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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탕평론의 시작과 전개, 영조대 정국변화에 대한 연구

Gloomy@ 2023. 1.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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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출처 나무위키

탕평론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

1. 탕평의 전개

 영조 시대에는 붕당간 경쟁의 심화가 국가 존망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 초반기에도 환국은 여전히 반복되어, 각기 노론과 소론 정권이 한 차례씩 번갈아 성립했다. 환국은 아직 청산되지 못한 선왕대의 정치유산이었다.

 이 시기 붕당정치에 대한 대안으로 탕평(蕩平)이 새롭게 주창되었다. 그러나 당론(黨論)을 금지하고 탕평으로 귀일(歸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영조 중반대가 되면 이제 공식적으로는 당론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탕평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하(), (), () 삼대의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체적인 모범으로 했다.

 탕평의 근거가 되는 홍범구주에는 은주 교체기에 은 왕실의 현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한 통치 전범이었다. 주나라에서는 비록 기자가 고조선으로 달아나서 실패했지만, 도통을 전해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영유한 혁명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탕평(蕩平)이란 왕도탕탕(王道蕩蕩)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따온 합성어로서 임금의 지켜야 할 법도요 정치의 기본 준칙이었다. 즉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무사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감싸서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서 물리쳐서도 안 되니 그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것이다.

 

정치의 바탕은 임금이 도()와 의()를 솔선 수범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이어야 하며, 그 왕도정치의 요체는 무편무당(毋偏毋黨) 무당무편(毋黨毋偏)’에 있으니 그렇게 되면 탕탕평평(蕩蕩平平)해진다는 것이다.

 

 탕평정치는 군주의 정치 명분인 황극(皇極)을 척도로 하는 새로운 정치 운영 체계의 등장을 의미했다. 이는 군주가 황극을 바로 세우면 사방팔방의 신민이 모두 그 표준을 받아들여서 화평한 세계로 이를 수 있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군주는 황극을 바로 세우고 신료들을 조율하여 화합시켜 나가는 정국 운영의 주체로서 규정되었다.

이것이 정치 부문에서는 환국(換局)으로 충역이 엇갈린 서로 다른 붕당의 당인(黨人), 모두 군주의 의리(명분)에 새로이 귀일시켜 충성스러운 관료군으로 재편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서 각 붕당을 균등하게 등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라는 인사 정책이 제시되었다. 17세기까지 탕평이나 황극은 위정자들이 사용하던 경서(經書)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용어에 일정한 정치적 개념을 부여한사람은 이이(李珥)였다. 이후 박세채가 조정하여 화합함(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위주로 하는 황극탕평론으로 이론화했다. 여기에는 숙종대 서인이 남인과의 정치 투쟁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것을 막고,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신료들의 내적인 필요성도 크게 작용했다. 환국이 거듭될수록 소모되는 쪽은 결국 신료들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침 국왕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정책화되었다.

 

2. 경종·영종대의 정국변동과 탕평의 진행

 18세기 탕평을 표방한다고 해서 곧바로 붕당 시대의 의식구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깊숙이 당습에 젖어 있던 신료들은 전통적인 붕당의 의리를 매개로 하는 정견을 일관되게 표방해 나갔다. 이를 조선국왕 영조는 어떻게든 군주 주도의 정국으로 바꾸고자 고심했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논점은 영조의 탕평이 약 30여년 이상 추진된 이후에야 비로소 한 곳으로 완전히 귀착될 수 있었다.

영조 연간 탕평의 전면적인 실시에는 즉위 과정에서 비롯된 정국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 대신들은 노골적으로 경종을 핍박한 정황들이 다수 확인된다. 젊은 군왕이 즉위한지 불과 몇 달되지 않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아우인 연잉군(영조)을 다음 보위를 계승할 세제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관철시켰다.

 아무리 병약한 임금이라고 할지라도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취한 이러한 행동들은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노론 대신들은 이어 몇 달 후에는 대리청정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늦은 밤 시간을 통한 기습적인 주청이었으며, 비정상적인 무리한 정치적결단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마저도 경종이 가납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는 사실이다. 경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지만 숙종 후반부터 오랫동안 대리청정으로 국사를 돌보아온 인물이다. 그런 왕에게 이러한 노론의 행동은 만행에 가까웠으며 사실상 반역으로 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제로 책봉된 연잉군은 수차례에 걸쳐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집권 노론들이 국왕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경종과 정치적사투를 벌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종은 언제든지 연잉군을 수괴로 죽일수 있었지만 정적으로 여겨지는 연잉군을 끝까지 변호하면서 지켜주었다.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연잉군을 제거하면 종사의 위태로움을 걱정한 경종이 사적감정보다는 대계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건저대리建儲代理)

