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알아보기 기초공부와 연구
목 차
1. 시작
2. 삼국사기 연구
1) 삼국사기편찬
2) 삼국사기의 성격
3) 삼국사기에 대한 고찰
3. 삼국유사 연구
1)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비교
2) 삼국유사 편찬
① 일연의 생애와 사상
② 편찬의 배경과 의미
3) 삼국유사의 역사서로서의 위상
4) 삼국유사의 의의
4. 마무리
1. 시작
『삼국사기』란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한 역사서이다.
『삼국유사』란 1281년 무렵에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역사서로서 고조선 이래 고려까지 현존해 내려오는 역사서는 많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대사연구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고, 삼국사기가 본사로 평가받고 있다면 삼국유사는 야사라고 평가받고 있는 편이라 볼 수 있겠다.
대저 역사란 유물과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제일 근간이 되는 자료는 기록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기록면에서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의 하나이자 그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는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이고 삼국유사는 일연이 혼란한 시대에 귀감을 삼고자 쓴 역사서인데 평가는 다분하다.
삼국사기가 신라위주의 서술, 사대주의적,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발해, 삼한 동예, 옥저 등의 역사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반면에 삼국유사는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 향가수록, 불교문화, 효선편 등으로 인한 민중생활기록으로 더 가치있는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두 권의 역사서 모두,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기대지 않으면 안 될 자료들임은 분명하다.
간략하게나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조금이라도 다가가 공부해보고자 한다.
2. 삼국사기 연구
1) 삼국사기편찬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문헌이며, 고려 인종의 왕명에 따라 인종23년(1145)년에 편찬되었다.
저자는 김부식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10명의 보좌관의 도움으로 이룩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11명이 편사관이 왕명에 의해서 편술한 것이며 그 책임자가 김부식이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라고 명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썼을 때는 김부식의 나이가 71세의 고령이라 저술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할 때 10명의 편사관의 입장도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먼저 김부식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종29년(1075)년에 태어나 문종 등 일곱 왕을 거쳐 벼슬하였다. 그가 생존하던 전반기는 거란의 위협이 제거되면서 사회가 안정되어 귀족사회의 절정기였으나 후반기는 여진의 압력과 정치적 반대세력에 의해 갈등이 격화되던 때였다. 김부식은 이러한 사회, 혼란 속에 분열과 갈등은 국가의 우환이라 절규하였고 비리와 비례를 극도로 질시하였으며 외세에 저항하고 외적을 물리친 김유신, 을지문덕 등을 영웅으로 기술한 것이다. 또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을 겪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이것을 국민적 통일의 승리라 생각했고, 이런 분열에 대한 응징의 표시로서, 삼국사기를 저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백제와 고구려의 내분을 그 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강조하였으며, 갈등과 분열에 허덕이는 당시의 사회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인종의 자기반성과 김부식의 역사저술의욕이 겹쳐져 삼국사기가 완성되었다
2) 삼국사기의 성격
삼국사기는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와 본기(28권), 표(3권), 잡지(9권), 그리고 열전(10권)으로 되어 있다.
진삼국사표는 찬술(撰述)의 동기와 목적 및 그 성격의 방향을 제시한 서론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중국에는 각 시대마다 사관이 있어 역사의 기록이 있으니만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도 마땅히 그것이 있어야 할 것임을 말한 후에 만세에 남겨 두는 교훈을 남기고자 하는 편찬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목표들은 삼국사기 전체를 흐르는 기본정신이며, 특히 왕의 치적, 신하의 충성, 백성의 도리가 역사서술의 내용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3자간의 책무를 통해 국가의 안위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삼국사기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본기, 지, 열전 등의 내용에서 중국문헌의 전재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그대로 옮긴 부분이 많았고, 또한 각 항목에 기술자세가 동일한 원칙하에서 씌어진 것이 아님이 드러났으며, 본기와 지에서의 서술상의 차이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사대주의적이라는 점, 농민 및 피지배층에 대한 서술이 없다는 점, 불교 및 전통사상을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비판이 있다.
