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朝鮮前期의 역사인식歷史認識
1. 시작
2. 조선전기의 역사인식
3. 관찬사서의 편찬
4. 사찬사서의 편찬
5. 고려사•고려사절요
6. 마무리
1. 시작
조선시대에는 고려말기 이래의 성리학적 역사서술의 전통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면서 근대 역사학의 싹을 키워가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편사정신(編史精神)은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그 응용학으로서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거울로 하여 정치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데 일차적 목적을 두었다. 성리학은 윤리•도덕 질서의 확립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면서도 합리적인 우주관과 민본적 정치관 등을 담고 있어서 이에 기초를 둔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은 상대적인 진보성과 과학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는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고려국사>․<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사략>․<삼국사절요>․<동국통감> 등 관찬사서를 위시하여 박상(朴祥)의 <동국사략>이나 오운(吳澐)의 <동사찬요> 등 사찬사서들도 적지 않게 편찬 되었다. 이전의 어떠한 시대에 비하여서도 이와 같이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한 특징이라고 하여도 좋은 것이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15세기에는 고려말기의 거듭난 국난과 사회적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새 왕조가 출범하였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의식도 자주성과 도덕성을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건국초기의 국가건설 목표가 거의 마무리되고, 대외관계가 평화적으로 정착된 16세기에 들어와서는 부국강병정책이 권력자의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따라서 이 시기의 과제는 자주성이라는 측면보다는 도덕성의 제고가 더 시급한 문제였고, 이 과제를 중앙정치와 향촌사회에 걸쳐 관철하려는 진보세력이 사림(士林)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적 상황속에서 조선전기의 역사편찬과 역사인식은 어떠하였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주) 박상 동국사략- 조선의 <동국사략>은 2권이다. 그 중 한권은 권근이 지은 것이고, 나머지 한권은 박상이 지은 것이다. 권근의 <동국사략>은 조선 건국초기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기까지의 역사를 성리학적 사관으로 편찬한 통사로 편년체이다.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내용이다. 박상의 <동국사략>은 사림과 관련된 16C의 사서로 존화주의적 사관, 왕도주의적 정치를 반영하고 있다.
2. 조선전기의 역사인식
조선전기의 역사서는 성리학적 정통론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민족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에서부터 체계화하려는 공통된 역사의식에서 편찬되었다. 이것은 고려 후기 편찬된 <삼국유사>나<제왕운기>같이 단군부터 정통을 확립하려고 했던 역사의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리학적인 역사인식을 발달시켜가면서 한편으로는 당대의 역사를 왕조실록을 편찬하였다. 왕조실록은 <태조실록>을 만든 이후 역대 왕은 선대왕의 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역대의 실록은 사초(史草)를 기준으로 <의정부등록>·<승정원일기>·<시정기> 등을 자료로 하여 실록청에서 만들었다. 실록은 그 분량이 너무 많아서 열람이 어려우므로 세조 때에 역대군주의 치적 중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을 추려내어 <국조보감>을 만들었다. 또한 전조(前朝)인 고려의 역사도 태조 때에 정도전이 왕명에 의해 <고려사>를 편찬하였지만 그 내용이 불완전하여 다시 고쳐서 문종 1년(1451)에 현존하는 <고려사>가 만들어졌다. 이 역사서는 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로 이루어진 기전체의 사서로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내용들이 왜곡되어 있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편년체(編年體)로 된 <고려사절요>가 만들어졌다.
