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산업혁명 - 자본의 역할
1. 시작
영국의 산업혁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또 다른 생산요소는 자본이었다. 공업국의 시민이 공업화 이전의 나라의 시민보다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는 이유는 매시간의 노력으로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생산활동에서 더 큰 자본스톡(어떤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파악한 경제 조직 중에 존재하는 재화 전체의 양. 일반적으로 자본스톡이라 함은 즉, 장차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위해 현재 자금을 지출하는 것을 말한다)의 도움을 받는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도입부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본은 단순한 절약, 토지의 이용 또는 재화의 직·간접적 교환의 산물이었다.
자본은 토지, 금융 또는 교역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던 1840년대의 영국은 결코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 시기가 공업인구의 대다수에게 첨예한 사회적 고통의 시기였고, 이 시기야말로 마르크스를 분기케 하고, 엥겔스로 하여금 영국노동자계급의 조건에 관한 음울한 묘사를 하도록 한 시기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떻게 하여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그렇게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렇게 거대한 자본스톡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해서 산업혁명기의 자본축적의 자금이 조달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때 산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자본의 역할과 산업혁명을 지속적으로 수행케한 원동력을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적자생존에 따른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유명한 허버트 스펜서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진보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이상 앞으로 빈번히 산업발전이 거의 전쟁없는 세계를 가져올것이라 예언했다. 특히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 빅토리아시대(1837-1901)의 눈부신 자본주의 발전에 매료된 스펜서는 중세 군사형사회에서 근현대의 산업형사회로의 전환이 세계사의 철칙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적자생존법칙에 따라 공격성이 모조리 근면성으로 바뀌며 전쟁이 멈춘다고 생각했다.
칼 마르크스(1818-1883)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한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라 보았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사관과 사회구성체론, 생산력의 변화에 따른 상부구조의 변화로 사회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근현대의 변화과정을 제일 디테일하게 생각해낸 사람중의 하나다.
『자본론 Das Kapital』 -칼 마르크스
자본은 자기 증식을 행하는 가치의 운동체다.
자본이 이윤과 잉여가치를 낳는 사회시스템이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체계.
2. 철도시대 전의 영국의 자본형성과 구성.
공업화 이전의 나라는 공업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자본스톡을 상당히 증가시킬 필요가 있고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1인당 생산수준, 생활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본스톡을 늘려가야 한다. 자본스톡의 증가를 실현하고 그 증가를 지탱해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전체의 경제행동양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들 변화의 최종효과는 종종 매년의 국민소득 중에서 저축, 투자되는 비율의 급격한 상승이란 식으로 극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리하여 루이스 W.A. LEwis교수는 후진국과 선진국의 중요한 차이는 저자가 보통 국민소득의 6%를 저축하는데 비해 후자는 12%이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Rostow교수도 투자율이 국민소득의 약 5%에서 약 10%로 변동하는 것을 <지속적 성장을 위한 이륙>의 하나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산업혁명과 관련한 변동의 시기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스톡의 성격의 변화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공업화과정에는 자본축적의 크기뿐만 아니라 내용의 중요한 변동이 수반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의 자본에 추가된 것이 무엇이었을까?
인클로저운동은 울타리, 도랑, 배수 이외의 일반적으로 공동지와 황무지를 영구경작지로 바꾸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공사의 투자와 결부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화는 건축, 도로포장과 가로등, 수도와 위생시설에 대한 투자를 가져왔다. 통신의 개량은 도로, 교량, 하천해운과 운하에 큰 자본지출을 일으켰다. 또한 18세기말에는 기술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산업 또는 부문, 그 중에서도 특히 면공업, 철강공업 및 광업에서 투자의 현저한 가속화가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자본이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소득과 인구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자본스톡이 노동력과 같은 속도로 따라가기 위해서만도 투자수준의 월등한 향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19세기초 영국자본의 구성을 생각해 보면 영국자본의 반 이상이 토지에 묶여 있었다는 것이다.