또한 기타 여러한 비판들이 김부식 한 사람에게 쏟아졌는데 , 이 것은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던 12세기의 시대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유교주의적이었던 김부식이 혁거세, 내물왕 등 중국에서 비난받는 내용을 옹호함으로써 전통을 외면한 사대주의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보면 편찬목적이 안으로는 사회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밖으로는 투철한 국가의식을 강조하려는데 두었던 것이다. 또한 진삼국사표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역사를 재인식시키고 역사사실의 기록에서 후세의 경계를 찾으려 한 점, 무엇보다도 사대적인 시대환경이나 당시의 유교적의식 속에서도 자아발견을 위한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저술방법 및 내용에서 중국문헌을 답습했다고해서, 그 속에 표현된 잠재적 의미까지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그 유교중심적인 사회배경속에서도 자기발전과 현실비판의 자세를 견지하고, 역사를 국가의 구성요소인 왕, 신하, 백성간의 상호작용으로 풀이하면서 위민정치의 실현에 의한 이상국가실현의 수단으로 봄으로써, 역사가 국민교화의 방편으로서 현실비판의 도구인 동시에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김부식은 통일과 분열이라는 사회현상을 역사의 상궤로 파악한 후, 모든 사회현상 내부 자체에서 역사발전의 인자를 찾으려는 역사의 발전론을 제시하였다.
3) 삼국사기에 대한 고찰
삼국사기의 역사 편찬이 문벌귀족사회로 접어들면서 유교문화 속에서 불교와 풍수사상을 융합, 정리함으로써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시대가 배경이 되므로 삼국사기를 사대적인 사서로서 부정적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김부식을 비롯한 편찬자들은 정치적모순과 사회적인 비리를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현실비판의 자세를 갖고 있었을 것이며 그런 점에 사서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사기는 중국문헌과 달리 본기에 큰 비중을 두어, 전통적인 기전체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본기의 내용에 있어서도 정치, 천재지변, 외교, 전쟁의 4항목으로 구성되어 , 전시대를 통해 일정한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지(志)는 국가대체의 기록으로 그 책의 특징을 나타내어 주는데 삼국사기는 지리지(地理志)를 크게 우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강렬한 국가의식의 표현임과 동시에 전국민을 하나의 권리와 의무 속에 묶어 국민의 행위규범을 규정한 것임을 보여준다.
열전(列傳)은 69명의 위인전으로써, 정치·군사적 업적을 중심으로 한 국가관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를 유교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로 보기보다는 동양의 전통사학이 갖고 있는 술이부작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정부주도하의 관찬이라는 역사편찬의 모델을 정착시킨, 한국의 전통사학을 크게 발전시켜 여러 사서의 편찬에 기여하게 된 점 등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삼국사기가 부전된다면 그 당시의 사회상과 우리나라의 고대역사상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단서도 붙게 되겠다.
3. 삼국유사 연구
1)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비교
일연이 1280년경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김부식이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내용, 이를테면 불교적사실을 주종으로 하고 고조선에서 발원하는 삼국 이전의 역사와 이설을 부가해서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유교사관에 입각한 기전체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불교사관에 의한 편년체 야사인 점에서 고대사를 기록한 사서로 쌍벽을 이루면서도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립적인 관계이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의해 공자가 일찍이 주창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고수한 데 반해 삼국유사는 불교적 초월주의 내지는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세속계와 신성계가 접합한 사건을 중시했다. 그리고 불교적인 신비체험담의 고형(古形)이나 원형으로서의 토착적이고 무문화적(巫文化的)인 신이담(神異譚)의 가치를 인정하여 기이편(奇異篇)에 집대성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의 내용과 체재 및 문헌적 성격을 역사서, 불교사서 내지 불교문화사서, 설화집, 민족지로 규정하고 연구하거나, 향가나 이두 연구의 자료집으로 활용하기도 하였지만, 고대사회의 역사, 종교, 문학, 예술, 풍속, 언어 등과 같은 다기다양한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는 다층성 내지 복합성이 중시되었다.