16세기에 사림들에 의해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됨에 따라 좀 더 철저한 성리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역사서가 요구되었고, 이를 반영한 역사서로 박상(朴祥)의 <동국사략>과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이 있으며,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에도 나타나있다. 또한 16세기 사림들에 의한 성리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조선에 중국문화를 전한 기자를 성현으로 높여 추앙했고, 이로 인한 기자연구의 집대성은 이후 17·18세기에 기자조선·삼한·삼국·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체계화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정리하자면, 건국초기는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성리학적 통치규범을 정착, 15세기 중엽에는 고려왕조의 역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재정리하였으며, 16세기에는 사림의 정치의식과 문화의식을 반영한 존화사상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주) 존화사상이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함으로써 중국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3. 관찬사서의 편찬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15세기에는 고려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통치질서를 세워가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국가의 통치철학을 담은 다양한 사서들이 관찬(官撰), 즉 국가사업으로 편찬되었다. 가장 먼저 착수된 것은 고려시대 역사의 정리였다. 바로 앞선 시대에 대한 정리가 없이는 새로운 질서의 방향설정이 곤란하고, 새 질서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고려시대에 대한 정리는 고려시대의 실록과 이제현의 사론 등을 참고하여 이미 태조 때부터 정도전 등에 의하여 착수되었지만, 실제로 이 사업이 완결된 것은 문종 때 가서였다. 기전체형식의 <고려사>와 편년체 형식의 <고려사절요>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간행된 것이 그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전기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무신란 이후의 고려말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조선왕조 건국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한편, 대외적으로 연이은 외적의 침구로 인하여 국력이 약화되고 국위가 손상된 것도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평가는 조선왕조의 새 질서가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 사서의 갈등도 있었으니, 고려사는 군주의 절대적 영향력을 중심에 두고 고려역사를 정리한 것이며, 고려사절요는 대신의 역할과 관료제도의 정비를 역사발전의 핵심에 설정하고 고려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대신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태조 때의 <고려국사>(정도전, 정총 등)가 왕권이 강화되던 세종 때에 비판을 받으면서 개찬되어 그 결과가 문종 때의 고려사로 나타난 이유이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의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김종서 등이 <고려국사>의 개통을 이은 <고려사절요>를 다시 편찬한 것은 국왕과 대신 사이의 권력조정이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갈등은 성종대에 와서 <동국통감>의 고려시대 서술로 마무리되었다.
고려시대사 정리에 뒤이어 착수된 것은 고대사에 대한 정리였다. 최초의 고대사 정리는 태종 때 권근 등에 의해 <동국사략>(=삼국사략)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깊이 투영한 사서로서 불교• 신화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삼국의 역사를 신라 위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3조선과 3한의 역사를 삼국 이전에 위치시킴으로써 고려말기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 상고사 체계의 혼란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국사략은 세종 때에 이르러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로 다시 한 번 재정리되었다. 시가형식의 동국세년가는 그 내용이 극히 간략하고, 또 고대사뿐 아니라 고려시대의 왕계까지도 함께 서술하여 엄밀한 의미의 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동국사략이 삼국유사의 상고사 체계를 많이 참고한 것과 달리, 동국세년가는 제왕운기의 상고사 서술을 많이 따라 우리 역사를 좀 더 단일민족사에 가깝게 인식하여 한 것이 주목된다. 이 책은 권제가 왕명으로 지은 것으로서 세종 자신의 역사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동국사략에 비하여 성리학적 명분론에 유연성을 보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더욱 일탈하여 고대사를 긍정적•적극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는 세조때 <동국통감>의 편찬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신들의 반발로 동국통감의 편찬사업은 미수로 그쳤으나 세조의 의도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응제시주>(권람)와 성종 7년에 <삼국사절요>(서거정,노사신 등)가 간행되었다. <응제시주>는 유자들이 일반적으로 회피하는 자료들을 인용해 단군을 비롯한 역대 개국시조에 얽힌 설화들을 빠짐없이 수록하고, 종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다. <삼국사절요>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하게 반영된 사서도 아니고 탈성리학적 사서도 아닌 중간 형태로 신화, 전설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삼국을 서술함에 신라를 위주로 하지 않고 삼국균전론을 내세워 성리학적 역사서술태도와도 거리가 있다. 성종 15년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동국통감(서거정,노사신)을 편찬하여 비로소 성종 16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훈신과 사림의 두 정치세력의 상반된 역사의식을 조종하면서 하나의 역사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15세기의 대표 사서이고, 태조 때부터 진통을 겪어온 관찬사서 편찬 사업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4. 사찬사서
조선 전기의 사서 편찬은 관찬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성종의 치세가 지난 다음부터는 사찬사서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박상(朴祥)의 <동국사략>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껏 이러한 조선 전기의 사찬사서에 대하여는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정구복(鄭求福)의 ‘16~17세기의 사찬사서에 대하여’, 한영우(韓永愚)의 ‘16세기 사림의 역사서술과 역사인식’이 있을 뿐인데, 후자는 그의 저서 <조선전기사학사연구>에 실려 있는 ’16세기 사림의 도학적 역사서술‘이라는 부분에 대체로 다 들어있다. 아무튼 이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찬사서 하나하나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겠다.
