합친 병력의 수송선 및 전선을 합친다면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왜선 1,000척은 타당성이 있다.
백강구전투에서만큼은 『일본서기』가 동아시아 사료 중 관심을 기울여 파병기록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강구전투에서는 부여륭과 풍왕이 서로 대립하는 형세로 나타나고 있다. 『구당서』와『신당서』의 유인궤전이나 백제전 및 『자치통감』의 당기 등과 같은 중국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나․당 연합군은 유인원․ 손인사․ 김법민이 육군을 거느리고 직접 주류성으로 향하고, 유인궤․ 두상․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금강에서 나와 동진강으로 진입한 뒤 주류성으로 가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인궤 군대는 백촌강이라 불리던 동진강 입구의 바다에서 왜선과 만나 4차례 전투를 벌인 결과 왜선 400척을 불태워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고 할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부여융은 과거의 적(敵)이었던 당나라나 신라와 손을 잡고 이제는 오히려 백제부흥군과의 전쟁에 참가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의자왕의 적장자이자 태자로서 백제의 항복식 때에는 의자왕과 함께 수모를 겪었던 부여륭이 이 때에 새로운 모습으로 부흥운동군 앞에 나타난 것은 결과적으로 백제의 왕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과거의 전통적인 권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통적인 권위와 부흥운동군에 의해 새롭게 정통성을 부여받게 된 풍왕 중심의 새로운 권위가 양립하게 된 상황 속에서, 663년 8월 27일과 28일 양일 간의 전투가 일본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나자 풍왕은 자신감을 상실한채 9월 1일 고구려로 도망하였고, 9월 7일에는 주류성도 함락당하게 된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이나 『신당서』등의 중국측 기록에는 9월 8일에 주류성을 함락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일본서기』와는 하루의 차이가 난다.
일본의 대규모 지원군이 참패하자 내분으로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던 부흥군은 그들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자신감까지 잃어버려 붕괴속도가 더욱 빨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의 항거가 흑치상지에게 성이 함락되는 11월까지 계속되었고, 664년 3월에는 백제의 남은 무리가 사비성으로 모여들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도 보이지만, 이는 꺼져가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성들이 모두 다시 귀순(歸順)했다거나 백제가 모두 평정되었다고 한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등의 기록 및 ‘주류성이 함락되었으니 백제의 운명이 오늘로 끝났다’고 탄식했다는 백제 사람들의 말을 기록해 놓은 『일본서기』의 기사는 백강구전투의 승패가 곧 백제부흥군과 백제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대한 고비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사료검토 - 학계연구
①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卽位前紀齊明天皇七年(六六一)八月。遣前將軍大華下阿曇比邏夫連。小華下河邊百枝臣等。後將軍大華下阿倍引田比邏夫臣。大山上物部連熊。大山上守君大石等。救於百濟。仍送兵杖五穀。〈或本續此末云。別使大山下狹井連檳榔。小山下秦造田來津守護百濟。
②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卽位前紀齊明天皇七年(六六一) 九月。皇太子御長津宮。以織冠授於百濟王子豐璋。復以多臣蔣敷之妹妻之焉。乃遣大山下狹井連檳榔。小山下秦造田來津。率軍五千餘衛送於本鄕。於是。豐璋入國之時。福信迎來。稽首奉國朝政。皆悉委焉。
③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元年(六六二)三月癸巳 三月庚寅朔癸巳。賜百濟王布三百端。 天智天皇元年(六六二)三月 是月。唐人。新羅人伐高麗。々々乞救國家。仍遣軍將據疏留城。由是唐人不得略其南堺。新羅不獲輸其西壘。
天智天皇元年(六六二)夏四月。鼠産於馬尾。釋道顯占曰。北國之人將附南國。盖高麗破而屬日本乎。
天智天皇元年(六六二)夏五月。大將軍大錦中阿曇比邏夫連等。率船師一百七十艘。送豐璋等於百濟國。宣勅。以豐璋等使繼其位。又予金策於福信。而撫其背。褒賜爵祿。于時豐璋等與福信稽首受勅。衆爲流涕.
④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二年(六六三)三月。遣前將軍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盖。中將軍巨勢神前臣譯語。三輪君根麻呂。後將軍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率二萬七千人打新羅
⑤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六月。前將軍上毛野君稚子等。取新羅沙鼻岐。奴江二城。百濟王豐璋嫌福信有謀反心。以革穿掌而縛.
⑥ 일본서기 권 제27 천명개별천황 천지천황
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甲午 ◎秋八月壬午朔甲午。《十三》新羅以百濟王斬己良將。謀直入國先取州柔。於是。百濟知賊所計。謂諸將曰。今聞。大日本國之救將廬原君臣率健兒萬餘。正當越海而至。願諸將軍等應預圖之。我欲自往待饗白村。
위 6차례 파병의 사료로 볼 때 기존 연구에서는 잡다하게 중복된 기록이 있다고 하여 비난하는 한국연구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사료들이 전쟁부분에서만큼은 간략히 서술되고 있는 기존의 서술방식이고 일본사료는 대부분 전쟁기술이 상세하다.
