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오늘은 천주교 순교자 순례지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 황사영의 묘 방문후기 포스팅합니다
천주교의 입장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조선에서 종교적박해로 처형당한 순교자이지만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볼때 그는 역적이자 반역자, 매국노, 나라를 프랑스와 청나라에 팔아먹으려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역사적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봤을때 그럴지언정 스무살의 피끓는 청년이 스승과 친척, 같은 천주교신자들이 박해당하고 처형당하고 마지막으로 유복자태생으로서 철썩같이 믿던 부모같은 신부가 처형당했을때 비분강개하여 도움을 받을만한 곳에 그런 내용을 쓸 만도 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측면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어떻게 말하고 평가하기가 아직은 어려운거 같습니다
과연 황사영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일까요 나라를 팔아먹으려한 조선의 반역자이자 역적일까요?
황사영의 묘,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 위치와 주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35-1, 또는 장흥면 부곡리116-2
속칭 양주시 장흥면 가마골부근에 있습니다
아직 사적지나 순교지나 그렇게 구성되어있지는 않으며 천주교 카톨릭성당에서는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때 황사영백서의 원본을 로마교황에게 전달하였고 순교자이기는 하나 반역논란 매국논란때문에 2013년에야 한국천주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가 진행중이며 2013년 교황청은 시복 후보자에게 부여되는 하느님의 종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하였고 2017년부터 시복소송절차에 들어가 2021년 시복133위의 예비심사문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여 현재 시복진행중입니다 같은 시기 처형된 정약용의 형 정약전과 주문보신부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방한때 윤치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때 시복되어 복자가 된 경우가 반대로 황사영은 확실히 아직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논란이 있는 인물임에는 분명한거 같습니다
황사영의 묘는 순례성지처럼 건물이 있으나 현재 운영중이지가 않고 묘소가 있어 도로변에 있는 방치된 묏자리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의정부교구에서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 남종삼 성인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했으며 송추성당을 묘소 순례지로 지정해 관리하여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교자 순례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 앞에 있는 건물입니다 원래는 박물관이나 전시장처럼 보이는데 지금은 내부공사중이라는 알림과 함께 아무것도 없고 그 앞에 십자가가 하나 서있습니다
십자가 옆에 2023년 2월10일 제작 호성조형 윤경호요셉이라고 써져있는거보니 최근에 조성된 십자가로 천주교의 순교자성지로 지속적으로 관리는 되고 있는 듯합니다
황사영은 1775년 한성부 아현(현재의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황석범의 유복자이자 3대독자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라고 합니다 그런 유복자인 황사영을 기린 동상인거 같구요
1790년에 16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자 조선 정조가 황사영의 손목을 잡고 지금 나이가 너무 어려 벼슬 내리기가 어려우나 스무살이 되서 꼭 내게 오면 벼슬자리를 주겠다라며 칭찬하여 감격한 황사영은 그 이후 정조가 잡았던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 10여년간 살았으며 배론 성지에서 체포되어 끌려갈때도 그 손목만큼은 포졸들이 잡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남인의 명문 세도가출신으로 다산 정약용의 가문과 인척을 맺습니다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장녀 정난주, 아명 명련과 혼인해 정약용과는 조카딸사위가 되고요
정약용의 셋째형이고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종의 제자입니다
정약종은 이승훈 이벽과 함께 조선의 천주교 도입과 함께 교회지도자로서 알려져있었고 그에 따라 황사영은 정약종, 홍낙민등의 영향을 받아 알렉산데르,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주문모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나 더욱 큰 깨달음을 얻고 천주교모임인 명도회의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회장 정약종...)
하지만 그로 인해..
황사영 백서사건
1801년 조선의 천주교박해로 인한 신유박해때 권철신, 정약종, 주문모신부, 강완숙, 이가환, 이존창을 비롯하여 그 당시 조선의 천주교지도자들이 대부분 처형당했고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황사영은 상복을 입고 충청북도 제천 배론 토굴 옹기가마터로 숨어지냈다고 합니다 믿고 따르던 주문모신부까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황사영은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탄원서를 적어 옥천희와 황심이라는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도중에 발각되어 옥천희와 황심이 체포되고 맙니다 황심의 자백으로 인해 황사영도 9월29일에 체포되고 백서의 내용이 공개되어 그 심각한 내용에 얼마지나지않은 11월 황사영은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당하여 처형당했습니다.
이 일련의 사태가 황사영백서사건이며 주동자가 황사영으로 밝혀지자 조선 조정은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더 처형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엄청나게 강화되었습니다
황사영백서사건이 대체 뭐고 황사영이 백서에 뭐라고 적었냐면은..
황사영백서는 무려 122행 도합 1만3천3백84자 13311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검은 먹글씨로 비단에 깨알같이 썼다고 합니다
황사영백서의 내용은 첫번째로 현재 조선의 천주교교회의 사정과 종교적탄압 박해에 대해 설명하고 신유박해의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에 대해 적었고 두번째로 주문모신부의 활동과 자수, 죽음에 대해 썼고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수 있는 방안에 대해 적었습니다 천주교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정치적으로 남인에 대한 탄압 벽파와 시파간의 치열한 당쟁때문이었음도 피력하였습니다
세번째로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일수 있도록 할 것이며, 아니면 청나라의 감호를 요청하여 조선을 청나라의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척과 수만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선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외세의 원조를 청하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세번째가 치명적이었습니다
천주교탄압과 박해가 남인 및 노론시파에 대한 탄압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조선 조정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들은 아연실색할수밖에 없어 오히려 조선조정이 후폭풍을 감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당연히 황사영의 집안은 풍비박살이 나버리고 숙부와 어머니와 부인과 외아들은 모두 외딴 섬에 유배되었고 시신을 수습할 자조차 없이 양박청래 역적의 이름을 쓰고 있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홍복산에서 황사영의 시신과 묘가 발굴이 되어 최근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의금부창고속에서 보관되고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을 맞아 천주교 뮈텔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은 1925년 황사영백서를 교황 비오11세에게 봉정하여 현재 이탈리아 교황령 바티칸 박물관내 선교민속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고 하고요
그 이후에 제너럴 셔먼호사건, 오페르트 도굴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등 외세의 침임과 천주교박해가 계속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황사영은 종교적으로는 다른 판단을 받을수 있고 억울할수 있으나 아무리 봐도 반역자 역적칭호를 들을수밖에 없는 역사적평가를 받을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런 종교적자유와 개신교 기독교전도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가 되었는지요..
하지만 당연히 정치적인 탄압, 종교적인 탄압을 받은 사람임에는 확실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조선 천주교인들과 학자들 남인들이 처형당했는지를 생각하면 할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국에 대한 배신이 맞을까요 종교의 자유를 주창한 선지자같은 인물일까요
황사영이 처형당했을 무렵이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참 양쪽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인물이자 사건이 황사영이고 황사영백서사건인거 같습니다
국가가 중요한가 신앙이 중요한가?
막상 저보고 목숨을 걸고 너 종교 믿고 사형당할래? 아니면 배교선언 종교를 안믿는다하고 풀려날래?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할까요 심지어 황사영의 스승인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종은 처형당시 하늘을 보고 위로 칼을 받았다하니 죽음도 불사하는 그들의 믿음은 그 당시 어디서 왔을까요?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같은 집안이자 형제들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를 안믿는다하면서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냥 종교를 안믿는게 답이 아닐까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제가 무교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걸까요?
아무 생각없이 길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천주교성지이자 순례지래 하면서 가봤는데..
참 많은 생각과 갈등을 하게 되는 장소였던 황사영의 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방문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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