정구복(鄭求福)은 위의 논문에서, 박상(朴祥)의 <동국사감>,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감>, 그리고 오운(吳澐)의 <동국찬요>를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비교적 간단하게나마 최초로 당시의 사찬 사서를 언급하였다. 그 결과 이들 사찬 사서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어 당시의 역사 인식을 추출하려고 하였다. 즉 이들 사서의 찬자 모두가 사림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학 사상은 곧 16세기 문화 활동의 주역이었던 사림 세력의 역사 인식을 대변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들 사서는 사찬이기 때문에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쓰였다는 것이다. 박상(朴祥)의 <동국사략>은 아직도 <동국통감>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유희령(柳希齡)은 편년체로 삼국기(三國記)를 엮었으면서도 삼국(三國)을 따로 분리하였고, <동사찬요>는 기전체이면서도 지는 오로지 지리지(地理志)만을 싣는 식으로, 구태여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종래는 상고사 부분은 외기로 처리했으나 이러한 사찬 사서에 있어서는 상고사를 취급치 않는 경우는 있더라도, 취급하는 한 외기로 처리하는 법은 없었다 한다. 그리고 역사 서술에 있어서도 자연의 변이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고 개인의 전기나 개인의 행동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특히 박상과 오운의 사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서는 대체로 사략형(史略型)의 사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강목형(綱目型)의 역사 서술 속에서 더욱 역사 인식상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영우(韓永愚)는 위의 논문에서 박상(朴祥)의 <동국사략>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 뿐만 아니라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과 이율곡(李栗谷)의 도학적 국관에 이르기 까지 넓게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영우(韓永愚)는, 첫째 이들 사서의 찬자들은 대개 사림 중에서도 기호토림파(畿湖土林派)에 속하는 인사들이기 때문에 훈구 세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왕도정치의 구현에 힘쓰던 개양주의자’ 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역사 서술은 사략형(史略型)의 사서로서 역사 교육을 향촌사회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나아가 절의나 이단 문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경직된 평가를 피하고, 어느 정도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이 사서들의 특징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 인식 태도는 15세기 훈구파의 관찬 사서에 반영된 역사 인식과도 다르며, 동시에 <동국통감>에 반영된 영남사림의 역사 인식과도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향을 통하여 16세기 이후 사림의 도학성인 역사 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추세와 이에 반발하는 흐름이 양분, 분화되어 가는 현상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5. 고려사•고려사절요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의 정립은 조선의 건국으로 새로운 국가사회의 건설이 추진되는 시점에서 더욱 절실해졌다. 태조 원년에 『고려국사(高麗國史)』편찬이 착수된 후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개찬을 거듭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 오랜 과정은 역사학적 발전이 진행되는 한편 새로운 조선의 국가체제가 역사인식의 정립을 통해 심층적인 체계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에서 관찬사서인 두 책 모두는 조선 초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조선은 건국 3개월 후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이 왕명으로 『고려국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태조 4년 정원에 37권의 편년체(編年體)사서를 완성하였다. 『고려국사』에는 편찬자인 정도전 등 건국주체세력의 역사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여 그 역할을 강조하였고, 사대적 명분을 세운다고 고려의 자주적인 전통에서 오는 사실이나 용어를 제후국의 예법에 맞게 삭제하거나 격하하여 개서(改書)하였다. 또한 정적(政敵)인 반혁명파 및 고려 말의 정치사에 대한 서술에서 곡필(曲筆)을 가하였다. 곡필 문제는 정도전 일파의 몰락 후 태종대에 크게 비판받았고, 빈약한 내용과 격하•개서에 대해서도 비판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받았음에도『고려국사』는 그 후의 편찬 작업에 기초적인 대본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그 역사인식에 공감하는 세력들도 한편에 계속 존재하였다.
