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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사- 한반도 대한제국을 둘러싼 러일전쟁의 의미와 결과

Gloomy@ 2022. 10.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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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오늘은 20세기 전쟁사중에서 0차세계대전이라 불릴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특히 한반도와 조선 대한제국과 열강에 관한 시각에서 러일전쟁에 대한 개인적인 공부를 포스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에 대한 간략한 개관을 살펴보겠습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8일부터 1905년 9월5일까지 1년반정도 한반도주변,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만주와 해역에서 열린 전쟁으로 서양열강들은 가볍게 러시아가 대승할것으로 생각했으나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을사늑약을 맺게 되고 한일병합을 하게 되며 일본이 당당히 열강에 대열에 끼게 되는 결과를 불러온 전쟁입니다

청일전쟁을 승리한 일본은 점점 더 세력확장에 대한 욕심이 많아졌고 러시아와 계속 부딪히게 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으로 일본에게 요동을 반환시키고 한반도와 부동항을 중심으로 러일전쟁이 불가피해졌으나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도 그 무엇에서도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은 빠르게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조선과 한반도에 대한 입지를 확보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진행함으로써 승리하게 됩니다

뤼순전투와 봉천전투에서 어느정도 일본이 승리했으나 어떻게 보면 러시아와 일본의 피해규모는 비슷했던 상황에서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이 러일관계를 중재하면서 포츠머스조약으로 휴전협정, 종전협정이 열려 종전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전쟁배상금까지는 받지 못했으나 일본은 확고한 한반도영유와 남사할린과 동북권에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반면 러시아는 막대한 내외부의 피해를 입고 혁명을 겪으며 극심한 혼란상에 빠지게 됩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한 덕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러일전쟁은 위 그림과 같은 경로의 전쟁이 진행되었습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하게 된 일본은 제국열강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1. 러일전쟁 당시의 동북아정세와 군사적환경 

러일전쟁은 0차 세계대전이라 불릴만큼 세계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비록 러시아와 일본이 동북아의 국제질서를 장악하려는 주도권 쟁탈전쟁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과 미국간의 세계적 패권경쟁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후로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양세력을 대변하던 영국은 세계 각지에 수많은 식민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와 극동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벌이던 식민지 쟁탈 경쟁중에서 러일전쟁은 20세기 벽두에 동아시아의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대리해서 벌인 전쟁입니다

 러일전쟁은 육상과 해상을 오가며 전투를 벌였으며 비행기가 없어 공중전선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2차원적 평면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은 현대전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일전쟁에서는 현대전의 양상인 기습전, 총력전, 참호전, 첩보전 등이 엿보이며 참호를 파고 낮은 포복으로 각개전투하는 교전이 이루어졌고 멀리서 산포나 야포를 쏘아 전선을 형성하며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무기발달로 기관총, 속사포가 처음 사용되었으며 작전술 및 부대지휘술 분야 등이 새롭게 개척되었으며, 해사 야간작전이 처음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사의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이 전쟁이 1904년 2월 한반도 서해 제물포 앞바다에서 시작되어 1905년 한반도 남해의 대한해협 동수로와 동해의 울릉도-독도 해상의 전투로 이어졌으며 그 목표는 한반도의 지배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러일양국은 한반도 북부의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접전을 벌였으며 압록강과 랴오허 사이에서 몇 차례에 걸친 대규모전투를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나라가 완패했다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1905년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한반도와 랴오뚱반도 그리고 사할린의 절반을 장악했지만 전쟁배상금을 받아내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육해상전투에서 패색이 짙었던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무렵 러시아는 완공된 시베리아 철도로 예비부대의 병참을 지원받아 일본에 반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연술을 폈습니다. 그리고 막후에서는 외교협상술을 발휘하여 패전으로 인해 초래할 자산과 영토 상실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전비가 바닥난 일본이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화를 서두르자 러시아는 항복문서 대신 강화조약문에 서명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종전무렵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과 내전이라는 극심한 사회변동과 외국군의 간섭으로 본토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었으며 동북아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내준 러시아는 40년간 대일종속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중국이었습니다. 이 두 국가는 개항기에 근대적 자주국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으로 국가 자위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전쟁에 즈음하여 국외중립으로 국가의 안위를 지키려던 대한제국 정부의 노력은 일본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점령해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무위로 끝났습니다. 결국 조선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중국 역시 만주의 군벌인 위안스카이가 2월4일 자국 부대에 대외중립을 지킬 것을 선언하고, 2500명의 병력을 진저우로 파견하여 국경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일본이 뤼순과 랴오허 강변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임에 따라 중국의 입장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이처럼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적 영토분할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전쟁의 주체는 러시아와 일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국영토가 아닌 제 3국영토에서 그 지역에 대한 영향력확대를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따라서 전장을 제공한 한반도와 만주는 철저히 유린당한채 전쟁의 객체로 전락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강압에 의해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따라 일본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였지만 그 피해를 감수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2. 러일전쟁시기 한번도 대한제국의 군사력과 러일 양국의 군비경쟁 

조선은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국가개혁의 일환으로 군제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청국과 일본으로부터 군사기술과 군사훈련술을 습득해 근대적 조선군으로 건설하고자 교련병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군대와의 급속한 단절로 인해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군개혁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후 조선의 군사개혁은 정치적변동에 영향을 받아 외국의 간섭수단으로 전락하는등 혼란을 겪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로 일본군제가 도입되고 갑신정변 이후 청국군제가 도입되면서 군대를 동원한 외국의 영향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청일전쟁 이후로 주둔한 일본군은 국가전체의 개혁을 지원한다는 핑계로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고종은 러시아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2개 연대규모의 군대를 양성하여 대한제국 선포의 물리적 토대로 삼았습니다. 조선의 국왕의 1년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신체적안위를 보장받기는 했으나 러시아라는 대륙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사, 재정적 이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차관지원을 실행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의 진의를 의심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종은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 열강과의 관계에서 살아남고자 1897년 8월 황제의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으로 개정하고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원수부를 설치하고, 중앙군으로서 황실호위를 전담한 시위대, 도성방위를 전담한 친위대, 지방 팔도를 방어하기 위한 진위대를 두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자주적인 군제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지만 중앙군과 지방군을 러시아식 군제로 개편하는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볼수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로 일제의 의해 군 구조가 축소되고 급기야 해산되고 마는 결과로 종결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20세기초 조선,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전무한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신식무기도 병사도, 그리고 그것을 동원할 재정, 돈도 없었습니다. 외국의 차관과 국가의 금광이나 철도건설권같은 담보로 인한 재정으로 국가의 이름이나마 유지하는 수준이었고 별다른 타격없이도 일본이 을사늑약, 정미7조약, 기유각서등에 이어 1910년 창덕궁 흥복헌에서 이완용과 고종의 형 흥친왕 이재면이 참여하여 일본공식명칭으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한국합방이 실시되었고 한국에서는 한일병합, 국권피탈, 경술국치등으로 표현합니다.. 

실질적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후 이미 조선 대한제국은 모든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는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산발적인 의병활동도 와해되거나 제압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청나라는 청일전쟁이후 몇년사이에 조공국이었던 조선을 하루아침에 일본에 내주게 되었고 35년간 한반도 조선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가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게 됩니다

참고문헌-

러일전쟁사, 로스뚜노프 외 전사연구소, 건국대학교출판부, 2004년.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연구, 심헌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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