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 도서정보
우리 궁궐 이야기. 저자 홍순민. 출판사 청년사 출판일 1999년
같은 제목의 다른 책인 우리 궁궐이야기 구완회씨가 지은 상상출판의 2021년버전 우리궁궐이야기도 추천한다
홍순민교수의 우리궁궐이야기가 딥하고 진지한 우리나라궁궐의 속깊은 이야기까지 전문적으로 다룬다면 2021년에 나온 상상출판 구완회씨가 지은 우리궁궐이야기는 우리나라 궁궐에 대해 이름을 제외하고 잘 모르는 부모님과 아이들을 위한 궁궐입문서이자 참고서로 적합하게 잘 나왔다
둘 다 서울 5대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을 다 다룬 것은 똑같다
두 권 다 읽어보기를 추천하지만 한권만 읽어도 상관은 없다.. 초보자에게는 최근 버전을 추천한다
우리는 우리나라 궁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참고로 1999년에 출간된 책이라 현재와 약간 괴리감이 있을수는 있지만 역사 그대로 읽으면 좋겠다. 빨리 개정판이나 신간이 나왔으면 더욱 좋겠다
정말 많은 공부가 된 책이라 양이 방대하지만 최대한 요약소개한다.
서평독후감 우리 궁궐이야기, 홍순민
1. 우리 땅 우리 서울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예 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193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창가부 당선작- 이은상 작, 현제명 곡, 〈조선의 노래〉귀절이다.
해방 뒤에 국민 가요로, 70년대까지 여자아이들 고무줄 놀이 때 즐겨 불렀다. “ 원숭이 똥구멍~”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라는 가사는 국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하고 있다. 산이 유난히 많고 물 맑아, ‘금수강산(錦繡江山)’, ‘산 좋고 물 좋은 우리 산하’라고 칭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산과 강을 하나로 묶어 파악하지 않고 따로따로 알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 산맥을 배우고 강을 따로 배웠다. ‘산맥’은 1900년대 고토 분지로(소등문지랑)이라고 하는 일본인 지질학자가 땅속의 지질 구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18세기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선생은 우리 산줄기의 계통을 세워 〈산경표(山經表)〉를 만들었다. 여기서 산줄기를 대간(大幹), 정간(正幹), 정맥(正脈)으로 분류 표기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서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했는데, 인체의 척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맥(正脈)은 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강을 가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12 정맥이 있다. 정간(正幹)은 강을 끼고 있지 않은 산줄기로서 함경북도에 있는 장백정간 하나뿐이다. 산줄기는 계속 갈라져 결국 평지와 만나 스러지게 되는데, 우리의 집과 마을 , 그리고 도시는 대개 산줄기가 끝나 평지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마치 가지에 달린 꽃송이나 열매처럼 자리잡는다.
조산(祖山) : 마을 외곽에서 감싸주는 산
주산(主山) : 조산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 뒷산
안산(案山) : 바라보이는 앞산
좌청룡(左靑龍) : 주산의 좌측-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산
우백호(右白虎) : 주산의 우측-서편에 자리잡고 있는 산
내사산(內四山) : 주산, 안산, 좌청룡, 우백호
내수(內水) : 내사산 안쪽으로 흐르는 물(청계천)
외수(外水) : 안산 밖으로 흐르는 강 (한강)
배산임수(背山臨水) : 조산, 주산을 등지고 내수와 외수를 바라보는 모양
산에 기대고 들을 안고 있는 모습은 산줄기를 땅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힘이 용솟음치는 것으로 보고 그 힘을 받아 누리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2. 반도 삼천리의 배꼽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한반도의 복부 가운데서도 배꼽에 해당하는 요처다. 한북정맥은 백대간이 원산 넘어가는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남으로 내려와 도봉산, 북한산을 이루고 서북으로 방향을 틀어 고양시 오두산에 이르러 꼬리를 감추고, 하남정맥은 소백산에서 서북으로 올라와 충청과 경기도를 가르고 광교산(수원), 수리산(시흥), 계양산(부평)을 지나 통진 문수산에서 스러진다.
강원도 북부에서 발원하여 춘천을 지나 흘러오는 북한강과 강원도 남부에서 발원하여 충주, 여주를 지나 내려오는 남한강이 양평 양수리에 이르러 한줄기로 합류하니 곧 한강이다. 서울의 다른 이름은 한양(漢陽)인데, ‘양’이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니, 바로 북한산 남쪽 기슭, 한강의 북쪽 지역이라는 의미다.