『고려국사』개찬작업은 태종 14년 5월부터 16년, 세종 원년부터 3년, 세종 5년부터 6년, 세종 13년경에 착수된 적이 있었으나, 모두 완성되지 못하였다. 개찬작업은 세종 31년 다시 착수되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등에 의해 기전체『고려사』가 2년 후인 문종 원년에 완성되었는데, 『고려사』를 문종 원년 8월에 찬진(撰進)하면서 편년체 『고려사』의 수찬(修撰)을 건의하여, 다음해 2월에『절요』를 완성하였다.
고려시대사의 편찬이 장기간의 진통을 거듭한 요인은 첫째, 당시의 정치세력간의 정당성과 공과의 평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관련하여 어느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가 하는 문제였다. 둘째, 권제나 그에게 청탁한 자들에 의한 ‘수사불공(修史不公)’의 문제와 역사편찬에 관여하고 있는 인물들을 비롯하여 당시 지배층의 이해관계와 연결된 갈등이었다. 셋째, 정치적 이념과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역사서술상의 갈등도 지적되고 있다.『고려국사』에서부터 나타난 신권(臣權)을 강화하려는 정치이념과 그 후 군주권(君主權)을 강화하려는 정치이념이 각기 나름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사서술을 추구함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넷째, 고려시대의 자주적 전통과 관련한 사실이나 용어에 대한 인식 및 서술태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으로, 사실대로 직서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대명분에 따라 개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다섯째, 고려시대의 문화전통에 대한 이해와 서술태도의 한계에서 오는 역사서술의 소략화를 극복하고 기록보전 차원에서 내용을 확충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기록보전 차원에서 대폭적인 내용의 확충이 이루어지는 것은 세종대 후반『고려사전문』을 거쳐 139권 분량의『고려사』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현재 전해오는 『고려사』에는 편찬자들로 모두 춘추관직(春秋館職)을 겸하고 있는 32명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세조 집권 후 배포될 때에 변경된 결과이다.『고려사』편찬자들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편찬을 담당하였다. 기사를 가감하여 최종적으로 마무리를 짓는 산윤을 맡은 것은 김종서•정인지•허후•김요•이선제•정창손•신속조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편찬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책임도 맡았다. 사료수집과 편집은 다시 둘로 나누어 소장층 사관들이 담당하였다. 세가(世家)•지(志)•연표(年表)는 노숙동•이석형•김예몽•이예•윤기견•윤자운•양성지 등이 담당하였다. 열전은 최항•박팽년•신숙주•유성원•이극감 등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앞서 기전체를 주장한 소장 수사관들이었으니, 이들이 바로 열전의 편찬을 담당한 것은 기전체를 주장한 동기의 중요한 하나가 열전에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절요』에는 편찬자로서 모두 춘추관직을 겸직하고 있는 28명의 명단이 수사관으로 수록되어 있다.『절요』의 편찬자들도 역시 춘추관을 담당기구로 하는 조직을 구성하였고, 그 편찬자들의 대표는 김종서였다.『절요』의 수사관 중 다수가 앞서『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한 쪽의 편찬에만 참여한 인물은 오히려 적은 수였다. 두 책의 편찬자가 많이 중복된 것은 그 편찬시기가 2년 반 정도의 단기간 내에 바로 접속되어 있고, 둘 모두 춘추관이라는 기구를 통해 편찬이 진행된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두 책의 공식적인 편찬을 주관한 인물들이 공통이어서 두 책에는 그만큼 공통적인 기반도 존재한다.