 

 노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은 경종이 정유년(1717)에 대리를 한 고사를 들어 대리청정을 요구했고 경종은 병을 이유로 승낙했지만 소론 유봉휘, 이광좌, 조태억, 조태구, 최석항 등 소론 5대신은 즉각 반발했다. 경종은 이에 따라 노론의 죄악상이 공개되자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여 환국을 주도하고 신임옥사(辛丑獄事)를 일으켜 노론을 대거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그 가운데 목호룡의 고변(삼수역안)과 김일경의 상소로 노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리청정의 비망기(備忘記)는 환수되고 노론 4대신이 역모로 처단되어 사사됨으로써 신축 임인년 옥사는 마무리되었다. 이는 향후 노론과 소론이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승기를 잡게 되자 경종의 치세는 확립되는 듯이 보였고, 무기력하게만 보이던 병약한 군주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반면 두 왕자의 왕위계승 과정에서 붕당의 입지는 부침을 반복해야 했다. 각 붕당에서는 국왕만이 항상 승리자로 표현되었을뿐, 당인들은 자당의 의리가 불분명해지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 건저대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상황에서 신임옥사에서 노론4대신이 모두 죽음에 내몰리고 이를 주도한 소론5대신은 노론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붕당 상호간에 신축 임인년의 논의를 주도했던 주요대신들에 대한 신원과 처벌 여부를 놓고 영조 치세 약 50년동안 쟁투를 벌이게 된다. 경종이 즉위했을 때 집권당이 달랐듯이, 영조가 즉위할 때에도 당론으로 자신을 반대한 소론 정권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인수가 가능했던 주요인은 경종과 그의 충신이었던 이광좌 덕분이었다. 이광좌는 소론 강경파를 이끄는 준론(峻論)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즉위 과정 전반을 세심하게 돌보았으며, 아울러 경종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국장을 마치면서 본격적인 노론의 탄핵으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그동안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영조의 신임의 두터웠다. 사실상 노론정권으로 환국할 수 있도록 도운 이는 역설적이게도 소론 이광좌였다. 이는 영조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며, 영조 원년(1725) 정월부터 시작된 노론계 인사 기용은 3월을 정점으로 노론4대신의 관작이 회복되면서 환국이 종결되었다.

 

 이광좌는 경종이 연잉군을 보필하도록 세제우빈객(世弟右賓客)에 봉해진 신하였다. 이광좌는 준론으로서 자당의 의리를 명백하고 준열히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장이었으나, 경종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는 당시 임인년의 역옥을 주도한 소론 급진파와는 구분되는 점이다. 급진파들은 명분보다는 노론 제거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강경파들은 당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더라도 도리와 명분에 어긋난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것이 소론에서 급진파와 강경파가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론 강경파를 이끌었던 이광좌가 경종의 명으로 끝까지 영조를 보필하게 된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경종이 제수한 세제의 속료(屬僚)들은 후일 영조의 탕평을 이끄는 탕평파가 되었으며, 대부분이 소론 온건파(緩少)신료들이었다. 이들에게 세제의 왕위계승을 돕는 것은 곧 경종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되었고, 이것이 노론의 지지를 받은 군주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난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영조는 즉위 초에 경종의 신임을 받던 소론 강경파(峻少)와 온건파(緩少)들의 도움을 받아 집권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노론과 소론간 첨예한 대립 중에도 영조의 즉위를 도왔던 소론 이광좌, 조태억 등이 임인옥사의 주역이던 급소(急少)의 핵심인물인 김일경을 단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신축임인년 옥사문제 중 한 축이 되는 임인년 문제를 소론 내부의 힘으로 무옥(誣獄)으로 처단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 주었다. 영조의 즉위를 도운 소론 준론과 완론은 자신들과 급소(急少)들을 분리시켜 국왕의 의리(義理)에 귀의하는 소론이 다수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로써 소론 내부의 힘으로 반왕 세력이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신축임인년 노론과 소론의 항쟁 과정에서 소론의 당론이 무너지면서 노론의 집요한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론들이 대거 실각하였다.

