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외교 대외관계에 대하여
1. 시작
2. 고려의 외교-대외관계
1) 고려 전기 대외관계
① 요나라(거란)과의 관계
② 송나라와의 관계
③ 금나라와의 관계
④ 일본과의 관계
2) 고려 중기의 대외관계
① 몽고의 침입과 대몽항쟁
② 몽고침입 이후의 관계와 고려조정의 대응
3) 고려 후기의 대외관계
① 원나라와의 관계
② 공민왕의 반원·친명정책
③ 홍건적과 왜구
3. 마무리
1. 시작
고려시대는 언뜻 보면 귀족사회와 불교,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등 화려하고 찬란한 시대인 듯 보이지만 실상 알고나면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시련기였다. 거란과 몽고의 침입, 홍건적과 왜구, 여진족에서 발전한 금나라까지.
중국이 통일되어 더욱 강력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시기였고, 중국이 잠잠할때면 왜구와 여진족이 극성이었다.
강감찬과 서희의 활약으로 요나라를 몰아냈으나 개경까지 점령당했을 정도로 피해가 심하였고, 몽고의 6차에 걸친 침입으로 수십에서 수백만의 백성이 보호받지 못한 채 참살당했고, 전국토가 유린당했다. 그렇게 원나라에 조공을 바쳐야했고, 심지어 결혼도감으로 고려처녀들을 공녀로 보냈으며, 응방을 설치해 해동청까지 잡아들였다. 공민왕때는 홍건적의 피해가 극심해 개경에서 피난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고, 동해의 해안지방은 왜구 때문에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전기서부터 고려후기까지 고려는 끊임없이 수성의 입장에 있었으며, 비록 엄청난 대륙의 힘에 굴복은 하였으나 그 천하의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에게 끝까지 끈질기게 민중들이 항쟁하였으며 조정이 환도한 후에도 삼별초가 끝까지 원나라에 대항하는 등 민족의 정기를 보여주었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 대제국을 건설했던 전성기의 원나라에게 한반도의 힘으로 6차에 걸친 침입을 막아내고 부마국 정도의 지위를 얻어낸 것만 해도 그 당시 고려의 대외정책과 민중들의 대외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또 살펴보면 고려는 상당한 실리위주의 균형있는 외교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통일되지 않았을 때, 요나라와 송나라사이의 균형외교, 금과 요나라와의 균형외교를 펼쳐 상당한 외교성과를 거두었으나 통일왕조가 들어선 원나라에게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국방력 및 국력이 상당히 피폐해졌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지속적인 침탈과 노략으로 국운이 기울어갔다. 그러나 조선조 중국에게 속국이 되다시피 펼친 외교정책에 반하면 고려의 자주성과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민중의 항쟁, 어려움 속에 나타난 명장들의 활약과 자주정책을 펼친 공민왕의 개혁 등 긍정적인 부분도 많았다.
이어질 본문에서는 대략 고려전기부터 고려후기까지 간략하게 대외관계를 간추려보고자 한다.
2. 이야기
1) 고려 전기 대외관계
① 요나라(거란)과의 관계
고려초기에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대와 교섭을 계속 하여 왔으며, 광종 때는 그것이 문물제도의 정비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은 송과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나 북방의 거란이 큰 세력을 형성함으로서 고려·송·요나라가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다투게 된다. 거란이 처음 고려에 교섭을 하여 온 것은 태조5년(922)때로 알려져 있는데 20년 뒤 태조 25년에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과 사신을 보내왔는데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데 크게 분노하고 있었던 태조는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매달아 굶어죽게 하는 강경조치를 취한다. 그리하야 훈요10조에서도 거란을 경계토록 훈계하고 정종때 광군 30만을 조직한 것도 그와 같은 정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요는 안정기로 접어든 성종때에 이르러 송을 견제하고 기반을 튼튼히 한 후 993년에 고려를 1차침입하게 된다.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자는 의견이 나온 걸 보아하면 고려는 요의 침입에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서희가 그 세치혀로 거란을 후퇴시키고 오히려 새땅인 강동6주를 편입하는데 성공하여 요나라와 고려 모두 실리를 취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고려가 계속 송과의 외교를 끊지 않자 2차침입을 결행하게 되며 개경까지 점령하나 물러나게 되고, 요충지인 강동6주의 반환을 고려가 받아들이지 않자 3차침입이 일어나게 된다. 요나라는 또 한번 개경까지 진격하다가 청야전술과 고려의 철저한 방비로 다시 한번 퇴각하고 그 도중에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참패를 당하여 유명한 귀주대첩이 생겨나게 되었다. 3차에 걸쳐 서로 피해를 입은 두 나라는 화약을 맺게 되고 고려는 결과적으로 요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게 되었다. 이렇게 전쟁상태의 대외관계가 지속되다 보니 문물의 교류면에서는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화약 후 사행무역과 함께 밀무역이 행하여졌으며 불교의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송나라와의 관계
후주 뒤에 세워진 송나라는 고려와 사대와 책봉의 형식을 취하면서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서로의 실리를 위한 균형실리외교가 이어졌다. 그러나 거란의 1차침입후 일시적으로 송과의 국교는 중단되었으며 그 후 송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인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두 나라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11세기 후반에 다시 친밀히 통교를 시작하였으나 금나라가 건국되면서 변모되어, 이러한 국제분쟁의 소요 속에서 자위책을 강구하여 휩쓸려들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통교는 점차 약화되어 가게 되었다.