서울의 외사산 : 북한산, 관악산, 용마산(아차산), 덕양산. 서울의 주산=백악(白岳,혹은 북악), 동으로 응봉(鷹峯), 타락산을 이루고, 서편으로 인왕산, 남으로 목멱산(木覓山)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바람을 저장하고 물을 얻는다)’의 준말이다. 사람이 땅에 집짓고 마을을 이루며, 땅을 갈아 곡식을 심어 먹고살다가 죽어서 묻히는 땅을 존중하고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풍수 사상은 그러한 관점에서 발달된 것으로 미신이라고 타파해 버리기 이전에 하나의 역사 현상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풍수를 땅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로 받아들이는데서 벗어나 땅의 기운이 거기에 묻힌 시신을 통하여 자손에게 이어진다는 ‘동기(同氣)감응(感應)설’과 ‘발복(發福)기원(祈願)론’은 땅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더러운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진리, 사람의 삶과 그 과정에서 받는 복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하기 나름이요, 역사의 주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되새겨야 한다.
3. 서울 바닥
〈도성과 문〉 성(城)은 방어적 개념이다. 성은 문을 가진다. 서울의 사대문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오상(五常) 인의예지신 가운데서 붙였다. 동-흥인지문(興仁之門), 서-돈의문(敦義門), 남-숭례문(崇禮門), 북-숙정문(肅靖門). 그 사이로 사소문을 두어 동-혜화문(惠化門), 서-소의문(昭義門), 남-광희문(光熙門), 북-창의문(彰義門) 혹은 자하문(紫霞門)이라 하였다.
도성이 사라진 데에는 망국의 역사가 배경에 깔려 있다. 1898년 전차가 놓이면서 흥인문과 돈의문 주위의 성곽이 일부 헐렸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오면서 문 좌우의 성벽을 헐고 옆으로 비켜갔다.
〈운종가(雲從街)〉 흥인문에서 돈의문에 이르는 가로. 구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가로라는 뜻.
조선의 중심적인 상업지역. 이를 시전(市廛)이라 하고, 중국 비단을 파는 선전(縇廛), 국산 비단을 파는 면주전(綿紬廛), 면포 파는 면포전(綿布廛), 마포를 파는 포전(布廛), 모시 파는 저포전, 지전(紙廛), 어물전(魚物廛)등이 큰 점포로서 육의전(六矣廛)이라고 불렸다.
〈북촌과 남촌〉 북촌(北村)은 백악과 응봉을 등지고 청계천을 내다보는 자리로서 북촌이라 했다. 왕과 고관대작들, 양반들이 살았고, 남촌은 목멱산 기슭으로, 기개가 꼿꼿한 양반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남산골 샌님’, 돈이 없어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딸각발이’
〈남대문로〉 남대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올 때는 시청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로 통하는 태평로다. 원래는 작은 길이었으나 일제 때 이 길을 크게 낣히고 태평로라 붙였다. 태평로가 뚫리기 전에는 남대문 시장 쪽에서 신세계-한국은행-을지로 입구-광교-종각역이 정식 경로였다.
〈종루(鐘樓)〉 1396년(태조 5년)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종로 네거리에 옮겼다. 종루에 누기(漏器),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쳤다. 세종 19년 경복궁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광화문 앞에 쇠북을 설치 전달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고종32년 ‘보신각’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 중건한 것으로 철근 콘크리트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나 이층을 가리킨다. 각(閣)은 단층집이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이 아니라 ‘종루’라고 해야 옳다.
밤이 되어 성문을 닫는다는 뜻으로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를 따라 스물여덟 번을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밝는다. 하루를 시작하라 성문을 연다는 뜻으로 불교의 33천에서 따와 서른 세 번을 치는 파루(罷漏)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소리였다.
〈비전과 육조거리〉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 쪽 모퉁이에 ‘비각(碑閣)’이 있다. 그 비에는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종황제가 망육순(51세=1902)에 왕으로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것을 경축하는 기념비라는 뜻이다. 2중의 기단석 위에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다포식 건물이다. 편액에는 ’기념비전‘이라고 쓰여 있다. 그 둘레로는 돌난간을 두르고 남쪽에 돌로 홍예문을 세우고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제 때 어느 일본인이 그 문을 떼어다가 충무로 자기 집의 문으로 사용하였다. 6.25 와중에 일부 파손 된 것을 1954년 보수하면서 다시 찾아다 달았고, 지금 것은 1979년 해체 복원한 것이다.
