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가운데 의미있으면서도 재밌는 역사페이지중 하나에 청나라시대 태평천국운동이 들어갑니다.
태평천국운동은 청나라말기 1851년서부터 1864년까지 홍수전이 여호와 야훼 하나님의 두번째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적인 이념의 신정국가를 세우고자했으나 실패하게 된 중국에서의 일대사건입니다.
유교 불교 도교의 다신교적인 중국에서 개신교를 이용한 유일신사상을 도용하여 배상제회를 조직하고 개혁성을 가미한 민중운동으로 시작되어 한때 난징(남경)을 점령하여 국호를 지정하는등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봉건화되고 내분과 내부알력, 서구열강 외국국가들의 개입으로 홍수전은 자살하고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적성격과 종교적색채, 개혁적인 성향, 농민우대정책, 여성인권상향정책등으로 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청나라정규군 팔기군을 여러번 격파하며 성공하는듯했으나 이후 양무운동을 이끌기도 했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하며 상군으로 만든후 이홍장, 좌종당등의 활약으로 결과적으로 태평천국운동이 실패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10여년동안의 역사스토리가 어떻게 보면 비극적인 내전과 비참한 전쟁이기도 했지만 흥미로운 스토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죠
그 가운데 태평천국운동이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된 태평천국운동 지도부의 내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태평천국운동(배상제회)의 혼란기
태평천국운동의 내분-
1) 태평천국의 봉건화
태평천국이 남경(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난 다음 1856년까지 전기는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봉건적인 요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면서 더욱 봉건화 되어갔다.
그리하여 본래 형제자매로 호칭되던 민중이 이제는 홍수전 치하의 신민이 되었고 한때 함께 싸운 개국원훈들은 지위가 높고 낮은 귀족으로서 민중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홍수전은 자기가 거주하고 있던 양강총독의 관서를 불태우고 이곳에 천왕부를 1854년 2월에 지었는데 성 주위가 10여 리에 담의 높이가 수 장이나 되고 내외 이중으로 되어있으며 밖은 태양성, 안은 금룡성이라 하여 화려함이 극치에 다다랐다. 이해는 태평천국이 북벌서정의 문제로 어려운 처지였는데도 홍수전은 천경에서 큰 토목공사를 벌렸던 것이다.
봉건화의 극치는「십전대길시」를 1853년에 간행 반포하여 신비주의의 방법으로 홍수전 자신의 신성성을 증명하고,「건천경우금릉론」등을 반행하여 홍수전을 ‘진명천자’ 로 선전하여 그만이 만민의 주(主)라고 믿게 하고 지고무상의 권위를 옹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왕은 정사는 보살피려 하지 않았다. 동왕이 만나려고 해도 허락이 있어야 만났다.
천왕은 깊은 궁중안에 있으면서 조회도 나오지 않았고, 생활은 갈수록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축첩을 못하도록 규정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이미 영안에서 36명의 여인, 그리고 천경에서는 후비가 8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도상으로도 봉건적인 구관습을 따라 「태평체제」에서 신하들이 천왕의 장녀는 ‘천장금’, 차녀는 ‘천이금’ 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승상에서 군사의 아들은 모두 공자( 承공자, 師공자 등등), 딸은 모두 옥이라 부르게 하는 차등을 두었다.
천국의 관원은 모두 가마를 탔다. 그리고 가마를 메는 사람이 규정되어 천왕은 64명, 동왕은 40명, 양사마는 4명이었다. 동왕은 외출할 때마다 의장대가 거리를 꽉 메울 정도일 만큼 천 수백명이 호위하고 대소관원은 모두 피하여야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길옆에 무릎을 꿇어야 하였다.
2) 홍수전과 양수청의 대립 - 천경사변
천왕이라 칭한 홍수전아래 태평천국지도부에서는 주요 다섯 간부진이 있었는데 동왕 양수청과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가 있었다.
천왕 홍수전이 영안에서 양수청을 동왕에 봉한 것은 양수청이 홍수전으로부터 신임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평군 안에 있어서 양수청의 조직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천국에 있어서 홍수전은 최고 영수이고 동왕 양수청은 홍수전의 양제양신良弟良臣이었다.