 

 을사환국이 단행되면서 노론 4대신이 신원되었고 노론국왕에 노론정권까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노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기에 택군(擇君)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노론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론 산림 민진원과 정호 등은 수개월에 걸친 정청을 하며 소론의 토벌을 주청했다. 노론계의 소론 토벌 주장은 백관의 정청이라는 집단 행동으로까지 나타나서 영조 즉위년(1724) 12월부터 영조원년(1725) 7월까지 장장 8개월에 걸쳐 수차례 이루어졌다. 노론계는 경종 연간 신임옥사로 제거된 노론의 신원과 당시 집권당인 소론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영조는 이에 명백히 반대했다. 이러한 일종의 시위는 영조3(1727) 노론계 인사 100여 명에 대한 파면 조치를 단행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영조의 거부의사가 최종 타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국이 되자 영조는 양 세력에 대한 활용가치를 새삼 자각했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탕평을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영조는 불과 3년만에 두 차례나 환국을 단행해 보았고, 어느 한 분당의 논리만을 충으로 정립할 때의 폐해도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래서 이른바 영조 5(1729) 단행된 기유처분(己酉處分)을 통해서 노론소론의 병용을 주장하게 되었다. 영조는 각 붕당의 강경파인 준론들을 배제하면서 온건파인 완론들을 포섭하여 새로운 정국을 준비했다.

무신란 이후 소론 내 청류로 불리던 이들이 탕평파가 되어서 노론과 소론 양당의 의리를 조율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이른바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박문수, 정석삼 등으로서 영조의 동궁 시절 속료들이었다. 결국 소론계에서 영조의 즉위를 도왔던 이광좌를 필두로 하는 준론이나 무신란 이후 정국을 수습한 탕평파인 완론계는 실상 모두 세제 시절 영조와 인연이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이제 즉위한 신왕을 돕는 길이 선왕(경종)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방편으로 이해했으며, 소론 준론과 완론에게 두 왕에 대한 충성에는 전혀 모순이 없었다. 이런 그들이 전국적인 반란에 해당하는 무신란까지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영조의 신임을 더욱 두터워질 수 밖에 없었다.

 

 탕평파들은 이른바 반역반충(半逆半忠)이라는 중도적 평가를 통해서 소론과 노론에게 중재를 시도해 보았다. 신축년 노론의 대리청정 주창은 영조에게는 충이 되나 임인년의 사건은 역이므로 연루자들을 나누어서 평가하고자 했다. 그래서 노론 4대신 중 자손들이 임인옥에 관여되었던 이들은 신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에 이건명과 조태채복권이 이루어졌으나, 김창집과 이이명은 옥안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소론 내에서도 이미 즉위 초부터 소론 급진과 김일경 세력의 처벌이 조기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국왕이 어느 한 붕당을 절대선으로 보지 않았으며, 각 붕당마다 충신과 역신이 모두 있다는 양시양비(兩是兩非)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당론을 고집하던 노론과 소론은 모두 납득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탕평파들은 명분을 어지럽히는 존재로만 받아들여졌다. 결국 불구대천의 원수를 동료로 받아들여 탕평의 공효가 나타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정국을 주도했던 소론 5대신들에 대한 처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영조 전반기에 탕평에 적극 가담한 이들이 주로 소론계 탕평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당에 불리한 논의에 노론이 계속 잠자코 잇지는 않았다. 탕평파들이 노론과 소론을 함께 기용하기 위해서 제창한 쌍거호대로 노론 세력이 조정에 점차 늘어나자 다시금 신임의리(辛壬義理)에 대한 논란이 재발되었다. 신임의리는 경종원년~2(1721~1722)에 해당하는 신축년과 임인년에 있었던 대규모 옥사에 대한 입장을 의미한다. 이때 노론정권에서 소론정권으로의 환국이 추진되었으며, 노론 세력은 대규모의 옥사로 숙청을 당했다. 영조 역시 임인년 옥사와 관련된 자신의 이름을 옥안에서 지우고 싶어 했다. 영조16(1740) 경신처분을 계기로 국왕의 의리를 초월적으로 보는 각 당의 인사들이 국왕의 신원을 제의하면서 영조17(1741) 소론, 남인계의 힘으로 연잉군의 이름이 든 옥안이 불태워지게 된다. 이로써 신축년의 대리청정 주장은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임인년의 옥사는 무옥이었다고 천명한 대훈(大訓)이 반포되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의리가 국왕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래도 노론들의 불만은 여전하였으며, 소론은 더 이상 신임옥사를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되어 사실상 정치 명분이 소멸되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이광좌마저 돌연사하여 소론은 정통적인 당론을 주창할 수 있는 마지막 강경 인사가 사라져버렸다.