당시 비전거리는 삼거리였다. 남으로 황토현이라는 나즈막한 언덕으로 막혀 있었다. 비전에서 북쪽으로 육조(六曹)거리라 한다. 동편으로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가, 서편으로는 예조, 병조, 사헌부, 형조, 공조, 장예원 등 국가 중추기관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2장 궁궐, 그 자리와 짜임새
1. 궁궐 자리
〈5대 고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문화재관리국 등 관변에서는 경희궁이 빠지고 종묘가 들어가 있다. 경희궁이 워낙 제 모습을 많이 잃어버려 종묘로 대신한 것이지만, 종묘는 궁궐이 아니다. 비록 1997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긴 하였으나..
〈좌묘우사〉 중국 고대로부터 도시건설의 기본원칙으로 종묘(宗廟)는 왼쪽 곧 동쪽에, 사직단(社稷壇)은 오른쪽 곧 서쪽에 배치한다는 뜻이다.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신성한 존재였다. 조선도 이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으로, 일년에 다섯 차례 공식적인 제사를 올렸다. 사직단이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드리는 제단이다.
〈별궁, 행궁〉 궁궐은 국왕이 사는 곳이다. 궁궐에서 태어나 살다가 즉위하는 것이 전형이기는 하나 실제로 궁궐 밖에서 생활하다가 왕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 왕이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 하여서 왕이 된 이후로도 계속 소유하는데, 이런 곳을 별궁(別宮)이라 한다. 또 왕이 왕릉에 행차시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경우에 행로의 군현의 관아에 집을 두서너 채 잡아서 이용하게 되는데, 이를 행궁(行宮)이라 한다.
왕의 아버지가 있는 곳도 궁이라 했다.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이 대표적인 예. 왕자 공주 이하 격이 낮은 왕족들의 집은 방(房)이라 한다. 왕의 생모를 모시는 사당을 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칠궁(七宮)
〈법궁, 이궁〉 별궁이나 행궁, 사당을 비록 궁이라고 부르나, 궁궐이라고 하진 않는다. 왕이 사는 곳을 궁궐이라 한다. 궁궐은 왕의 사적 공간이자, 국가의 주권자요 통치자인 국왕의 모든 공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궁궐은 국가의 최고 관부이기도 하다. 국왕이 임어(臨御)하는 공식 궁궐 가운데서 으뜸되는 궁궐을 법궁(法宮)이라고 한다. 법궁은 왕실의 생활기거 공간이자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고, 빈객을 맞는 제반 공간을 갖추었다. 그런데 화재가 나거나 변고가 생기거나 국왕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옮기고 싶을 때, 또 다른 궁궐이 필요하다. 이렇게 이어할 목적으로 지은 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한다.
2. 궁궐의 짜임새
조선시대 궁궐의 공간구조는 내전(內殿), 외전(外殿), 동궁(東宮), 생활주거공간, 후원(後苑), 궐내각사(闕內各司), 궁성문 및 궐외각사 등으로 짜여져 있다.
〈내전〉 왕의 기거공간인 대전(大殿)과 왕비의 기거공간인 중궁전(中宮殿)으로 구성된다. 편전(便殿)은 왕이 주요 신료들을 만나 공식적인 회의를 여는 건물
〈외전〉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의식,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공간이다. 외전의 중심은 정전(正殿) 혹은 법전(法殿)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정전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의 네모난 마당은 조정(朝廷)으로서 조회(朝會)하고 외국 사신을 응대하며 각종 잔치를 벌이는 곳이다.
〈동궁〉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世子)의 활동 공간이다. 세자는 떠오르는 해처럼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배치하고 그에 따라 동궁이라 불렀다.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세자시강원, 세자를 경호하는 세자익위사가 함께 있었다.
〈생활주거공간〉왕실 가족과 시중드는 내시 궁녀 노복 군병들의 거처로서 내전 뒤편으로 배치된다.
〈후원〉 궁궐 북쪽편 산자락 원유, 북원(北苑) 혹은 금원(禁苑)이라고도 한다. 휴식 공간으로서 연못과 정자를 배치한다. 그외에 과거시험도 보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왕이 몸소 참관하기도 한다. 종친들의 모임과 같은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한다. 왕이 농사 실습하는 내농포를 두기도 한다.