『일본서기』의 사료적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이 서술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부여풍을 호송하여 본국으로 귀향하는 내용이다. 위 ②, ③의 사료부분인데 여기서 소요된 시간을 문제로 삼는다. ②의 호송선이 출발한 날짜가 661년 9월인데 ③의 도착날짜는 662년 5월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9개월의 시간이 너무 길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전쟁 중에 왕족을 호송하는데 전쟁의 추이를 중간에 지켜보았을 수도 있고 백제남부에 체류하다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661년 9월을 환국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한국학계의 연구도 있다.
둘째, 전 천황인 제명-사이메이(齊明)의 죽음이 661년 7월이라면 일본에서는 국상기간임에도 그 기간에 외국에 군사를 파견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굳이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세계사를 보아도 군사적행동에서는 그런 것을 초월하는 지표가 많다. 국상기간을 지적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셋째, 일본을 표현하는 ‘대일본국지구장(大日本之救將)’의 표기에 문제를 삼는다. 대치세력이었던 ‘대당군(大唐軍)과 대칭해서 부르기 위해 개작하여 서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당군과 직접 마주쳤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역사적으로 그렇게 서술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나당연합군과 일본,백제의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렬하게 해전을 펼쳤던 것은 역사적사실이기 때문이다.
넷째, 『구당서』에 보이는 ‘왜중(倭衆)’이라는 표현을 두고 정규군이 아니었다고 규정한다. 실제 전투에서 쉽게 패했을 뿐만 아니라 당군에게 오합지졸로 보일정도로 군세가 미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게 육로로 지원받는 나당연합군과 고대에 먼 거리를 항해하여 패망한 백제와 같이 연합한 일본군이 보급체계와 사기가 높았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구당서』의 해당표기를 보아도 승리자인 중국에 그리 표기된 것도 무리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에서 보면 660년 당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백제를 멸망시킬 때 동원된 군사가 130,000명이고 또 661년 3월 유인궤(劉仁軌)가 당 고종에게 원병을 더해 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 손인사(孫仁師)가 거느리고 온 병사만도 7,000명이다. 이외에도 유인원(劉仁願)의 진수부대(鎭守部隊)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10,000명이다. 신라군에 지원까지 있었다고 하면 전쟁기간이 길긴 했어도 150,000여명의 대군과 백제부흥군과 일본연합군이 맞붙는다고 했을 때를 보아 군세의 미약함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학계의 일각에서는 위와 같은 예를 들고 백강구전쟁의 성격을 백제부흥에 맞추어 일본에 나가 있는 백제계 이주민의 구국적인 복귀에서 이룩된 참전으로 규정짓고 있다. 일본의 연구들은 군국주의 역사가들이 기도한 주장 또는 식민사관과 남한경영론(南韓經營論)의 일부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학계의 주장대로라면 오랜 전통의 우호관계 위에 지원군을 파견했을 뿐인데 종래 일본학자들은 그것을 백제에 대한 맹주(盟主), 또는 주종(主從)관계로 확정짓고 자국사에 특화된 논리를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당서』와 『구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보다 시대적으로 일찍 찬술되었던 『일본서기』의 사료를 우선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서기』에는 중국과 한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백강구전쟁의 패인이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파견군의 성격과 그들이 싸운 전황(戰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중국·한국·일본 등 세 나라의 각기 다른 사서(史書)를 종합하여 전쟁의 경위를 재구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의 부여륭연구과정에서 밝혀진 「부여륭 묘비명」을 통해 『구당서』와 『신당서』, 그리고 『삼국사기』의 서술의 잘못을 바로잡은바 있다. 부여륭 묘비명을 통해 묘지명 자체의 성격이나 부여륭의 웅진도독으로서의 활동내용, 그가 죽은 시간과 장소, 나이 등 문헌자료에서 알기 힘들었거나 또한 잘못 기록되었던 내용을 바로 잡아 밝히는 소정의 성과도 거두게 되었다. 예를 들어,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전이나 『삼국사기』의 의자왕 본기에서는 부여륭이 677년 웅진도독 겸 대방군왕으로 임명되어 백제 땅에 파견되었으나 신라의 위세에 눌려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지역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묘지명을 통해 그가 사실은 682년 68세의 나이로 중국 낙양의 자기 집에서 사망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치통감의 부여륭의 웅진도위에 대한 기록에서도 사마광 또한 역사왜곡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위의 사료들을 살펴본 바 각 사서들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전황을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사서는 승전(勝戰)에 관한 서술에 충실하고, 『일본서기』는 파견군의 준비와 패인에 관한 기록을 상세히 남기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삼국사기』는 왜선(倭船)의 숫자에 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중국사서를 원사료(原史料)로 취하였다. 