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오늘은 일본 근현대시대에서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뒤를 이어 다르게 무사정권인 막번체제 막부 바쿠후를 탄생시킨 에도시대 도쿠가와막부, 에도막부,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한 개관 및 요약 포스팅입니다
에도시대 에도막부 도쿠가와바쿠후는 1603년서부터 1868년동안 약 250년간 15대의 쇼군을 거쳐 존재했던 무사정권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동안 체득하고 느꼈던 일본정치체제에서 나왔던 부작용과 정권유지연장에 관한 연구로 인해 탄생한 정치체제입니다. 통일하면서 측근들은 에도, 지금의 도쿄 지방으로 지방관 다이묘로 임명하고 적대세력이나 강대한 세력은 멀리 다이묘로 보냄으로써 분열 및 특정가문이 세력을 잡고 발호하는것을 최대한 견제하도록 만든 체제입니다
에도시대 개관
에도막부(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세번째로 나타난 최후의 막부, 바쿠후입니다. 1603년 3월25일(게이초 8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바쿠후를 창설하였을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게이오3년)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타이세이호칸)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게 된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도쿠가와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시대 또는 도쿠가와시대라 부릅니다.
참고로 에도시대말기, 바쿠후타도운동이 융성하였던 격동의 시기는 막말(幕末:바쿠마쓰)라 칭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이후 조선정벌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계자보다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쇼군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고,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정권하에서 부교로써 집사역을 자처하고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쿠가와 토벌군(서군)을 창설하게 됩니다. 서군은 명분산으로서 모리 모토나리를 총대장으로 삼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끌어모았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반감과 정세판단으로 인한 분열이 일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동군을 창설하여 맞서게 됩니다.
여러 갈등과 전투끝에 1600년 일본의 모든 세력을 끌어모았다해도 과언은 아닌 동군과 서군 총 10만씩의 대군의 병력들이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펼치게 되고(세키가하라전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아무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터에 서군의 중요한 장수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항복하여 전투에 가담함으로써 서군은 대패하게 되고 이시다 미츠나리 및 도쿠가와 가문에 협조하지 않은 구 도요토미 히데요시세력들은 몰살당하게 됩니다.
1603년 일본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한 도쿠가와는 면밀한 연구끝에 다이묘로 지배하고 있었던 에도(도쿄)에서 에도바쿠후 에도막부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오사카점령후 지배체제 공고화
에도막부 건립이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게는 눈에 가시가 있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늙어서 얻은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재한 오사카라는 걸림돌이 존재했습니다. 어느정도 도요토미세력을 일소했으나 넌지시 도요토미가문의 부활을 바라는 세력들과 그에 따른 배신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1614년 온갖 명분을 삼아 도요토미 히데요리 토벌을 명해 오사카를 공격하기 시작하고(오사카 여름의 진) 의외로 승부를 겨루지 못한채 휴전하게 되는 굴욕을 맛봅니다.
다시 후퇴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대우하겠다는 거짓약속을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긴장을 푼 사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대로 오사카로 재진격하여 점령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생모 요도부인등은 자결하게 됨으로써(오사카 겨울의 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일본재통일을 이뤄냅니다.
에도시대 도쿠가와바쿠후의 진행과 특징
에도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에 수립한 일본의 무가정권(부케정권武家政:1603-1867)입니다. 도쿠가와의 성을 따라 도쿠가와 막부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지배체제는 가마쿠라막부, 무로마치막부에 비하여 강력하였으며 전국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구게公家, 지샤세력을 통제하고 각처에 할거하는 다이묘(大名)들을 신속(臣屬)시켜 막번체제라는 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전국 수확고의 약 4분의1에 해당하는 직할영토를 보유하고, 금, 은, 구리의 화폐발행과 주요도시를 직할하여 확고한 경제기반 위에 5,6만에 이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했습니다.
막부 바쿠후의 직제는 다이로(大老)라는 최고직 1명을 비상근으로 두고 그 밑의 로쥬(老中) 4,5명이 정무를 총괄하고 와카도시요리는 로추를 보좌하는 한편 하타모토를 감독하였습니다.