〈궐내각사〉 ① 정규 관원들의 관서 - 정승 판서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賓廳),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인사 업무보는 정청(政廳),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활동하는 대청(臺廳),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承政院), 왕과 함께 학문 도야하는 홍문관, 외교 문서 짓는 예문관, 실록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다. ② 경비와 호위 담당하는 군사기구 ③ 왕실 시중과 궁궐 관리하는 기구
〈궐외각사〉 국가의 기간 관서로서 궁궐 정문 앞 인접하여 설치된 관서. 광화문 남쪽 좌우로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있어 ‘육조거리’라고 부른다. 임란 이후로 중요해진 비변사는 창덕궁 돈화문 앞에 하나, 경희궁 홍화문 바로 앞에 하나가 있었다. 비변사는 의정부를 대신해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궐외각사의 대표격이다. 지금은 그 청사는 없어지고 돈화문 길 건너 파출소 앞에 표석 하나 세워져 있다.
3장 궁궐의 역사
1. 경복궁 : 조선 태조는 권력을 잡자 한양 천도를 구상하면서 새 도성에 궁궐을 짓도록 했다. 태조 3년(1394) 8월 스스로 무악에 나아갔으며, 9월9일 정도전, 심덕부 등이 한양에 가서 종묘, 사직, 궁궐, 조시(朝市)터를 정하였다. 10개월 만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완공되었다.
내전 173간 외전 192간 나머지 390간 합해서 총 755간 정도였다. 정도전이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 기거할 연침을 강녕전(康寧殿), 집무실을 사정전(思政殿), 정전을 근정전(勤政殿), 근정문이라 지어 올렸다. 12월 28일 태조와 왕실이 경복궁에 입어(入御)하였다.
무학대사는 왕사(王師)로서 참여하여 ‘이 땅은 사면이 높고 수려하고 중앙이 평탄하고 널찍하니 성읍이 설만하기는 합니다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아 결정하소서’ 하였다.
2. 창덕궁 : 태조 7년 이방원은 정도전과 이방석을 없애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후,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나앉았다. 정종은 즉위 다섯 달 만에 생모 한씨의 능행을 갔다가 개경에 주저앉았다. 이방원은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켜 방간을 제거하고 태조 9년(1400) 11월에 왕위에 오름(태종).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 태종 4년 친히 무악을 둘러보러 나갔다. 종묘에 들어가 세 후보지인 개경, 무악, 한양을 놓고 점을 쳤다.
태종은 한양 천도와 이궁 조성을 결정하고 바로 공사에 착수하였다. 정종이 먼저 한양으로 이어하고 태종은 조준의 집에 임시로 머물렀다. 새 궁궐은 태종5(1405) 10월 19일 완공,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하였다.
3. 창경궁 : 성종 13년(1482) 과거 태종이 물러난 이후의 처소였던 수강궁을 수리하여 확장하고,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계유정난 시 망설이던 세조에게 갑옷을 입혀 내보낸 여장부, 예종 사후 그날로 덕종의 둘째 아들인 성종을 즉위시키고 7년간 섭정하였음),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려 하였다. 이 곳이 창경궁이다. 창덕궁과 담 하나 사이에 두고서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 등 왕실 가족이 살도록 하였다.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되는 법궁-이궁 양궐 체제가 이후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
4. 경복궁 방화 :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두고 그 가해자를 난민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선조의 어가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공사노비문적이 있는 장예원(掌隸院)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고 나온다. 1934년 일제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도 이 부분에 대해 왜군은 군령이 엄하여 약탈과 방화를 금하여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았고, 전부 노비를 비롯한 조선 민중의 짓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서울을 떠난 4월 30일이 아닌 왜군이 서울에 들어온 5월 3일 기사에 왜군의 동태를 상세히 기술하고, “이 때 궁궐이 불탔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궁궐을 불태운 주체가 왜군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휘하의 장수인 오오제키의 전기인 《조선정벌기》에는 “5월 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을 바라보니 옥루(玉樓)금전(金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온통 적막하였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눈물을 ...”