 

 이제 노론과 소론의 당론 격돌은 현재형에서 과거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피화자(被禍者)들이 거의 죽거나 연로하여, 화해하기에 용이한 분위기가 도래했다. 이후 탕평에 가속도가 붙은 이유도 세대 교체의 힘이 컸다. 국왕은 대훈의 반포로 소론과 남인의 손을 빌어 자신의 역모 혐의를 담은 옥안을 폐기하였고, 스스로의 정당성 획득에 성공했다. 특히, 이 시기 탕평정치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알려진 청요직 낭관의 자대제(自代制)가 폐지되었다. 이때 이조 전랑 및 삼사의 당하관이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하던 제도를 폐지했다. 붕당의 세력을 부양하는 지지 기반이 제도적으로 붕괴되었다. 마치 무신란 이후 기유처분으로 쌍거호대가 시행된 데 필적할 만한 대대적인 탕평정책이었다.

 

 또한 이 시기 지역 사회에서 각 붕당을 떠받치던 서원에 대한 철폐도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도 영조가 이미 행한 정책이었다. 아울러 왕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감흥을 서술하는 각종 어제서(御製書)들을 적극적으로 편찬하여 국정 운영의 기본 입장 등을 명백히 하고자했다. 영조 17(1741)의 대훈 역시 어제에 속했으며, 영조 22(1746)에 편찬된 자성편(自省編)은 국왕의 자부심이었다. 영조는 삼대(三代) 이래로 치통(治統)과 도통(道統)을 겸비한 군사(君師)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유가에서는 삼대 이상사회에서는 성인이 제왕이 되었으므로 태평성대를 누렸으며, 춘추시대에 이르러 도통과 치통이 분리되어 공자와 같은 성인이 천하를 통치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뜻에서 도통과 치통의 분리를 논했다. 군주이자 스승이란 뜻의 군사란 바로 수천 년간 분리된 도통과 치통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삼대의 탕평을 계승하는 군왕이자 삼대보다 앞서는 당우(唐虞)의 요순을 직접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했기에 가능한 논법이었다. 이제 정치 지형에서 논점은 붕당에서 벗어나 국왕의 새로운 정국운영으로 옳아오는 듯했다.

 

 신유년(1741) 대훈 반포로 국왕은 명분을 온전히 회복하고, 소론과 남인은 목숨과 출사를 보장받았으며, 노론들은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당론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노론의 출사 명분이 확보되고 소론의 거두인 이광좌가 죽자 노론계는 적극적으로 출사하게 되었다. 점차 탕평의 중심은 소론에서 노론으로 옮아갔다. 이후 탕평은 국왕의 중재로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영조는 이제 본인의 신원과 각 당의 대립문제에서 벗어나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이 시기에 경국대전을 손질한 속대전의 편찬, 균역법의 제정 등 국가의 대경장 사업에서 조현명, 홍계희, 박문수 등 탕평파 관료들의 눈부신 활약이 전개되었다. 점차 각 붕당의 당론은 잊혀진 듯했으며, 영조는 탕평에 참여하는 신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자신했다.

물론 기존 당론을 고수하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관계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다. 척신들이 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홍봉한과 화왕옹주의 양자인 정후겸,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정순왕후의 가문사람들로 정치세력이 노론을 견제하고자 척신으로 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영조는 당인들이 주장하는 자작의리(自作義理)를 파괴하고 국왕 자신이 제시한 의리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탕평을 표방하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붕당의 제거를 우선하는 완론 중심의 탕평을 실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탕평파를 구성하여, 이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점차 세력을 확대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건설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탕평파 대신들은 권력의 집중과 왕실 및 상호간의 연혼관계속에서 세칭 탕평당이라고 불리면서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지향형의 관료 내지 새로운 척족세력으로 등장하여 영조말년에는 척족정치로 이행됨을 막지 못하였다.

 

3. 마무리

 탕평론은 붕당정치이념이 무너진 후인 숙종대에 박세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당쟁의 폐단을 색목(色目)의 분립에 있다기보다는 세가대족(世家大族)의 사적 이익추구와 은원관계에 있다고 파악하고 당으로 군자(君子), 소인(小人)을 가려쓰지 않는 조제보합의 탕평을 주장하였다.