2) 삼국유사 편찬
1) 일연의 생애와 사상
일연이 생존했던 13세기는 대내외적인 격동기였다. 무신정변이 일어나 최충헌이 집권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대외적으로는 여진·거란·몽골의 침입에 의해서 국가가 피폐해졌다. 그리하여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통일적인 저항의식과 민족적 자주의식이 고양되었다.
12세기 후반의 불교계는 무신란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즉 기존의 문벌체계와 결탁된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의 운동이 전개되어 신앙결사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지방사회의 지식인이나 향리, 나아가 서민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신앙결사 운동은 지눌과 요세가 조직한 천태종 계통의 백련사가 중심이 되었다.
최씨집권 하에서도 불교계의 개편은 이러한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에서는 일연의 가지산문을 핵심적인 교단으로 지원했지만, 일연의 가지산문은 불교계의 타락과 사회의 여러 모순을 직접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일연의 가지산문의 등장 과정이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지산문은 원 지배 하의 고려 사회의 모순이나 불교의 타락상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기능을 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신정변이후 등장한 신앙결사의 운동도 계승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은 당시의 국가적상황이나 그러한 국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가지산문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연은 또한 선과 교에 모두 능통하였는데 화엄사상을 매우 중시했다. 삼국유사에서도 화엄사상에 대한 입장이 반영되었다. 이외에도 관음신앙도 강조하였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와 민족을 보고서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정통성과 주체성을 찾도록 했으며, 민중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실천신앙으로서 정토신앙을 강조했다.
2) 편찬의 배경과 의미
삼국유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편찬의도가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을 때, 자주적 민족사관과 불교홍통 사상이 드러나 있다.
또 단군신화에서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나란히 한 점으로 민족자긍심을 표출하였고, 기휘자를 기피하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견결한 신앙심도 고취시키려 했음도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불교를 외래종교라기보다는 민족종교적 성격이 짙음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사대∙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민족주체성을 견지하려는 정신으로 이것만이 당시의 혼란한 민심을 돌이키어 자긍심을 가진 국민정신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던 듯하다.
일연은 1219년 구족계를 받은 후 1260년 대선사에 오르고, 1283년 국존에 책봉되었다. 대저 사회적 지위라는 것은 그 지위에 따른 의무감과 사명감이 따른다고 볼 때 이런 맥락에서 일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종교적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인 삼국유사의 편찬이었으며, 그 구체적 착안과 구상은 선종의 최고지도자인 대선사에 오르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권과는 별도로 왕력(王歷)·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의 편제를 살펴보면 인용한 서목은 한국서 102종, 중국서 33종, 일본서 1종, 도합 136종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운문사 주석 시절에 주된 작업이 이루어졌고, 인각사에서 최종적으로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겠다.
3) 삼국유사의 역사서로서의 위상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삼국시대를 서술한 사서로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삼국사기만큼 평가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고대사서로서 몇 가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민족 최초의 건국설화인 단군설화를 역사적 사실로서 사서에 최초로 수록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사서에서는 단군 국조설화의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의 내용에 동조하고 있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시대를 단군부터 시작하게 한 것이다. 때문에 삼국유사 이후의 한국상고사 서술은 외기(外紀)의 형식을 띄기는 하였지만, 단군조선부터 개시가 되어 4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민족사의 자주성을 갖게 하는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둘째로 한국상고사의 서술에 있어 최초로 체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서 최초로 상고사를 단군-기자-위만으로 파악한 것과, 체계화된 것은 아니지만 북부여, 동부여, 마한 이부, 72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진한, 변한 백제 등을 나열하여 상고시대의 역사를 적기하고 있다.