왜군의 두 번째 부대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부대가 서울에 들어온 때는 5월 4일 오전이었다. 그때까지도 궁궐은 보전되어 있었다. 종군승 제타쿠는 《조선일기》에서 그가 처음 서울에 들어와 청기와로 지은 궁궐의 모습을 보고 경탄한 기록이 있다. 또 다른 종군승 덴케이의 《서정일기》에는 5월 7일자에 “금중(禁中)에 들어가니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해 있었다. ”는 서술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경복궁 방화의 주범은 조선 민중이라기 보다 주전파이며 초토 작전의 명수로서 이미 경주를 방화했던 가토부대 쪽에 혐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5. 경운궁 : 임진왜란 이듬해 1593년(선조26)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선조는 옛 월산대군(성종의 형님, 세조의 장손)의 집과 그 주위 민가를 개조해서 임시 거처로 삼았다. (정릉동 행궁) 여기서 선조는 14년간 거처했다. 광해군은 즉위 후에 창덕궁을 영건하고도 이어 않고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명명하고 3년반을 머물렀다. (여기서 영창대군을 강화로 보내 증살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함)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으로서는 노산군=단종이 세조에 의해서 쫓겨나고 연산군이 폐위된 현장인 창덕궁을 기피하였다. 광해군 7년(1615) 4월 창덕궁으로 이어, 광해군 8년(1616) 술사들의 말을 믿고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터를 모색하고 인경궁을 영건하기 시작함. 인경궁 공사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김일룡이라는 술사가 새문동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고 했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에 모두 요괴가 출현하여 편안히 기거할 수 없으니 부득이 새 궁궐을 지어야 되겠다고 억지 주장하여 경덕궁(훗날 경희궁) 영건을 착수함. 그러나 광해군은 새 궁궐 최종 완공을 보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인조반정을 맞아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1623). 광해군은 붕당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한 당시의 상황에서 궁궐 영건을 통하여 정국 운영에 개입하였다.
새문동은 그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이 있던 곳이고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바로 인조다. 1615년 능창군(인조의 아우) 추대사건이 발생해 이에 연루된 신경희등이 제거된다.
고종 때, 경복궁이 일군에게 점령당하고 왕비가 참변을 당하자, 고종은 피살의 의혹과 공포를 느끼면서 매우 불안한 생활을 하였다. 아관파천(1896.2~97.2) 있으면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계획을 세우고 중건을 명함. 왜냐하면 경운궁이 있던 정동은 외국 공사관이 많이 있어서 고종이 비교적 안심할 수 있었다.
6. 경복궁 중건
1863년 12월 철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왕실의 최고 권력은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가 쥐고 흥선대원군의 아들 명복을 왕으로 만들었다. 1865년(고종2년) 4월 신정왕후는 경복궁의 중건을 표방하고 그 책임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1868(고종5년) 7월 고종이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삼전을 모시고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당백전과 원납전 징수, 토목사업 징발로 백성의 고통이 많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런 부정적 인식의 토대는 1934년 《경성부사》에서 나온다. 경복궁 중건이 재정문제와 백성의 고통, 나아가 대원군 실각과 국력 쇠퇴의 원인이라고 평가)
고종 10년(1873) 12월 자경전 부속건물인 순희당에서 큰 불이 나서 일대 360여간이 소실되었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경복궁은 수리에 들어간다. 그 이후로 고종은 십여 차례나 이어하였다.
고종은 일본 세력을 피해 다니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아관파천:1896. 2~1897.2)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서 시해(을미사변:1895)된 후, 고종은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독살할 것을 우려해 깡통 연유와 날달걀 이외는 아무것도 입에 안댔고, 미국 선교사들이 권총을 차고 침소를 지켜주어야만 안심할 정도였다. 당시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공사관 이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 있어서 조계지 같은 성격이 있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변복을 하고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7. 경운궁 중건
정동 일대에는 임란 직후 선조 말년에서 광해군 초년까지 왕이 살던 정릉동 행궁-경운궁 터가 넓게 있었다. 그 터를 구역별로 잘라서 각 국의 공사관 부지로 할양한 것이다. 경운궁 터에는 왕비의 궁방-명례궁 건물이 몇 채 있어서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그곳에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경복궁에 있던 명성왕후의 빈전과 선왕들의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옮겼다.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과 왕태자는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이후 1902년까지 중건공사는 지속되었다. 1901년에서 4년 사이에는 경희궁으로 새문안길을 넘어가는 구름다리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1908년경에 헐렸다. 경운궁은 중화전과 함녕전이 있는 주요부와 중명전이 있는 구역, 그리고 서북쪽으로 선원전이 있는 구역으로 구성된다. 선원전 구역은 경기여고에서 영국 대사관 북쪽 조선일보사 일대까지이다.
환궁 뒤 8월 14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圓丘壇)을 쌓았다. 19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그 이튼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이후 1907년 7월 19일 퇴위하기까지 10년 5개월 임어하게 된다.
1904년(광무8) 4월 14일 경운궁 함녕전에서 불이 났다.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이 불타 없어졌다. (일본인들의 방화가 의심됨) 고종은 본래 법궁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이어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경운궁의 중건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이미 국력은 기울고 재정도 일본인 고문이 장악하고 있던 시기라 제대로 복원될 수 없었다. 원래 중화전은 지붕이 이층이었으나, 단층으로 줄어들었다.