영조가 1당 중심의 정치형태인 환국을 배제하고 탕평을 표방하자, 정국은 이를 긍정하는 완론과, 의리·시비를 앞세우는 준론이 대립되었다. 이 중에서 완론에 의해서 영조대 탕평론이 선도되었다. 대표적 이론가는 소론완론의 조문명으로서, 그는 박세채의 이념을 이어 받아서 붕당을 타파할 것을 가장 중요한 정치이념으로 내세웠고, 주자의 군자당·소인당 이념을 부정하고 조제보합으로 탕평을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조현명도 당론을 자작의리라 하였으나, 사대부 뿐 아니라 세가의 보합도 강조하였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고 조제보합을 우선한 언론이 평온하고 원만한 인물들을 중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산림을 포함한 언론이 준엄한 인물을 당인으로 보았고 당론으로 내세워진 것은 무엇이든지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 현상으로 귀결되는 자작의리라 하여 배척하였다. 또 군은(君恩)을 내세우고 각 당에서 군자를 가려쓴다는 왕의 인재등용의 권한을 강조하여, 결국 의리는 강력한 왕권에 귀일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송시열로 표상된 노론의 정치이념인 중화 문화의 존중과 이적 국가의 배척 등 노론정치의 대한 비판도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요직 혁파, 균역법 실시 등을 통하여 사대부인재들의 조화·결속보다는 완론탕평파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이들을 이전의 교목세가(喬木世家)와 대치시켰다.

노론완론은 역적을 죽이고 임금의 누명을 깨끗이 함을 핵심 목표로 내세웠고, 옳게 그림과 충신과 역적을 가려 군자당=노론임을 밝힌 이후에야 당이 필요없는 경지인 탕평이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영조의 조제보합의 탕평을 부정하였다. 또한 탕평이 표방된 정국에는 스스로 관직 진출의 길을 끊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하였다. 유척기 같은 경우는 의리를 분명히 하고 시비를 바르게 할 것에 보다 투철하여 당론보다 탕평의 해악이 더욱 크다고 보았다.

또한 권귀·외척의 사적 이익추구를 극력 배척하였으므로 영조 말년의 노론 척신당이 형성되면서 사도세자 문제가 이에 휘말리게 되자 이종성 가은 준소(峻少) 인물들과 합심함으로써 반탕평론의 입장을 떠나고 있었다. 이들의 청의(淸議), 명절(名節)을 존중하고 권귀외척의 전권에 대항하는 노론청류 세력은 후일 준론탕평이 실시된 정조대의 집권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소론준론에서도 처음에는 의리를 분명히 하고 시비를 정할 것을 먼저 내세운 입장이었으나, 무신란을 계기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정계에 남은 이종성 등은 탕평의 폭을 넓혀서 준론들을 조제해야 한다는 준론탕평을 주장하였고,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세가대족 중심의 인재등용에서 벗어나서 양역(良役서원(書院)의 폐단 제거 같은 백성의 일에 진력할 수 있는 준론의 인재를 등용하는 실사구시의 탕평을 해야 화합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영조때 남인청류의 지도자 오광운은 군부(君父)를 믿는 것은 하늘의 이치인 때문이다라고 하여 절대적 신뢰를 강조하였고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고 각 당의 군자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한다는 영조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궁중세력과 연결되는 권귀·환관·외척들과의 연결배제를 가장 중요한 의리로 내세워 조제보합을 표방한 완론탕평을 비판하고, 의리, 청의, 명절을 강조하는 준론탕평을 주장하였다. 그는 붕당의 가장 큰 폐해를 학문실력이 아닌 혈통을 존중함으로써 세도화된 교목세가에 있다고 보아서, 영조의 완론탕평이 외척정치로 이행할 위험성을 우려하였다.

체제공은 오광운의 정치이념을 이어받은 남인청류의 지도자로서 외척을 중심한 궁중세력과의 연결 배제 및 권력남용자의 견제를 내세워 준론탕평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탕평의 성과는 일반 백성의 이해에까지 확산되어야 한다고 하고, 공론을 회복하여 붕당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또 백성의 일에 진력할 것을 강조하여 준소의 실사구시 탕평의 맥도 잇고 있었다. 노론의 신임의리는 일단 긍정하였으나 이에 연결되는 의리로서 사도세자의 누명을 씻어야 한다는 임오의리(壬午義理)를 내세웠는데 이는 정조의 인정을 받았다. 이로써 노론세력을 견제하는 남인청류의 기반을 확보하여 보다 넓은 남인층의 정계참여를 유도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기존 영조의 탕평과는 큰 차이를 나타나게 된다.

 

 

@참고문헌

 

김백철, 영조 민국을 꿈꾼 탕평군주, 태학사, 2011.

김성윤, 조선후기 탕평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휴머니스트, 2010.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0.

이태진,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태학사, 2003.

(참고는 안했지만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후속작으로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상,하권이 나왔다고 하네요 저자는 이태진, 김백철, 출판사 태학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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