고려·송 사이의 국교는 간헐적·단속적이었으나 우호적인 관계는 시종 유지되었으며, 문물으 교류 또한 왕성하였다. 고려의 대송교섭 목적 가운데 하나가 저들의 선진문물 수입에 있었으므로 고려는 목표를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③ 금나라와의 관계
처음 요와 대치하고 있던 금은 고려와의 대립을 적극 회피하려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예종12년에 서로 형제관계를 맺고 화친하자는 내용의 제의를 하여 왔다. 고려에서는 크게 분노하였으나 당시의 정세를 참작해 그 제청을 묵살하는 것으로 유보하여 두었다. 그러나 인종3년(1125) 요를 멸망시킨 금은 군신관계를 강요하였다.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자겸과 척준경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들어 금에 대한 사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함으로써 그대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양국간에는 별다른 충돌없이 원만한 관계가 성립되어 이후 줄곧 지속되게 된다.
④ 일본과의 관계
고려와 일본 사이에는 정상적인 국교가 열리지 않았다. 양국간의 접촉은 일본 변방민의 고려에의 내투나 상호간의 행해진 피로인 내지 표류민의 송환 그리고 진봉과 하사의 형식을 취한 물자의 교류 등에서 약간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교류가 이뤄지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은 적극적이었던 반명에 고려는 소극적·수동적이어서 양국간의 관계는 뚜렷한 한계성을 가지게 된다.
2) 고려 중기의 대외관계
① 몽고의 1차-6차침입
13세기 초엽에 이르러 몽고족이 세력을 형성하여 1206년 몽고가 건국되었으며 먼저 사하를 굴복시킨 뒤 금나라정벌로 이어져 그 과정에서 금의 패잔병이 고려로 진주해와 이를 함께 토벌하여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사신의 무례한 태도와 행동으로 고려는 몽고를 꺼리게 되나 몽고의 우세한 군사력을 염려하여 어느 정도 요구를 들어주면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225년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가 피살됨으로 국교가 단절되고 1231년 고려에 침입하게 된다. 박서가 지휘하던 귀주성에는 적의 공격에 잘 대응하여 끝내는 격퇴시키고 적의 장수조차 찬탄을 금치 못하였고, 이에 계속 몽고군은 계속 남하를 거듭해 개경에 이르러 당시 무인정권의 최우가 집권하고 있던 때였는데, 화의를 교섭하게 되어 몽고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대신에 몽고의 심한 내정간섭과 많은 공물의 부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차침입이후 가중되는 몽고에 압력에 대해 고려는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고려가 이를 강행한 데는 몽고의 관인들에 고려에서 취한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고려인의 반몽의식을 크게 자극한데에 요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공물의 요구가 과다하여 고려로서는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려의 강화천도와 일련의 조처는 몽고를 크게 자극하였고 몽고는 이에 2차침입을 개시하였다. 이에 고려는 경상도까지 침입을 받아 부인사에 소중히 간직하여 오던 초조대장경을 소실하는 등 피해를 입지만, 처인성에서 몽고의 원수인 살례탑이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패배를 거듭하여 서둘러 철수하게 된다. 이어 1233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세력을 안정화 시킨 몽고는 다시 보복적 공격으로 3차침입을 결행하게 되고 이 3차침입은 1235년부터 1239년까지 5년에 걸쳐 일어났다. 몽고는 교섭 없이 무조건 전국토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였고, 이에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경주의 황룡사 9층탑도 소실되었다. 고려는 군민이 합세하여 대항하였고, 부처님의 가호로 적군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 팔만대장경도 이때 만들어지게 되었다. 고려가 몽고에 사신을 파견하여 철군을 호소하자 몽고는 국왕의 친조를 내세우고 군대의 철수를 단행하게 되어 마무리 되었으나, 고려의 국왕이 몽고의 조정에 친히 입조해야 한다는 요구는 고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에 국왕의 친조가 이행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몽고의 4차침입이 있게 되었으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대한 노략을 자행하던 중 황제가 세상을 떠나 곧 철수하게 되어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아니하였다. 