『일본서기』 권 27에는 전쟁의 패인을 두고 백제왕과 일본 장수들이 서로 일치된 의견을 내렸는데, 첫째로 기상(氣象)을 관찰하지 못한 것, 둘째, 선단(船團)을 신속히 회선(廻旋)시키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일본서기』의 백제왕은 부여 풍(豊)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일본서기』는 백강구전쟁을 기승전결로 상세히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료들을 바탕으로 일본파견군의 성격을 규명하는 연구는 많이 있어왔으나 결론적으로는 종래 일본의 연구성과를 『일본서기』에만 근거하여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결부짓고 새로운 방법의 모색을 촉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적가치, 일본측 사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과연 그러했는지 증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료적인 한계가 크고 문제점이 많을수록 남아 있는 사료에 대한 접근을 더욱 신중하게 해야할 것으로 본다. 사료의 신뢰도 문제는 해당 사료 기록자의 성격 문제, 사료가 만들어진 시기적인 차이문제, 사료 내용의 현실성 문제, 사료가 만들어질 당시의 배경과 시대 상활 문제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4. 백제와 일본관계에서의 사료고찰
1) 일본 구원군 파견의 성격과 연구
일본의 연구들은 백강구전쟁을 맹주국에서 구원군을 파견 또는 출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구원은 일본이 그들에게 예속된 백제의 위기를 돕기위해 병력을 출동시켰다는 뜻이 된다.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에 17차례의 출병(出兵)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 가운데 661년~663년의 백제의 부흥운동기에 있었던 출병만을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원이라는 표현에 국내학계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세 가지정도로 볼 수 있는데 첫째로 ‘임나(任那)’가 멸망한 후부터 백강구전쟁의 참전까지를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철수(撤收)와 재흥(再興)의 사이클로 묶어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본의 백제파병이 종주권의 행사라는 것과 셋째로 백강구전쟁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전쟁’, ‘일당(日唐)전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백강구전쟁을 당과 일본의 세력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치하였던 선상에 올려놓는 중국학자들도 비난하고있다. 한국학자들은 대부분 일본이 백제파병을 미화시켜 종속관계로 확정하려고 한다던지, 일본의 연구성과가 먼저 앞선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고대 한일관계사에 있어 주체적인 입장을 개발해 나갈 것만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문헌사료를 보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연구해야함은 당연하지만, 더 나아가 고대한일관계사의 기존연구를 모두 조작된 역사, 일본의 관학(官學)이 주도한 역사적유물로 판단한다는 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은 자발적으로 원군을 보낸 것이 아니라 660년 10월에 무왕의 조카로 알려진 복신(福信)은 좌평 귀지(貴智)등을 일본에 보내 출병 요청과 함께 그곳에 머물고 있는 왕자 풍(豊)을 국주(國主)로 삼겠다며 귀국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국내학자들은 『일본서기』의 혼용과 반복되는 기사들을 근거로 본래의 문헌이 가삭(加朔)되고 조작되면서 남긴 흔적, 또는 이후 변조되면서 오류(誤謬)·혼효(混淆)·착란(錯亂) 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체적으로 『일본서기』가 조작되고 분식되었다고 보는 국내학계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이 문화의 모태인 백제로의 귀소성적인 흐름 위에 구원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 도래인의 귀소성적 경향을 찾아 연구한 결과가 있다. 일본에 백제계의 도래인이 영향을 미쳐 백제와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일본의 구원군 파견이 백제 도래인의 귀소성적 경향때문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문을 느꼈고, 연구결과를 토대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2) 사료검토 - 학계연구
국내학자들은 『일본서기』의 편찬에 백제계의 도래인이 참여하였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 그것은 백제삼서(百濟三書)가 원사료로서 인용되었고, 『일본서기』에 백제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인데 반하여, 신라는 자못 경직된 적대국으로 서술되었다는데에서도 근거를 찾는다. 또한 국제정세를 구당서와 자치통감을 신용하면서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서기』에서는 사료운용(史料運用)을 하는데 있어 일방적인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하는 것은 선뜻 수긍하기 어렵지만 각 사료들을 규합하여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면 백제가 일본에게 지원요청을 한 것이 일본서기에는 제명(齊明)6년 9~10월이다.