헨리 비크 목사는 18세기말(1798~1799년경)의 영국의 국민자본을 계산했는데 그중 55%는 토지에 귀속될 수 있다고 추정하였으며, 패트릭 콜쿤은 1812년 무렵에 대해 매우 비슷한 비율은 54%로 추계하였으며, 1830년대에는 페브로가 다시 국민자본의 약 54%가 토지의 가치라고 추정하였다. 그러므로 영국자본의 상당부분이 토지가치에 있었다는 견해를 정당화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토지를 제외하고 재생산가능한, 즉 인간이 만든 자본에만 주의를 한정하더라도 19세기 초에 공업, 상업 및 금융자본(재고품, 기계, 운하, 외국자산 따위)은 전체의 반도 되지 않았고 건물과 공공재산이 약 ⅓, 그리고 농민의 자본이 거의 ⅕을 차지하고 있었다. 1830년대에는 공업가들은 전보다 높은 비율로 이윤에서 재투자하였고, 어떤 농부들은 저축을 공동지와 황무지의 인클로저에 쓰기보다는 비료와 개량가축, 농기계의 구입에 쓰고 있었다.
3. 철도시대(수송혁명)로 인한 자본형성.
1830년 이후, 즉 철도시대 이후에는 위와 다르게 매우 다른 정경이 펼쳐진다. 토지는 여전히 총국민자본의 ⅓가까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상대적 중요성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고 1885년에는 전체의 ⅕도 채 안되었다. 1860년대에는 농업자본도 비교적 덜 중요해졌으며 19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는 대규모의 이농현상과 더불어 농업자본은 상대적인 비용에서뿐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에서도 하락하고 있었다.
페브르가 1830년에 추계할 때에는 인간이 만든 자본의 총가치가 국민소독의 3배 남짓하였는데 비해 1865년 에는 그 비율이 4.5배나 되었다. 공업화의 결과 영국의 투자율이 급격히 상승한 시기가 있었다면 19세기 중반 몇 십년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철도에 그 원인이 있다. 거대한 철도 붐이 절정에 달한 것은 1840년대 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갑자기 자본축적률이 높아진 다른 부문도 있었다. 면공업에서 최대의 투자가 이루어진 시기는 동력사용기계의 광범위한 보급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1830년에서 1840년대 초까지의 15년 남직한 시기의 방추(紡錘, 물레의 실을 감는 가락)의 수는 실제로 배가 되었고 역직기(力織機)의 수는 네배가 되었다. 면공업이 동력으로 전환함에 따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수직공이었다. 15년 동안 면공업 자본가의 이윤이 유례없이 증가할 때 수직공의 수는 1820년대의 ¼로 줄어들었다. 1850년대가 되자 면공업의 직물생산에 대한 수직공의 기여는 무시할 만한 비율로 떨어졌다. 다른 섬유산업에서는 기계화의 시기가 면공업보다는 약간 늦게 왔다. 모직공업 중에서는 면공업과 기술적으로 가장 가까운 소모사(梳毛絲,양모를 이용한 소모방적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털실의 총칭)공업이 바로 면공업을 따랐다. 다른 모직공업에서는 기계화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왔다. 1850년대에는 소모사공업이 면직공업보다 더 빨리 동력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1860년대에는 모직공장이 다른 섬유산업보다 더 빨리 역직기에 대한 투자율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세기 중반의 몇십 년간은 수송의 대폭적 발전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철도 뿐만이 아니었다.
1840년대에 철선이 건조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조선량은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1860년대 초 사이에 신규 조선의 액수는 두 배 이상이 되었다. 1860년대에는 영국에서 매년 건조되고 등록되는 선박의 가치는 국민소득의 1%를 상회하였다. 19세기 중엽의 특징인 고정자본형성의 대약진 중에서도 증기기관차의 승리가 돋보인다. 19세기의 첫 4분기까지는 철도부설은 말의 힘이나 고정시킨 증기기관에 의해 움직이는 소규모의 지방철도가 고작이었다. 1825년 말에는 영국의 300내지 400마일의 공공철도가 있었고 총자본투자는 아마 2백만파운드도 안되었다. 1838년~1840년의 3년간에는 철도부설과 차량에 대한 지출이 연 1천만파운드이상이 되었고, 1840년에는 철도에 투자된 자본가치가 거의 5천만파운드나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궤도와 그 설치비용이었다. 1847년에는 총철도비용이 당시 발표된 영국의 수출액을 능가하였고, 총국민소득의 약 1/10이었다.
초기철도에 있어서 자본의 대부분은 지방기업가들의 수중에서 나왔다. 몇몇 노선의 성공이 알려지자 특정노선의 전망을 계산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저축도 동원되게 되었다. 사실 이 단계에서는 철도자본이 과잉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투기도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자본의 낭비를 가져왔다.