한편, 이러한 공식적인 인적 구성과 별도로 실질적으로 두 책의 편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고려사』의 경우는 세종이 큰 영향을 주었다. 세종은 역사편찬의 직서주의와 기록보전주의 등 기초적인 중요한 편찬원칙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세종 사후에 착수된 『절요』는 김종서 등 편찬에 참여한 신료들의 역사인식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고려사』에 비해『절요』는 그 내용에서도 이단시되는 문화전통에 대한 비판을 현저히 강화하였고, 여말의 정치사를 개국공신 쪽에 한층 비중을 두고 서술하였으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옹호하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나『절요』의 경우도 곡필이나 강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대상이나 자료의 선정과 서술비중의 조정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인식을 반영시키고 있었다. 두 역사서에 서로 다른 역사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두 책의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도 그중 한 쪽에 좀 더 애착을 갖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부류의 인물들은 두 책의 반포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연결되었다.
『고려사』는 세가(世家)46권, 열전(列傳)50권, 지(志)39권, 연표(年表)2권, 그리고 목록(目錄)2권의 모두 139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사서이다.『고려사』는『원사(元史)』를 가장 많이 참고하여 유사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단, 표는『삼국사기』를 따름으로써 군주 중심의 연표가 되어, 군주 및 종사(宗社)의 안위와 관련된 사건들을 정리하였다. 열전은 여러 사서를 참작하되, 우왕과 창왕의 경우는 ‘위조론(僞朝論)‘에 입각하여『한서(漢書)』의 예를 따라서 반역전에 넣었다고 하였다.
열전은 후비(后妃)•종실(宗室)제신(諸臣)•양리(良吏)•충의(忠義)•효우(孝友)•열녀(烈女)•방기(方技)•환자(宦者)•혹리(酷吏)•폐행(嬖幸)•간신(姦臣)•반역(叛逆)으로 구성되어 1천여 명에 달하는 인물을 입전(立傳)또는 부전(附傳)하였다. 이러한 열전의 항목은 명칭과 배열이『원사』를 많이 참고한 것이나, 석로전(釋老傳)의 경우는 따르지 않았다. 고려사회에서 불교의 비중이 원에 비해 현저히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로전을 아예 제외한 것은 중대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는 천문(天文)•역(曆)•오행(五行)•지리(地理)•예(禮)•악(樂)•여복(麗服)•선거(選擧)•백관(百官)•식화(食貨)•병(兵)•형법(刑法)의 12지로 구성되었다. 전통적 요소를 바탕으로 당송제를 수용한 고려의 제도는 원의 제도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원사』를 따른 지의 형식은 고려의 제도를 기술함에 부적합한 면도 있었다.
『절요』는 전체 35권으로 된 편년체 사서이다.『절요』는『수교고려사』를 개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절요』에는 『고려사』에도 없는 기사가 수록되거나,『고려사』와 달리 표현되거나 그보다 자세히 서술된 부분도 존재한다.
편년체인『절요』의 체재는 편년적인 정리를 해놓은『고려사』의 세가와 유사한 면이 있다. 두 사서는 모두 신왕의 즉위년 다음해를 원년으로 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취하고, 우왕•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함께 공양왕의 경우는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취하였다. 그러나『절요』와 세가에는 서로 다른 서술원칙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기에 있었던, 전왕에서 후왕으로 바뀐 후 다시 전왕과 후왕이 재위한 이른바 중조(重祚)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는 충렬왕과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의 재위기간으로,『절요』에는 중조에 의해 전년과 후년으로 재위기간이 나뉘는 네 왕 나뉘시기가 그대로 편년별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세가에는 이 시기 재위기간들을 각 왕별로 묶어 놓음으로써 전후 재위기간들의 서술순서가 시간적 순서와 달라졌다. 이는 기본적으로 세가가 왕기로서 편찬된 결과이다.