홍수전과 양수청은 종교를 이용하여 그들의 정치 권위의 유대를 맺어 왔고 혁명의 도구로 삼았다. 따라서 홍수전은 상제가 인간 세계에 파견한 ‘태평진주太平眞主’이고 양수청은 상제의 대변인으로서 ‘천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주재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천왕은 그를 ‘제일 신임하고 한나라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겨’ 실질적인 권력은 양수청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경에 서울을 정한 다음에 천왕 홍수전은 유명무실한 원수가 되기 보다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하였다.
한편 양수청은 방대한 동왕부를 건립하고 천조의 모든 사무를 동왕부에서 처리한 다음에 천왕부에 보고하여 홍수전은 보고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어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동왕의 위세는 갈수록 커가고, 여기에 문인 묵객을 동원하여 금전기의 이후 천경에 서울을 정하기까지의 공을 동왕에게 돌렸다. 다른 왕들도 동왕에 대한 불만이 커갔다.
그런데 태평천국에서는 신하들이 홍수전을 천왕이라 칭하고 만세를 세 번 부르게 되었으며 세자 유주幼主에게도 만세라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천왕의 그 밖의 아들에게는 모두 천세라 불렀다. 한편 동왕 양수청에게는 구천세라 불렀다. 동왕에게는 이것이 불만스러웠다.
1856년 8월에 양수청은 천부天父가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고 천왕을 동왕부로 오게 하였다. 그리고 천부의 이름으로 천왕에게 ‘너와 동왕은 다 나의 아들인데 동왕이 이렇게 큰 공로가 있는데 어떻게 구천세라고 하느냐’라 하여 홍수전이 ‘마땅히 만세라고 하여야 한다’ 고 대답하였다. 이때 양수청이 ‘동왕의 세자는 천세에 머무느냐’고 하여 홍수전이 다시 물러나 ‘동왕이 만세이니 세자도 만세이며 또한 대대로 모두 만세다’ 라 하면서 양수청의 생일에 정식으로 봉전封典을 거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를 핍봉만세逼封萬歲라 한다.
양수청의 핍봉만세는 홍수전의 입장에서 그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때문에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천왕부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전선에 나가 있는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귀경하여 ‘근왕’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석달개는 무창에서 호임익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으며, 위창휘는 증국번과 작전하고 있었다.
위창휘도 역시 평소에 동왕 양수청에게 불만이 컸었는데 홍수전의 지시를 받고 때가 왔다고 판단, 3000여명을 이끌고 9월1일 야간에 동왕부를 포위하여 양수청과 그 가족 부하 등 2만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에 홍수전은 그의 남살을 질책하니 위창휘는 천왕도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이미 대비하고 있어서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다. 9월 중순에 석달개가 귀경하여 위창휘의 남살을 질책하자 위창휘는 석달개를 죽이려 하여 석달개는 야밤도주하고 그의 가족은 해를 당하였다.
3) 홍수전 · 위창휘의 대립과 석달개의 이탈
천경을 도망나온 석달개는 안경으로 가 위창휘의 토벌을 선포하고 홍수전에게 위창휘를 주살하도록 요구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경으로 들어가 정난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위창휘의 행동은 홍수전과 그밖의 많은 사람들을 불만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위창휘는 더욱 발광하여 천왕부를 공공연히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홍수전은 부하들의 요청에 따라 위창휘를 주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틀간의 교전 끝에 위창휘의 저항을 분쇄하고, 11월2일에 그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의 수급을 안경에 있는 석달개에게 보내 석달개의 불만을 풀게 하였다. 이때 석달개는 ‘위창휘의 머리를 얻지 못하면 즉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천경을 공격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석달개는 금전기의에 참가한 왕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11월 말에 천경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는 26세로 군사 정치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여 정무를 맡도록 추천하였다. 홍수전은 그를 통군주장 의왕에 봉하여 군정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은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왕의 발호, 위창휘의 남살 등은 홍수전에게 심리적으로 부담을 주었다. 더욱이 석달개가 돌아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자 홍수전은 그에 대한 의심이 가중되게 되었다. 이에 그는 큰 형인 홍인발을 안왕, 둘째 형인 홍인달을 복왕에 봉하여 보좌하게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이것은 석달개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탐오하고 석달개를 시기하고 견제하려 하여 석달개의 불안과 불만을 샀다. 홍수전은 석달개의 이와 같은 불만을 풀어주지 않았고 석달개 또한 홍수전의 의심을 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결국 석달개는 결연히 천경을 이탈하였다. 1857년 6월2일, 석달개는 천경을 떠나 안경으로 갔다. 그는 가는 도중에 각 지역의 태평군에게 자신이 떠나는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을 천명하였다. 한마디로 천왕에 대한 충정과 천왕의 의심 때문임을 설명하여 군인들을 선동, 함께 떠날 것을 선동하였다.