위와 같이 1830년대에서 1860년대에 이르는 철도시대에 경제가 효율적으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자본이 영국의 공업과 산업에 투하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영국의 자본을 유치한 것은 영국의 공업만은 아니었다. 1870년까지 거의 7억파운드가 해외에 투자된 것으로 추계되는데 그중 2/3이상이 1850년 이후 20년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민투자의 크기가 상당히 증가했음을 뜻한다. 자본이 국채와 같은 비생산적 용도로부터 전환된 것이 아닌 한, 그리고 실제 그 비중은 무시할 만큼 작았기 때문에 이것은 국내원천으로부터 거대한 양의 저축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이 그와 같이 대규모의 신규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시민의 일부가 그 액수만큼을 자신의 소득에서 소비를 억제하려 했거나 아니면 소비를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산업혁명기의 자본축적.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사람들이 약간 더 절약하였음은 틀림없다. 정부는 1793년의 로즈법이 공제회에 관한 법률을 통합한 이래 노동자계급의 절약습관을 장려하려고 노력하였다. 에덴의 추계에 의하면 1801년에 잉글랜드에는 60만명의 회원을 가진 7천개 이상의 공제회가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진정한 저축은행은 1804년에 설립되었다. 그것은 자선은행이라고 불리었는데 사실 이 은행은 원래 의도보다 더 자선적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예금의 5%의 이자를 지불함으로써 은행설립자들은 손해를 보았고, 은행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어 1817년에는 70개의 저축은행이 문을 열고 있었다. 1830년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대략 37,8000명의 예금주가 1200만파운드 이상의 예금을 갖고 있어 1인당 평균 33파운드 꼴이었다. 1845년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예금주의 수와 예금액이 2배이상 증가하였다. 저축습관은 형편이 나은 계급인 장인(匠人)들 사이에도 퍼지고 있었고, 예금주의 4/5이상은 50파운드 이하의 예금을 갖고 있었다.
개인저축 외 또 다른 원천이 있었는가 살펴보면 해외차입과 정부투자가 있었는데 무시할만큼 중요치 않았기 때문에 제외해도 좋다. 프랑스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 국제자본시장의 지배적위치를 잃었고 런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영국은 차입국이 아니라 대출국이 되었으며 국채는 주로 국내문제가 되었다. 영국정부는 또 가능하다면 경제분야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했다. 또 하나 자본형성의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강제저축>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인플레이션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영국의 산업혁명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사회의 한쪽에서는 상당한 부자들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1세기 이상의 성공적인 무역으로 축적된 거대한 이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업을 통해 매우 정교한 신용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방의 은행가와 도시의 상인은 농촌의 지주나 인도에서 귀국한 갑부들의 여유자금을 이용하여 상업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공업의 자본의 일부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정자본에의 의존 증가가 이미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지만, 산업혁명이 상당히 전개되고 난 다음까지도 여전히 대부분의 제조업분야에서 신규설비의 비용이 낮은 것이 전형적이었다.
면공업이 폭발적으로 생상증가를 경험하고 있던 1790~1815년의 시기에도 제니방적기의 비용은 5파운드도 안되었고 뮬장방기(精紡機)가 30파운드, 증기제분기가 50파운드, 수직기가 11파운드, 양말기계가 15파운드, 그리고 강력한 증기기관이 500~800파운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제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아주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자본을 증식해나가서 그것이 충분히 커지면 보다 부유한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고 그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새 기업이 일단 꾸준히 이윤을 벌어들이면 사업의 유지와 확장에 필요한 자금조달은 이윤의 재투자 또는 소유주의 친구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사업의 성공은 상당한 정도로 그 주인의 능력, 즉 생산요소들을 관리하고 배치하는 능력과 수요를 유치하고 스스로 시장을 만드는 능력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차입자를 알고 그의 시장을 아는 사람만이 자본을 빌려주었다>. 그 뒤에는 어떤 산업의 한 분야의 기술혁신은 같은 산업의 다른 분야의 이윤에서 자금이 조달되곤 했다. 예컨대 1820년대와 1830년대의 랭카셔에서는 방적공장이 역직기의 자본조달의 주요원천이었다.