1905년 11월 17일 밤 고종의 처소인 중명전에서 일본은 경운궁 내외에 일본군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고종과 대신들이 보호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끝가지 거절하였으나, 일제는 ‘을사조약’ 체결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결코 조약의 성립을 인정치 않았고, 마침 1906년 6월 평화회의 주창자 러시아 황제제 니콜라스2세로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고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사람을 특사로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일제는 한국에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공갈을 치면서 고종의 하야를 요구했다. 고조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으나, 일제와 이완용은 슬그머니 양위(讓位)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고종의 궁호를 ‘덕수(德壽)’로, 부호를 ‘승녕(承寧)’으로 정하였다. 정종 연간 태조에게 붙였던 궁호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덕수궁 전하-이태왕’이 공식 칭호가 되었다.
경복궁(景福宮)답사
경복궁 답사는 광화문 네거리 ‘비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거기서 북쪽을 향해 서면 백악이 보이고, 그 서쪽으로 인왕산이 벌려 있고, 동쪽으로는 산자락이 흘러내려 경복궁을 감싸고 있다.
〈해태〉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한자로는 해치(獬豸)라고도 한다.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해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헌부와 관련이 깊다. 사헌부는 시정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원의 비리를 조사 탄핵하는 사법기관이다. 사헌부의 관헌들은 치관(豸冠)이라 하여 해태가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사헌부의 장관인 대사헌은 흉배의 문양으로 해태를 수놓았다. 따라서 해태석상의 제 위치는 사헌부 대문 앞이었으나 현재는 광화문 앞으로 옮겨 놓았다.
〈광화문〉 홍예문이 셋 뚫려 있고 높은 석축 위에 2층 우진각 지붕을 한 광화문은 자못 위풍당당하다. 그러나 지금의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일제는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연 다음, 근정전 앞 3만평 부지에 조선총독부를 짓기 시작하였다. 1926년 연건평 9604평의 5층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을 완공하고 광화문을 해체해 버렸다. 일본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의 반대 여론으로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로 옮겨졌다. 6.25 폭격을 맞아 형체마저 잃고 석축만 남았다. 1968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지금과 같은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한글 편액인 ‘광화문’은 박대통령의 친필이다.
〈흥례문〉
〈근정전 뜰〉 근정문을 통과하면 넓다란 뜰이 보이고 근정전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다. 다시 그 뒤로는 백악이, 왼편으로는 인왕이 버티어 보듬고 있다. 근정전 앞마당이 조정(朝廷)인데, 여기서 각종의 국가의식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바닥에는 박석이라고 울퉁불퉁한 겉면을 드러낸 네모난 돌이 깔려 있다. 조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근정문에서 근정전 앞으로 길이 나 있다. 삼도인데, 가운데 부분은 조금 높게 돋아 있는 어도(御道=왕만 다니는 길)이다. 품계(品階)석 - 조정의 관원이 품계에 따라 서던 표지석. 정일품에서 정구품까지 삼도 동편을 관원을 동반(東班=문반)이라 하고 서편 관원을 서반(西班=무반)이라 한다. 합하여 양반(兩班)이라고 하는데, 사회의 지배적인 신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다가 오늘날에는 2인칭 3인칭 대명사가 되었다. 각 품계는 다시 둘로 나뉘어 정삼품의 경우에 통정대부(通政大夫)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나뉜다.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고, 통훈대부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한다. 당상관은 흉배 무늬가 학2, 호랑이2인데 비하여 당하관은 각 한 마리씩이다.