셋째로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를 보유(補遺)하였다는 것은 삼국유사에도 일정 부분 유교적 도덕사관 내지 합리주의가 수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사론이 그대로 수용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특히 전통적이면서 유교적이기도 한 효선편이 마지막 편에 넣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자학을 국시로 하였던 조선시대였지만, 삼국유사가 일반사서로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삼국유사의 의의
첫째로 일연은 선교겸수(禪敎兼修)를 하여, 가지산파에 속하면서도 선불교의 자기내화적 성격을 벗어나 화엄사상을 연구했고, 정토사상이나 밀교도 수용했다. 그리고 자기수양과 가지산문의 재건에 만족하지 않고, 타락한 불교와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지 못한 자기반성의 차원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민족적 자주정신과 불교에 의한 민중구원을 강조했다.
둘째로 삼국유사는 편제∙서∙발∙찬∙비문에 의하면 국난기를 맞이하여 민족주체성의 자각, 민중에 기반을 둔 불교홍포, 민족종교에 대한 인식의 확산, 경전보다는 구체적 신앙담을 통한 신앙심 고취 등에 주안점을 두고 편찬되었는데, 자료수집은 일연이 포산에 기거했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였지만, 주로 운문사 시절에 본격적인 작업을 하여 인각사에서 완성시킨 것 같다. 일연은 민중적 불교를 지향했고,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이 시대적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판단 아래 주체성을 띤 역사서와 대중성을 띤 불교홍통지로서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셋째로 삼국유사의 내용을 관류하는 신성성 혹은 신이성은 고유신앙과 밀교적인 표상틀 위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연의 민족사관에 기초한 것이다. 제의문화의 원류인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이 불교의 신이한 영험과 융합되었으니, 주술적인 내용의 기록들이 드러내는 언어표상은 언령성과 문화투영의 논리틀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가 국가를 중시하고 국왕을 높이기 위한 서술원리를 활용한 것은 당시의 현실과 관련된 것으로 민족국가의 자존과 왕실의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민족을 내우외환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했다. 아울러 하층민을 동정하고, 그들의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시각 및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설화들을 처리하고 집대성했다.
넷째로 삼국유사는 불교문화사서를 표방한다. 삼국유사가 다양한 분야 즉 사상과 문학, 예술, 건축, 정치, 가정, 사회윤리 등 다방면에 걸쳐서 광범위한 관심을 표명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불교의 전래와 전파, 사찰의 건립유래, 불교와 민간신앙과의 갈등과 화합, 정치와 불교와의 관계, 탑∙불상∙불교미술∙사원건축과 같은 불교의 유물∙유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일종의 불교문화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삼국유사는 향가와 고대설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리하여 역사적관점에서 고대사회의 민족학이나 민속학을 연구할 때 문헌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최상의 문헌이 된다.
4. 맺음말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 역사서가 그리 많지 않다.
역사는 유물과 사료로서 고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데 그 자료가 미비할 때에는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격화되가는 오늘날에서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료들을 연구하고 고증하여 정확한 역사판단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알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보물 제 723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국보 322호 1,2호로 지정된 삼국사기와 역시 200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에 국보 306호로 제정된 삼국유사는 지금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이자 최상의 사료로 평가받으며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상고사의 시대상황과 역사의식을 전해주고 있다. 여러 가지 비판도 받고 있으나, 이런 사료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가가는 것보다는 그 시대상황과 사료 자체에 대한 고증, 편찬의도와 문헌적 성격을 검토하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듯하다.
또한 고려대에 씌여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상을 잘 알 수 있는 반면 고려와 이어진 조선에서 고려에 대해 씌여진 사료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건 아쉬운 사실이다.
현대에 와서 국사를 비롯한 역사학이 선택과목으로 되는 이 상황에 또 그때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되며 그를 위해서 철저한 역사인식과 사료에 대한 폭넓은 인식의 필요성을 느꼈다.
* 참고문헌
김부식, 삼국사기, 우리고전 다시읽기, 신원문화사, 2007
박진태, 삼국유사의 종합적연구, 박이정, 2002.
신형식, 삼국사기 연구, 일조각, 1981
일연, 삼국유사,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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