4. 산업 자본가
산업자본가는, 18세기말엽 목면산업에서 다른 산업부문으로 산업화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대두된, 새로운 형태의 자본가이다. 이들은 산업 혁명기에 공장 제도를 통하여 부를 축적했으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권력·사회적신분·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사회의 중간계급에 속했으며, 자신들의 독특한 산업조직을 발달시켜 빅토리아 시대에 사회 전반에 걸쳐서 폭넓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초기에는 이들의 실체에 대해서 동시대인들은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은 하우의 견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19세기 산업자본가들의 활동은 귀족정치엘리트나 노동자계급에 가려져서 당시 사가들에게는 무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산업혁명기에 일반적인 명칭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산업시대로부터 활동해온 메뉴팩처와 구별없이 동시대인에게 호칭되고 있었다. “인간의 도덕적속성에 대한 낡은 의미에 경제분야의 근대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산업이라는 용어는 18c말엽에 사용이 되었으나, 산업자본가라는 용어는 1860년대에 와서야 나타난다는 견해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시기에는 산업자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산업자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전 산업시대로부터 활동해온 메뉴팩처 및 상인 등과의 구별이 요청된다.
먼저 메뉴팩처에 대해 살펴보면, 이 용어도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자나 마스터 등의 용어로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이 용어는 전자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는 것을 볼때 산업자본가와 메뉴팩처는 더욱 엄격한 구별이 필요하다 하겠다.
메뉴팩처는 가내공업제도와 선대제도에서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사가들은 이들을 MerChant-manufacturers(상인제조업자)라고도 한다. 이들은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라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구성이라는 면에서는 산업자본가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크루제의 견해에 의하면, 이는 “이들은 유동자본(Circulating capital)을 추축으로 하고있다.” 는 점이다. 유동자본은 주로 저축, 생산자금, 유동부채(active debts)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이들이 직접 생상을 위한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들의 전체 재산 가운데, 생산을 위한 고정자본(fixed capital)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차프먼이 1725년에서 1770년 사이에 devonj 지방을 중심으로 조사한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메뉴팩처 들 중 고정자산을 가진 자는 염색업자에 불과 했으며 ... 천 파운드 정도의 보험과 계약된 건물과 기계류를 가진 사람은 단지 2명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이들 대다수가 고정자본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또 콜맨도 이들에 대해 “메뉴팩처들은 가내공업에서 단지 구매하고, 다시 이를 판매했을 뿐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메뉴팩처들은 생산과정에 참여는 할 수 있으나, 순수한 상품생산자가 아니라 단지 생산을 위한 조직자이며, 또한 가내공업에 자본을 융자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점이 산업 자본가와 뚜렷이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5. 민간 기업가
산업혁명기 영국 기업가 활동은 프랑스와 독일의 그것과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영국기업가 활동은 19세기 공업화를 수행하는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국가의 제약과 은행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경쟁에서 이루어졌다. 영국 공업화의 주역은 모든 사회 층과 지방으로부터 나온 유명·무명의 민간 기업가들이었다. 예를 들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도로·운하·철도)에 대한 투자가 대부분 민간 자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러 발명과 혁신도 대부분 무명의 인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어떤 기관에 의한 과학적 연구의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자본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건설에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사적 자본이 영국에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어 위슬리-맨체스터 운하는 완성될 때까지 거의 25만 파운드가 소요되었는데, 이는 평균 랭커셔 노동자가 1년에 20파운드도 못벌던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다. 제임스 브린들리에 의해 건설된 브릿지워터공 운하는 위슬리에 있는 브리지워터공의 탄광에서 맨체스터로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사회·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맨체스트의 석탄 값을 반으로 내리게 했다는 사실에 사업가들과 부유한 지주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저축을 투기하고, 토지를 저당하여 친척에게 돈을 빌어 그것을 자본축적사업에 투자하였다. 운하건설의 자본 출처는 대부분 각 운하가 건설된 지역에서 지방적으로 출자되었는데, 주식회사 조직으로 민간자본을 동원하여 건설되었다. 지방의 지주 또는 공업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의 토지 또는 재고품을 담보물로 하여 돈을 빌었다. 때로는 지방상인도 짧은 운하를 파는 데 필요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수로는 지방 사업가나 지주에 의해 주도되고 지방주주와 은행과 도시의 회사 그리고 대학까지 그 후원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자본은 지방적인 수준을 넘어서 운송시회의 확장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많은 개인들이 운하회사의 주식을 조금씩 사곤 하였다. 예를 들어 운하에 대한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792년 140파운드짜리 구 버밍햄 운하의 주가 900파운드에 팔렸고, 1825년에 그 운하의 17파운드 10실링 짜리 제 8회 주식이 355파운드에 팔렸다.