이때의 『삼국사기』는 일본관계가 명확히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의자왕(義慈王) 13년(653)에 왜국과 왕래한 기록이 있고, 의자왕 20년(660) 조에는 고왕자(古王子) 부여 풍을 중심으로 하는 부흥운동이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일본서기의 천지조(天智朝)를 살펴보면 ‘국인(國人)’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문제는 그 국인이라는 용어의 해석이다. 국내학자들은 일본서기가 백제에 대해서는 망국기사(亡國記事)를 많이 싣고 있어서 백제와 일본을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일본서기에 나타난 ① 국인(國人), ② 망국(亡國) ③ 본향(本鄕) ④ 본방(本邦) ⑤ 구원(救援) ⑥ 본토(本土) 라는 말에 그 의도가 엿보인다고 하고 그 이유를 선진문화의 위치에 있었던 백제에 대한 귀소성(歸巢性)으로 풀이한다. 덧붙여 『일본서기』가 일본중심의 편찬의식(編纂意識), 일본중심의 입장에서 씌여진 것이라고 할 때 국인(國人)은 일본인이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인을 백제인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서는 개인적인 사유라고 설명할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국인이랑 낱맡을 두고, 최근 한국에서 출판된 일본서기의 역주(譯註)도 비난한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자체에서 도래인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나 도래인 중심의 역사가 일본의 역사라는 등식은 성립하기 어렵다.
백강구 전투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백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상당수 바다를 건너갔다. 지금의 도쿄 일대의 관동지역인 동국(東國)에 거주하던 백제인 2천 명에게 663년부터 3년간 식량을 일본의 조정에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려는 일본 조정에 등용되었다. 천지 4년(665) 달솔 답발춘초(答㶱春初)는 장문성(長門城)을,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四比福夫)는 다자이후(大宰府)의 방어를 위해 쌓은 오오노성(大野城)과 연성(椽城)의 축조 책임을 맡았다.
671년에 목소귀자․곡나진수․억례복류․답발춘초 등은 병법에 밝다는 점을 평가해 대산하(大山下)의 관위가 주어졌다. 좌평 여자신과 일본 조정의 ‘법관대보(法官大輔)’인 사택소명(沙宅紹明)은 대금하(大錦下)가, ‘학직두(學職頭)’인 귀실집사(鬼室集斯)는 소금하(小錦下)가 주어졌다. 그리고 몇몇은 의약, 오경(五經), 음양(陰陽) 등에 밝다는 재능을 평가받아 관위가 사여되었다. 이밖에 달솔 등 50여 인이 관위를 받았다.
망명한 그들의 삶은 어쩔 수없이 일본 황실에 기생하여 지낼 수없는 숙명을 띄게 되었다. 그들은 백제 부흥과 고국 복귀를 바랐지만, 자력으로 구체화할 역량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열망할수록 실현 가능성을 일본세력의 한반도 개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조정이 한반도에 관심을 유지하게 깊은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반도가 이른시기부터 일본 천황가에 종속되었다는 역사상 구축에 적극 나섰다.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는 이들의 저술이거나 그들의 손을 거쳐 수정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저술은 『일본서기』의 내용 구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일본서기』는 그 뒤 일본인들의 대외의식, 특히 대한국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일본서기』의 사료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부록 - 고대일본사연표
1.야마토(大和) 시대 (300경~710) = 고분(古墳) 시대 - 아스카(飛鳥) 시대
1) 고분(古墳) 시대 (300경~592)
372 백제가 왜왕에게 칠지도七支刀 하사 (石上神宮의 七支刀)
391 왜병이 광개토대왕군과 싸움 (광개토대왕비)
413 왜오왕 중국에 조공
538 百濟로부터 불교 전래
562 任那日本府 멸망
2) 아스카(飛鳥) 시대 (592~710)
592 推古(스이코) 천황(쇼토쿠 태자의 숙모) 즉위
593 聖德太子(574~622) 섭정(~622)
600 제1회 견수사 파견
603 관위12계 제정
604 쇼토쿠 태자, 헌법17조를 제정
607 小野妹子(오노노 이모코) 견수사 파견
620『천황기』,『국기』편찬
630 제1회 遣唐使 파견
646 大化改新: 고대 東아시아적 중앙집권국가 성립 출발점, 難波(나니와)로 천도
652 班田收授法 시행
660 백제 멸망
663 白村江(금강하구 앞바다) 전투 - 백제 부흥운동에 해군 2~4만명 파병
672 壬辰(진신)의亂: 大海人皇子(오오아마노미코, 天武), 大友(오오토모)皇子 제거
673 天武천황 집권(~686) - 중앙집권 통일권력 확립, 日本ㆍ天皇 칭호 확립, 율령체제 정비, 수도 확정
675 天武 천황 육식금지령
694 藤原京로 천도, 唐 長安을 모방하여 건설한 일본 최초의 계획 대도시
701 大寶律令 반포
2. 나라(奈良) 시대 (710~794)
710 元明(겐메이) 천황이 平城京(헤이죠코, 奈良)로 천도
7대12 일본 최초 역사서『古事記』(koziki) 편찬
718 養老律令 공포
720『日本書紀』편찬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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