이러한 왕기로서의 성격 때문에 세가에는 정통성이 부정된 우왕과 창왕대에 해당하는 서술이 빠져 열전에 수록되고, 세가에는 공민왕대 다음에 공양왕대가 서술되었다. 물론『절요』에서는 이 경우도 편년적 원칙에 따라 서술되었다.『절요』와 세가는 연시(年時)의 기록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세가는 간지와 함께 국왕재위년•월•일진을 표시하였는데,『절요』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함께 표시하고 일진은 생략하였다. 또한『고려사』의 지에는 연월을 밝히지 않은 무편년(無編年)기사들이 많다. 열전의 경우도 대강의 시대는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기사들이 많다. 이는 역사의 서술에서 중요한 결함이 되는 것으로『절요』의 경우는 그러한 문제가 없고, 『절요』에서 그 연대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논찬의 경우 두 사서는 찬자가 직접 논찬을 만들지 않고 가능한 한 선인들의 기존 논찬 중에서 선택하여 그대로 수록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면서도『고려사』가 역대 왕기의 끝에 ‘찬(贊)’을 부가하는 데 그친 것과 달리『절요』는 ‘찬’에 더하여 각 사실들에 대한 ‘논(論)’을 여러 곳에 삽입하였다. 그 결과『고려사』의 논찬 총수가 33칙(則)인데 비해『절요』는 108칙으로 논찬이 풍부해졌다.
『고려사』는 기전체 본사로서『절요』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체재를 달리했던 데서 비롯되는 것이나, 두 책의 내용은 그 편찬에 주도적 영향을 준 역사인식에 따라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지배층이 지닌 역사인식의 공통 기반과 지배층 내부의 이념적 차이에 따른 분화는 관찬사서인 두 사서의 서술내용과 연결되었다.
두 사서는 전근대의 관찬사서로서 모두 지배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피지배층 내지 하층민의 동향은 역사서술에서 사실상 거의 배제되었다. 두 사서는 공통적으로 고려전기를 왕조가 흥성한 긍정적 시기로 평가하고, 후기를 왕조가 쇠망으로 이르는 부정적 시기로 평가하였다. 왕실과 함께 문신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도 양자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두 사서는 지배층이 주도해간 역사의 세부적인 서술에서는 차이를 갖기도 하였다. 재상을 중심으로 신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의 역사서술과 군주의 비중을 강조하는 경향의 역사서술이 초래한 차이다. 이는『고려사』의 체재에서도 나타난다.
신료들의 기전체 주장은 종래의 편찬 작업이『고려국사』이후 모두 편년체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방향전환이었다. 이에는 효과적인 역사서술형식의 모색이나 제도의 참고에 편리한 지의 필요성, 열전을 통해 신민(臣民)의 활동을 역사 속에서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기전체를 주장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세기에는 군주가 친히 행한 것은 반드시 기록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기 때문에 왕명인 조(詔)•교(敎)를 모두 수록하는 등, 군주와 관련된 사료들은 상세히 수록하여, 세가의 분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절요』의 범례에는 군주에 대한 기록 중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거나 반성의 자료가 되는 것을 추려서 수록하고, 대신과 현사들의 활동도 그 직책과 함께 정리하여 수록한다는 서술대상의 선정원칙이 제시되었다.『절요』에는『고려사』에 빠진 내용이 수록된 것도 있어 편찬 관점의 차이도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절요』의 서술은『고려사』보다 신료들의 활동에 대한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문화전통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역사인식의 차이에서도 두 책의 서술은 다른 면을 가졌다. 조선 초에는 한당유학(漢唐儒學)적 요소의 축소와 성리학의 확산으로 자체적인 사대명분론이 강화되는 가운데 고려시대의 자주적 전통에서 비롯된 사실이나 용어를 격하•개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만큼 수사관들의 상당수는 유교적 명분 및 가치판단과 그에 따른 시비포폄을 역사편찬의 기본적인 준거로 신봉하였다. 근본적으로 세계관과 문화관의 차이에서 오는 이견의 대립은 장기간의 격론을 거침으로써 평가는 내리되 역사적 사실은 존중한다는 선에서 직서와 기록보전을 추구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고려사』에서는 본기를 세가라 하고 범례에서 그러한 고려의 자주적 전통과 관련된 사실들을 ‘참유(僭踰)’로 지칭하는 한편, 역사적 사실 자체는 존중하여 직서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절요』의 경우『고려사』보다 사대명분론적 관점이 약간 강화되는 경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직서의 원칙이 채택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단시된 문화전통들에 대해서도『고려사』는 전체적으로 상당량의 서술을 할당하였다.