산업혁명기 기업가 활동의 주된 기능은 새로운 자본을 조달하여 기업을 조직하고, 새로운 조직에 노동력을 조달·관리하고, 그것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기술혁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생산력의 확대가 요구되고 있는 속에서 자본조달의 기능은 기업가 활동에 중요한 요소였다. 이 시기 자본조달은 기업가 자신의 자기금융으로 그 자신이 가장 주요한 원천이었다. 기업가는 무엇보다도 기업의 조직자였다. 기업가는 기본적으로 그가 필요로 한 자본을 자신의 저축에서 조달하였고, 그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윤을 지속적으로 재투자하면서 기업을 확대해 나갔다. 기업의 자본조달에서 나타난 이러한 이윤의 사내유보와 재투자는 산업혁명의 전 기간을 통해 나타난다.
중요한 점은 기업가들은 선행하는 어떠한 역사적 경험이나 정부의 도움 없이 여러 문제를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해결해 나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 발전의 필수적인 사회간접자본(도로·운하·철도)에 대한 투자가 대부분 민간 자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 시기 기업가들은 자본을 조달하여 기업을 조직하고 새로운 조직에 노동력을 조달·관리하고 그것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는 역할을 하였다.
5. 마무리
18세기말과 19세기 전반기가 지날 때까지 영국자본시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매우 불완전했다는 점이다.
아마 사람과 자금이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던, 이동성이 높고 비전문화된 18세기 경제에서보다도 산업혁명이 시작하고 기업가가 전문화하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더 불완전하였다. 이러한 자본시장의 불완전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제도상의 문제였다. 1856년의 주식회사법이 입법화할때까지는 주식회사는 드문 조직형태였다.
대표적인 생산단위는 가족기업이었고, 대표적인 저축가는 가족의 구성원이거나 친구였다. 또한 사실 소기업가는 자기회사와 친구 이외에 외부로부터 자금을 구하기를 원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낯선 사람들에게 내키지 않는 책임을 지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운하와 같은 대규모사업의 추진자조차 그 사업에 직접 관심이 없는 개인들의 수중에 주식이 가는 것을 꺼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18세기의 금융개혁으로 인해 정부가 신용할만한 차입자로 등장하였고, 18세기 후반에는 비참여투자가들에게 공채가 좋은 투자대상이 되었다.
철도시대를 통해 사상 유례없는 금액이 철도회사에 투자되었고 광기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들 투자의 대부분은 살아 남아 상당한 수익을 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이 어떻게 해서 산업혁명기의 자본축적의 자금이 조달되었는가?
공장이나 제철소의 건설, 배의 건조, 상점에서 재고를 갖추는 일 따위의 투자는 기껏해야 매몰자본으로서 수만파운드만 있으면 족하여서 사업상 필요한 추가자금을 직접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빌리거나, 자기회사의 성공에 깊은 관심을 가진 다른 회사로부터 빌릴 수도 있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철도시대를 포함한 운하사업의 경우에는 달랐다. 이들은 앞으로 몇 년간 약간의 수익도 안 나올지 모르고, 실제 운영되기까지 더욱 큰 자본이 필요할지 모르는 자산에 즉시 수십만 파운드를 자금을 매몰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을 얻기 위해서는 더 넓은 저축원천을 찾아내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 그 저축을 사용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주식회사를 필요로 하였고, 주식이 공모되고 자유로이 거래될 필요가 있었는데, 또 그렇게 되었다. 운하, 철도, 가로등과 상수도의 형태로 나타난 거대한 사회간접자본이 가능했던 것은 그 발기자들이 벌써 공업화되고 성장하기 시작한 경제에서 이용가능했던 소규모의 개인 및 기관저축의 집적을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참여투자가들의 저축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주로 정부였고, 어느 정도 운하가 그러했고, 그 다음에 철도가 대규모로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자금원천 없이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국민투자수준의 엄청난 상승이 가능했을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수송혁명, 인구혁명, 교통혁명, 상업혁명으로 인한 전례가 세워져 있었고, 기구도 이미 존재하여 외국정부와 외국철도가 같은 저축원천을 이용함으로써 영국은 더욱 많은 투자를 유치하게 되었고, 그것이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로써 면방직공업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기계·제철·광업·운수업·금융업 등으로 잇달아 파급되어, 거대한 생산력의 진보를 가져왔음을 확인하였다.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는것은 인간의 욕망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은 그 체제가 외부로부터의 격심한 충격을 이겨낼수 없고 내부에서 동시에 신빙성 있는 대안들이 서서히 생겨날때가 될 것이다 -페르낭 브로델(1902-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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