석달개는 따르는 자를 이끌고 강서·절강·복건·호남을 전전하여 1859년 가을에 광서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다. 그는 1861년 광서를 떠나 호남·호북·귀주를 경유하여 1863년 봄에 3만 명을 이끌고 운남에서 사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천에서 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천경사변의 영향과 결과는 ① 지도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천왕 홍수전 한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정치를 보좌할 사람이 없었다. 전기 때와 같이 지휘가 통일되지 못하고 국정도 획일 되지 못하였다. ② 태평군의 전황이 급전직하로 역전되었다. 위창휘의 남살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가 하면 석달개가 10여만 이상의 정병을 이끌고 떠났기 때문에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③상제의 아들 천왕 홍수전과 그 대변인 동왕 양수청의 싸움은 태평천국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던 배상제교의 이론에 실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사변전에는 내부가 단결되어 ‘모든 사람이 마음이 금석金石과 같았고’ 사기가 왕성하였으나 이후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고 적에게 투항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4) 천경사변 사후 대책과 그 후
홍수전은 지도체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도체제를 정비하고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를 공부한 홍인간이라는 인물을 등용하여 간왕이라 불렀으며 전국의 정사를 총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공이 뛰어난 장군들이 불만을 품었다. 홍수전은 이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진옥성을 영왕, 이수성을 충왕에 봉하였다.
새로운 지도 중심이 형성되고 강화되자 태평천국의 위기가 점차 안정쪽으로 전환되게 하였다. 그리고 홍수전은 양수청의 명예를 회복하여 그가 죽은 날을 동승절로 정하고 자기 다섯째아들 홍천우를 그의 계승자로 잇도록하여 유동왕에 봉하였다. 그리고 위창휘에 대하여는 깍아내려고 북왕만 계승자가 없도록 하였다.
천경사변 이후 홍수전은 혁명정신이 감퇴되고 봉건사상과 미신관념이 오히려 발전하였다. 또한 고대 역사의 교훈을 받아 제후를 많이 봉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갈수록 왕을 많이 봉하였다. 1863년에 이미 90여왕을 봉하고, 나라가 망할 때에는 2,700여왕이 있었다.
증국번에게 사로잡힌 충왕 이수성은 사상이념의 결핍, 실천에 옮길 혁명강령의 부재, 봉건화의 지속적인 확대, 내부분열(위로는 천경사변을 비롯하여 아래로는 농민들 사이의 분열, 광서성의 출발 때문에 광동출신과의 대립, 초기가입자인 고참과 신참의 대립, 천왕과 석달개의 대립), 충·영왕을 견제하기 위한 홍씨집단의 대규모 참여와 왕의 직위남발이 내부 분열을 확대시켰다고 나열하였다.
또한 제왕들의 사치와 향락이 혁명정신을 소멸시키고 봉건화를 가속화하였으며 위화감을 가져왔음을 원인으로 하여 군사적작전실패, 동왕과 북왕의 싸움, 천왕의 정치 무관심, 인재의 등용 들을 태평천국운동의 실패로 들었다.
<참고문헌> 신승하, 「중국근대사中國近代史」, 대명출판사大明出版社,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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