『고려사』에서는 이들을 수록하면서도, ‘잡의(雜儀)’라 칭하여 해당 지의 끝에 붙이거나, 그들이 ‘비야하고 속되다’고 하는 등의 평을 달았다.『절요』에서는 이러한 이단시되는 문화전통에 대한 서술도 많이 탈락시켰고, 논찬을 통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고려사』는 조선 초에 고려시대 문화를 정리하는 정신적 기준으로서 의미를 가졌다고도 평가된다.『고려사』나『절요』는 비슷한 무렵의『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과 같은 사서와는 달리 유교적 역사인식에도 경직성이 적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동국통감』이 고려시대를 연구함에 사실상 사료적 가치가 없는 사서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념으로 경도된 경직된 편찬의 결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비하여『고려사』와『절요』가 고려시대 연구의 중요한 기초사료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은 현저히 대조된다.『고려사』와『절요』의 서술로 역사인식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있었지만,『동국통감』단계에서는 이념에 따른 역사서술과 시론을 통한 평가만을 강화하는 개서에 치중하여『삼국사절요』와『절요』를 대본으로 이용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고려사』는 그 전후의 조선전기 역사서들과 다른 뛰어난 측면이 있다. 사실의 존중을 내세운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겸허한 접근이 일부나마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하겠다.『고려사』와『절요』의 그러한 면은 두 사서의 체재가 성리학적인 이념에 따른 역사서술과 포폄에 좀 더 철저할 수 있는 주자(朱子)의『통감강목(痛鑑綱目)』의 체재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고려사』와『절요』는 강목체로 서술되지 않고 기전체와 편년체를 취하였는데, 두 사서가 완성되기까지의 오랜 전통에는 체재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
『절요』도 그렇지만『고려사』가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는 진전된 역사편찬 방식의 결과였다. 그 편찬방식은 편찬자의 역사관에 따른 서술대상 및 사료의 취사선택이나 생략 등은 있을 수 있지만, 원사료를 인용하여 편집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편찬자의 문장에 의한 서술은 극히 한정하여 본문에 해당하는 서술에서는 지와 열전의 서문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찬자의 주장임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여 사료의 인용에 의한 서술과 구분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시대적 한계를 감안할 때『고려사』나『절요』는 당시의 사학으로서는 뛰어난 면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으나, 그 시대적 한계가 같은 결함도 주목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주로 편찬자들의 역사관에 따른 서술대상과 자료의 선정과 관련된 문제로서 고려시대의 역사상의 구조적인 윤곽을 이해하는 데 제약을 주는 것이다.
6. 마무리
조선 건국 이래 15세기까지는 관찬문화시대(官撰文化時代)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관찬사서가 편찬되었다. 이는 신왕조를 개창한 주체세력들이 건국이념 수립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역사편찬에 주력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건국 초 역사인식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이에 가담한 주역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사 사서들의 단점을 보완하고 유교적 체제의 강화를 추구하려했다. 이러한 관찬사서는 조선전기 특히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발전하고 체계화되었던 학문의 결집이 전대의 역사를 집대성하였고 많은 사서의 편찬으로 그 성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관찬사서들은 각각의 시대적 한계는 가지고 있으나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점차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과거의 연구에 유용할 수 있는 원전의 사료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지나, 조선전기의 사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며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참고문헌】
『한국의 역사인식(상)』, 이우성ㆍ강만길 한국의 역사인식(상), 창작과 비평사, 1976
『한국사학사의 연구』, 한국사연구회, 을유문화사, 1985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조동걸ㆍ한영우ㆍ박찬승,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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