몽고는 또 국왕이 출륙하지 않았음을 원인으로 5차침입을 개시하였고 고려는 이에 피해가 누적되자 고종이 몽고의 사자를 접견하여 몽고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철수는 일시적인 조처였고 재차 무력으로 위협하여 국왕의 친조를 실현시키려는 속셈과 개경환도를 목적으로 6차침입이 시작되어 1254년부터 1259년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이때 기록에 “이 해에 몽고병에게 사로잡힌 남녀는 206,800명이며 살육된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저들이 지나간 주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병황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다” 라는 기록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유경·김준 등이 최의를 제거하여 4대 6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최씨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분위기가 전환되어 개경환도와 태자 입조를 받아들여 29년을 끌어온 무력충돌에 끝을 맺게 되었다.
② 몽고침입 이후의 관계와 고려조정의 대응
강화가 성립되자 원종이 친조를 실행하게 되고 두 왕실간의 유대관계는 긴밀해졌으나 고려에 대한 몽고의 영향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어 무신정권이 종말을 고하자 고려정권은 몽고에 대한 굴복의지를 내보였고 삼별초가 이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나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개경으로의 환도는 단행되었고, 이후부터 고려는 몽고의 내정간섭을 많이 받아 자주성의 위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3) 고려 후기의 대외관계
① 원나라와의 관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하였으나, 계속되는 간섭으로 인해 충렬왕부터 부마국이 된 이후 그의 전례를 따라 후대 왕들 역시 일가의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간섭은 더욱 심해진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동원되어 고려군 8천명 및 초공·수수 6700명 대소의 전함 900척이 동원되었으나 실패하여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다. 2차원정 때는 더욱 적극적인 동원지원으로 2차원정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또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였다. 그리하여 개경에 설치된 정동행성으로 고려의 내정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하게 됨으로써 내정간섭이 더욱 심하여졌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탐라총관부등의 설치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어 많은 공물로 고려사회 전반에 걸쳐 피폐함을 드러내었으며 고려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원의 정치적 압력으로 자주성이 더욱 위축되었고, 그에 편승한 부원세력의 책동에 고려는 표면적으로 친원정책을 드러내나 내면적으로는 저들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② 공민왕의 반원·친명정책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러 반란세력이 일어나자 원은 원군을 요청하고 고려는 거절할 수 없어 원군을 파견하였다. 이 기회를 통하여 원의 동요·쇠미상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천에 옮겨, 기철등의 부원배 제거와 정동행성이문소의 혁파, 원의 연호 정지, 문종 구제로의 관제 복구와 쌍성총관부를 회수하는 등 여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원은 크게 반발하여 위협을 가해와 고려는 이에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사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고난을 겪은 고려는 원의 무력함을 여실히 깨닫고 관계가 냉각되었다.
그 뒤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명을 건국하였다. 對元관계에서 서로의 후원을 필요로 한 명과 고려는 우호적인 바탕위에서 순조롭게 국교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고려의 사대외교에 우호적인 태도로 답한 명과의 관계는 명이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경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공민왕은 친명정책을 계속하였으나 시해되게 되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이인임을 명과 원에 두 다리를 걸치는 양단외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인임이 축출당하고 명이 철령이북을 요구하자 우왕과 최영은 대륙출병을 단행하게 되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와 뒤를 이은 조선은 친명정책을 기본적인 외교노선으로 삼아 관계의 개선에 노력하여 양국간의 국교는 그런 대로 이어져 갔다.