관리는 반가타(番方:武官)와 야쿠가타(役方:文官)로 구분되었으며, 17세기 이후는 쇼군직속의 소바요닌을 두어 이들이 세력을 휘둘렀습니다.
정권의 본거지가 에도였으므로 가마쿠라막부시대에 시작한 봉건사회체제가 마무리되면서 확립된 시기이며,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지배하는 집권정치체제로 나아갔으며 병농분리가 완성되고 다이묘를 비록한 무사계급의 봉토와 관록제, 농민으로부터 연공을 징수하는 사회적원리등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상인과 상업에 대한 통제는 대외적으로 유례없는 쇄국정책으로 나타나 200년간이나 계속 되었구요
이 시대는 또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였으며, 사농공상중 인구 5-6%의 무사계급이 80%이상의 농민과 5-6%의 공상을 지배하였다. 무사계급도 쇼군을 최고주권자로 여러 계층으로 구별되고, 동시에 철저한 주종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260~270가에 이르는 다이묘는 영토가 주어지는 동시에 염걱한 통제하에 들어갔고, 개역-전봉등의 처분을 자주 받았습니다. 지배계급이라 해도 하급무사는 정해진 녹봉을 받는 도시의 소비자에 불과했습니다. 농민에도 몇 개의 계층이 있었으며 상업의 활동은 전국적인 상품유통망을 조성하는 동시에 농작물 유통과 결부하여 농촌을 화폐경제로 끌어들여 사회변동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들외에 전통적권위를 지닌 교토의 천황 및 구게(조정에 출사하는 집안)의 세력이 정치적으로는 무력화된채 존재하였습니다.
에도막부를 시기별로 구분하면 막부성립 이후 18세기 초까지의 약 100년간을 전기, 18세기 전반의 교호의 개혁 전후부터 19세기 전반인 분세이분카(文政文化)시대까지를 중기, 거기에 이어지는 덴포의 개혁이후 막부 멸망까지를 후기로 보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1) 에도막부 전기
에도시대 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시대까지 막부의 지배체제는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부케가 지켜야 할 여러 법도, 다이묘의 참근교대제, 막부 기구의 정비, 다이묘의 개역-전봉처분, 주요 도시와 광산의 직할, 화폐발행권의 독점에 의한 금-은-구리의 통일통화 발행 등 막부의 시책은 대략 17세기전반까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금지되고, 1639년 무역통제가 강화되어 쇄국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1700년 전후부터 부케정치를 대신하는 문치주의 정치가 시작되어 이른바 겐로쿠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상업의 발전을 배경으로 서민문화가 개화하였으나 막부와 다이묘들은 재정이 궁핍되어 막번체제의 동요가 심해졌습니다.
2)에도막부 중기
18세기 에도시대 중기에는 경작면적도 증대하고 농업기술도 발전하였으나, 화폐경제가 침투한 결과 농민의 토지저당과 부채가 늘어 농촌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8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수입과 정치의 재건을 꾀하였으나, 상인 세력을 누르려던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계속된 기근으로 농민봉기와 폭동들이 속출하였구요. 뒤이어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한 간세이(寬政)의 개혁은 농촌부흥책, 무사계급의 검약령등을 내세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막부지배와 사회안정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이 무렵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의 통상요구도 적극화하였습니다.
3)에도막부 말기
에도시대 말기인 1830년대에 일어난 덴포의 기근은 1837년 마침내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반란과 농민봉기를 격발시켜 막부의 지배는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미즈노 타다쿠니에 의한 덴포의 개혁은 단기간에 많은 시책을 실행에 옮겼으나, 에도와 오사카주변으로 막부영토를 집중시켜 권력의 부흥을 꾀하려는 아게치법령이 광범한 반발을 일으켜, 오히려 스스로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또 농촌에 널리 발전한 상품생산, 지방도시에 일어난 견직물, 면직물, 양조업등의 제조업, 상품경제의 전면적 침투등 시대적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츠마와 조슈등 서남지방의 큰 번에선 이 무렵부터 번의 채무정리-식산흥업-양식군비에 의한 군제개혁등을 성공시켰습니다.