〈근위 서수〉 근정전은 바닥에 기단을 두 층 쌓아서 장엄하게 지어졌다. 그 주위로는 수호하는 장식과 상징들을 두르고 있어서 더욱 위엄이 있다. 근정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있다. 남쪽 계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가운데 답도(踏道)라 하여 왕이 가마를 탄 채로 그 위를 지나는 길이다. 거기에는 구름속에 봉황이 마주보고 날아오르고 있다. 봉황은 오색을 띠고 있고 산 짐승을 먹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고 여행도 하지 않으며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며,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며, 이 새가 나면 천하가 크게 평안하다고 한다. (중국 자금성에는 답도 길이가 16m가량되고 용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용은 위압적이고 폭력적인데 비해 우리의 봉황은 부드럽고 만만하여 친근감이 있다)
근정전 기단부의 돌난간에는 돌짐승들이 배치되어 있다. 사신(四神)-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 (기단 상층 네곳,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유래) 12지신(支神)-꼭 제자리에 있지는 않다. 서수(瑞獸)-사자인지 호랑이인지 해태인지 불분명한 짐승들
〈근정전〉 정면 5간, 측면 5간으로 25간 이층 지붕으로 되어 있다. 근정전은 100년 넘게 임금이 임어한 적이 없어서 썰렁한 느낌이 든다. 퇴색한 단청을 새롭게 다시 칠하고 창호도 다시 바르고 바닥도 윤을 낸다음, 은은한 조명을 넣으면 한결 나아지리라. 임금 자리-용상(龍床) 뒤로는 삼곡병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병이 둘러 있다. 그 위로 조각을 한 지붕모양의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에는 발톱을 일곱 개 가진 칠조룡(七爪龍) 두 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칠조룡은 황제를 상징한다. 우리는 대체로 오조룡으로 중국 다음이었다. 동양에서 용은 왕이나 황제를 상징한다. 용은 비늘가진 동물의 우두머리요,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 81개의 비늘이 있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에는 명주(明珠)가, 목 아래에는 거꾸로 박힌 비늘(역린 逆鱗)이,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이 있다. 용은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믿어 왕을 용에 비유하였다. 용안(龍顔), 곤룡포, 용상...
여기서 뒤돌아서 앞을 내다 보면 건물의 진가를 알수 있다. 대웅전이든 사랑채나 누각에서도 안을 본다음 그 자리에서 밖을 볼줄 알아야 한다.(역사적 상상력)
근정전 전면 좌우 모서리에 청동제 정(鼎)이 놓여 있다. 다리 셋에 귀가 둘달린 정은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다. 중국 하나라 때, 전국 아홉 주의 쇠를 모아 솥을 아홉 개 만들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구주(九州)를 상징하며, 더 나아가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쓰였다.
‘드므’ -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다. 주요 전각 월대 모퉁이에 설치하여 물을 담아 놓았다. 하늘의 화마(火魔)는 얼굴이 흉악하게 생겼는데,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제풀에 놀라 달아나라는 뜻으로 비치했다. (주술적 소방용구)/외전 끝
왕과 왕비가 사는 곳--내전(內殿)
〈사정전〉 근정전을 뒤로하고 사정문을 지나면 사정전(思政殿)이 나온다. 사정전부터는 왕과 왕비가 일상적으로 기거 활동하는 공간이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편전(便殿)으로서 어전회의 라든가 공식 업무는 원칙적으로 이곳에서 처리하였다. 인사권과 정무결정권을 행사함에 깊이 생각하라는 뜻에서 사정전(思政殿)이라고 했다. 좌우로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다. 원래 복도롤 연결되어 사정전의 기능을 보필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서로 떨어져 있다. 전면 행각 좌측으로부터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玄字庫), 황자고(黃字庫)... 창고 번호 나열되어 있음.
〈강녕전〉 사정전을 휘돌아 뒤로 가면 향오문(嚮五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정면 11간, 측면 5간으로 55간이나 되는 강녕전(康寧殿)이 나온다. 왕이 평복으로 갈아입고 쉬기도 하고 측근 고위 관료와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던 곳이다. 연침(燕寢), 침전(寢殿), 연거지소(燕居之所)라고도 한다.
경복궁을 짓고 정도전이 건물 이름을 지을 때, 강녕전을 맨 앞에 말하였다. “홍범 구주의 오복 가운데 세 번째가 강녕(康寧)입니다... 천지자연이 봄에는 생겨나게 하고 가을에는 이루게 하였고, 성인이 만민에 대해서 인으로써 생성하게 하고 의로써 제도를 갖춥니다. 그래서 동소침을 연생전(延生殿), 서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오복-수(壽), 부(富),강녕,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고종 초년에 중건되었던 강녕전은 1917년 창덕궁 내전에 큰 불이 났는데, 이를 복구하면서 강녕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연침인 희정당으로 만들었다. 경복궁에는 근년에 새로 복원된 강녕전이 들어서 있다.