③ 홍건적과 왜구
단시일내 큰 세력으로 성장한 홍건적은 원군의 반격을 받고는 고려로 쫓겨 들어와 두 차례의 전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대비가 미흡하였던 고려는 첫 침입(1359)에 의주·정주·인주·철주 등이 함락당하고 서경까지 진출하였다. 고려는 대열을 정비하여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여 패퇴하는 적을 추격, 섬멸하였다. 이렇게 1차침입에서 참패를 당한 홍건적은 산발적으로 노략질로 이어가다 1361년 다시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2차침입을 감행하였다. 이에 개경까지 점령당한 고려는 공민왕이 안동으로까지 피난을 가게 되고 격노한 공민왕은 교서를 발하여 적의 격퇴를 명하였다. 이에 고려의 장군들이 모여 개경을 포위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이렇게 격퇴는 하였으나 북쪽지역과 개경까지 점령당한 만큼 그 피해와 영향이 지대하였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공민왕이 추진하여 오던 개혁정치도 크게 퇴색하게 되었고, 홍건적의 내침은 고려의 대내외 정세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사건의 하나였다.
이어 왜구가 약탈행위가 잦아지면서 공민왕 23년간의 재위기간에 115회나 침입하였다는 통계에 의해서도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왜구의 구략지역은 거의 전국에 걸치고 있으며 연해안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까지 횡행하여 개경까지 출몰해 계엄령이 내려지고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다음 우왕때는 한층 심하여져 재위 14년간에 378회나 왜구의 침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여져 온다. 왜구로 인해 천도론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왜구들은 주로 미곡을 약탈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많은 고려의 백성들까지 잡아가는데 만행을 보였다. 고려조정은 회유와 동시에 무력 토벌을 단행하는 강·온 양면책을 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최무선이 화포를 사용하여 크게 승리하고 황산에서 이성계가 또한 크게 승리하여 왜구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왜구는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다방면에 걸쳐 나쁜 영향을 미쳤으며, 이것이 결국 고려의 운명을 재촉하는 부분적 요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라 보여진다.
3. 마무리
앞서 본문에서 고려 전·중·후기의 대외관계를 살펴보았다. 거란과 여진, 몽고족에서부터 뒤를 이은 홍건적과 왜구, 명나라까지 고려는 시종일관 수성에 입장에서서 힘겹게 나라를 유지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원나라때에는 내정간섭 및 공물상납과 부마국등의 지위 격하로 자주성이 크게 훼손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이어 거란에게도 개경이 함락당하였고, 몽고족에게는 전국토가 유린당했으며 뒤에 홍건적에게까지 개경이 점령당하고 왜구마저 개경 주위에 출몰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어 고려가 국방에 있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려의 대외관계는 실리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이익을 얻기도 했으나 자주성을 인지하여 그 어느 나라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 잠시 굴복하기도 하였으나 계속 뒤를 이어 민중들의 항쟁과 삼별초항쟁, 몽고의 침입에 있어 크게 활약한 고려의 백성들의 대몽항쟁, 그 대제국 원나라에 있어 자주성을 되찾고자 노력한 공민왕의 개혁 등 어려운 대외관계 속에서도 고려는 꿋꿋하게 버티어 나가고 심지어 고려말기때는 실현되기 어려웠다고는 하나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까지 나서는 데에서는 고려의 자주성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나라와 대외관계를 수립함에 있어 외교는 복잡한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고려와 같이 중심축을 잡고 외교정책을 펴나갔기에, 서희와 같은 대담함과 최영과 같은 성실함과 우직함, 강감찬의 현명함,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한 민초들이 있었기에 고려가 그 강대국들이 횡행하는 시기에도 그리 강대하지 않은 국방력으로 지탱해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거듭된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었으며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하여 뒤에 조선조에게 차례를 넘기게 되었던 듯하다.
< 참고 문헌 >
강만길외, 한국사 5,6,7,8,9,10, 한길사, 1995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9
오영찬외, 눈으로 보는 한국역사, 중앙교육연구원, 1998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2007
< 참고 논문 >
이정신, 고려의 대외관계와 묘청의 난, 역사학역구회, 1996
이정신, 강동6주와 윤관의 9성을 통해 본 고려의 대외정책,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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