한편 막부는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 러시아의 푸탸틴 제독등의 내항이후, 구미 제국의 강경한 압력에 못이겨 마침내 200년간의 쇄국을 깨고 개국, 무력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국내는 더욱 분열되고 혼미해졌습니다.
사츠마와 조슈가 막부반대의 자세를 굳힌 가운데 백성들의 봉기와 폭동이 계속되고 하급무사를 중심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돌리라는 손노조이(尊王攘夷)와 도막 타도바쿠후운동이 격화하여 막부는 쓰러지고 천황이 정치표면에 등장하는 메이지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에도막부의 사상과 문화
에도시대에 사농공상의 신분제도, 특히 무사계급의 농공상계급에 대한 절대우위, 또 같은 무사계급사이에도 상하의 엄격한 주종관계를 확립한 것은 유학의 명분론이었습니다. 유학, 특히 주자학은 도쿠가와가의 하야시 라잔을 정치고문으로 삼은 이후, 관학으로서 권력과 결탁되어 그 특권적지위는 오랫동안 확고부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등에서 시작된 양명학, 유학에 경험적 합리주의를 도입한 가이바라 에키켄, 공자와 맹자로의 복귀를 주장한 야마가 소코등의 훈고파도 초기부터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도시대의 사회윤리는 유교의 가족도덕인 효(孝)와, 무사의 주종관계를 강조한 충(忠)의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전란이 없는 태평시대가 계속되자 그 무사도도 공소화하고 그 대신 등장한 것이 겐로쿠시대에 개화한 시민문화였습니다. 중기에 들어와서는 유학도 여러파로 갈라졌고, 그때까지 천시하던 상업활동에 대한 인식과 해외무역의 이득, 외국사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후기에는 막번체제의 모순이 심각화하여 개국을 둘러싸고 분열하는 정국과 국론의 혼란속에서 난학(네덜란드학문)등 서양과학이 수입되었습니다.
미술은 어용미술과 재야미술로 나뉘어 중기 이후에는 주로 생활과 밀착한 세속예술이 주도하였습니다. 건축은 무가의 서원건축과 사원건축이 발달하였고, 특히 조원술의 발달이 주목되었습니다. 회화는 가노탄유를 중심으로 하는 가노파와 도사파등 어용화파에 대하여 서민층에서 육성된 우키요에(풍속화)등이 있습니다.
-에도막부와 조선과의 관계
한편 에도막부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임진왜란 뒤 10년만의 1607년(선조40) 에도막부의 요청으로 조선과 일본이 국교가 회복되어 대마도주에 대한 하사미(下賜米)와 대마도주의 세견선이 왕래되게 되었고, 조선에서도 막부의 쇼군이 갈릴때마다 통신사를 보내는등 1764년(영조40)까지 왕래가 계속되었습니다. 그 뒤 일본은 흉년이 계속되어 연해제읍이 피폐하였으므로 사신영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대마도까지 보내고 일본은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영접하였는데 메이지유신때까지 12차례있었으나 일본 국내가 소란해지자 그것도 중지되었습니다.
-부록-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들 - (에도막부 정이대장군)
1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년-1616년, 재위 1603년-1605년)
2대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년-1632년, 재위 1605년-1623년)
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1604년-1651년, 재위 1623년-1651년)
4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 1641년-1680년, 재위 1651년-1680년)
5대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 1646년-1709년, 재위 1680년-1709년)
6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1662년-1712년, 재위 1709년-1712년)
7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德川家継, 1709년-1716년, 재위 1713년-1716년)
8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년-1751년, 재위 1716년-1745년)
9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 1711년-1761년, 재위 1745년-1760년)
10대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1737년-1786년, 재위 1760년-1786년)
11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斉, 1773년-1841년, 재위 1787년-1837년)
12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 1793년-1853년, 재위 1837년-1853년)
13대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 1824년-1858년, 재위 1853년-1858년)
14대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 1846년-1866년, 재위 1858년-1866년)
15대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년-1913년, 재위 1867년-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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