〈교태전〉 경복궁의 중심축에 일직선으로 배열된 건물 중에서 마지막 건물이다. 강녕전 뒤의 양의문(兩儀門)을 지나면 교태전이 나타난다.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時御所)이다. 사극을 보면 흔히 왕비가 후궁들과 시앗 타툼이나 하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왕비도 공인으로서 궁궐 내의 내명부(內命婦)를 비롯한 여러 층의 여인들을 치리하는 업무가 있다.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강녕전에도 없다. 용마루는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도 없다. 일설에 의하면 침전은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집인데, 왕은 용이고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또 다른 용이 내리 누르면 안되므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태전(交泰殿)은 주역의 ‘태’괘에서 나왔다. 아래가 ‘건(乾)’, 위가 ‘곤(坤)’ 으로 구성된 태괘는 건-하늘, 남자,밝음,위로 솟음을, 곤-땅, 여자, 어두움, 아래로 가라앉음을 상징한다. 음양과 남녀가 교합하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1917년 창덕궁 화재 후, 옛 교태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변신해 있고, 경복궁에는 새로 복원된 새 교태전이 들어서 있다. 원래는 중궁전은 구중궁궐 가장 깊숙한 곳인데, 근년에 복원한 탓으로 깊고 그윽한 맛이 나지 않는다.
〈아미산〉 중궁전인 교태전 뒤로 돌아가면 나즈막한 산이 나온다. 아미산이다. 중국 산동성 박산현에 있는 명산의 이름이다. 경회루의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백두대간-한북정맥-북한산-백악산-아미산. 아미산 가지 끝에 피어난 꽃송이가 교태전이요, 교태전에 이어 여러 건물들이 주렁주렁 꽃과 열매를 이루고 있는 것이 경복궁이다. 아미산은 산과 건물, 자연과 인공, 백두산과 경복궁이 만나는 접점이 된다. 양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얼싸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의 구현이다.
아미산은 왕비의 후원으로서 각종 꽃과 풀 그리고 나무를 심어 놓았으며, 괴석을 설치하기도 했다. 괴석 윗단으로 낙하담(落霞潭), 함월지(含月池)라 쓰인 돌 연못=석지(石池)가 있다. 이러한 설치는 이곳이 곧 선경(仙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과 비교)
석지 윗단으로 굴뚝 네 개가 서있다. 연기도 잘 빠지게 하고 미관도 수려하게 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며, 그 면마다 귀면이나 봉황 등의 벽사(辟邪)상,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 등의 길상무늬를 구워 박아 넣었다. 굴뚝을 예술품으로 만든 것이다. 기능만을 숭상하는 오늘날의 인텔리전스 빌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전이다.
〈경회루〉 경복궁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만원짜리 지폐에도 나와 있다. 크기로 치면 우리 나라 누각 가운데 으뜸이며, 경복궁 건물 중에서 근정전 다음으로 크다. 태조 년간의 그것은 이름없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12년 새로 지으면서 종친, 공신, 원로 대신을 불러 함께 기뻐하며 경회루(慶會樓)라는 이름을 지었다.
지금 경회루는 정면7간, 측면5간 해서 35간이 된다. 이층 누마루집인데, 아래층은 돌기둥을 세우고 위층은 나무로 지었다. 육중하고 거대한 팔작지붕에는 취두(망새), 용두, 잡상을 앉혔다. 잡상은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마화상, 이구룡, 천산갑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장식효과와 함께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는 것을 막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에 일곱 개, 숭례문에 아홉 개, 경회루에는 잡상이 열한 개나 된다.
오늘날 근정전 회랑을 뜯어낸 문으로 경회루로 들어가지만 워낙은 경회루 동쪽의 함홍문, 서쪽의 천일문, 남으로 경회문이 있었다. 경회루는 고종 때 다시 지으면서 주역의 원리를 담았다고 한다. 중앙의 가장 높은 3간은 정당(正堂)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그 기둥 여덟 개는 팔괘(八卦)를 나타낸다. 그 다음 12간은 보조하는 헌(軒)으로 1년 12월을 상징하며, 기둥 16개에는 각 기둥 사이에 네짝 문이 있어 64괘를 이룬다. 가장 바깥의 20간은 회랑으로서 기둥 24개로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아래층 돌기둥에도 이러한 상수역학의 원리가 담겨 있으니 바깥 둘레 기둥은 사가기둥이고, 안의 것은 원기둥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경회루뿐만이 아니라 전통사회의 건축에는 아니 그 모든 것에는 하늘과 땅, 우주의 원리를 담았고 담으려 했다.
경회루에서는 외국 사신이나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또는 왕이 직접 참여하는 과거, 군사훈련, 군대 위로 잔치, 기우제 등을 베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회를 베풀면서도 왕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표방하였다. 경회루라는 이름이 그런 뜻을 담았다고 한다.
* 참고문헌
홍순민, 『우리 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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