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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선시대 당쟁사 1,2권 -이성무. 조선은 당쟁으로 망했나?

Gloomy@ 2022. 11.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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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는 2007년 11월 아름다움날에서 출판된 2권짜리 책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서울대 사학과출신의 문학박사 이성무교수가 펴낸 조선사이야기 중 하나의 줄기의 조선정치사 맥을 잡는 이야기로 사림정치와 당쟁에 대해 집중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1권은 선조때부터 헌종때까지, 조선시대 당쟁사 2권은 숙종부터 고종때까지의 사림정치와 당쟁과 조선시대 정치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흔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양반님네들이 별것도 아닌 예송논쟁 같이 옷을 입냐 안입냐가지고 싸우거나 외척세력의 발호, 끼리끼리 해먹으면서 안에서부터 썩어 조선이 망했다고들 보통 사람들은 흔히 인식을 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정치와 망국의 원인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조선시대의 정치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이며, 당쟁때문에 조선이 망했는지, 당쟁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일본학자들과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광복이후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짚어가면서 사대부정치기, 훈신정치기, 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 탕평정치기, 외척세도정치기로 구분하고 각 조선조 왕들이 어떻게 붕당과 사림정치와 성리학을 이용하면서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면서 조정되어 왔는지 조선의 정치와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당쟁의 어제와 오늘...과연 당쟁이란 무엇인지, 당쟁을 어떻게 볼것인지, 당쟁과 오늘의 정치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아주 흥미깊은 책이며 조선시대 사림정치와 붕당, 당쟁에 대해서 입문할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1권은 300페이지 2권은 400페이지 분량의 적은 양은 아니지만 재밌게 읽었습니다 

 

조선시대 당쟁사 서평

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마무리-느낀 점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는 정치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시대구분, 즉 어떤 정치 세력이 정치를 주도했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조선의 정치사를 사대부정치기, 훈신정치기, 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 탕평정치기, 외척세도정치기로 구분한다. 당쟁은 조선 후기 사림정치에서 파생된 정치 현상의 하나이다.

 

1) 사대부정치기

고려 말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사대부(신진사대부)의 집권 시기를 말한다. 사대부들은 12세기 원나라를 통해 전해진 주자학이념을 중심으로 하여 구 귀족세력의 부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국의 새로운 강남농법을 도입하여 경제적 기반을 얻고 새로 정계에 진출한 신진학자 관료들로서 무신들과 종친, 서리와 여자 환관들의 정치 참여를 봉쇄했다. 대신 지방사족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하여 왕조의 정치기반으로 삼고 군현제를 개편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또한 지방에 향교를 설치해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관료로 불러올리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세종 조에 집현전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어 황금 문화가 창출된 시기를 사대부정치기로 명명한다.

 

2) 훈신정치기

사대부들의 기득권이 강화되어 사대부의 신()귀족화 현상이 일어나 왕권은 제약을 받고, 제도는 이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도록 운영되었다. 새로이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지방 사림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을 때, 1453(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때 등극한 세조의 정란공신 이후 성종 때까지 8차례에 걸쳐 250명의 공신이 등장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또한 세조는 지방에서 김종직을 비롯하여 집현전 학자들을 대신할 젊고 학식있는 사람들을 정계에 불러들였고 이들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왕의 비호를 받아 사림파를 구성하게 되었다.

 사대부가 문무 관료들만을 의미하는데 반해, 사림은 유교 교양을 갖춘 독서인층의 양반지식인들이었다. 사림파는 주자학의 철학 이념을 연구하여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였고 4차례에 걸친 그들의 충돌이 사화로 나타났다. 이 충돌은 세조의 개혁 정치에서부터 잉태되었던 것이다. 세조대부터 중종 때까지의 시기를 훈신정치기라고 보며 이 시기에는 인사권과 언론권이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있던 것이 특징이다.

 

3) 권신정치기

공신세력은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국왕이 등을 돌리게 되자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김안로윤임윤원형이량 등이며 이들은 명분도, 특정 정치 이념도 없었고 집권기간 또한 짧았다. 훈구파가 무너지고 사림파가 정권을 차지할 세력을 갖추기 전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정권 장악 능력도 부족하여 인사권과 언론권을 대신이 가진 것도 아니였으며, 다만 전랑이나 언관에 사람을 배치함으로써 사림의 정치 체계를 도용한 정도였다. 이 시기는 대략 중종 말기부터 명종 때까지로 권신 정치기는 훈신정치기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 훈신정치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4) 사림정치기

16세기에 훈신 세력은 4번의 사화로 사림세력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랑권이 강화되어 청요직 당하관 인사관이 사림에게 돌아가는가 하면 외척 심의겸이 사림을 지지하고 즉위한 선조가 혼인 전으로 외척이 없는 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사림의 진출을 막을 수 없었고 선조때부터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림은 대적할 상대를 잃자 스스로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당쟁이 치열해졌다. 붕당은 학연성지역성혈연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세력을 파벌이라 하는 반면, 앞의 특성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대립하는 정파를 붕당이라 한다.

 선조 초기 당쟁에는 선배, 후배 간 사림의 대립이 있었다. 선배 사림은 심의겸 등 명조때 권신 하에서 벼슬한 사람들이고 후배 사림은 새로 진출한 신진 관료들이었다. 이이김효원 등 후배 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라 하고 선배 사림을 소인이라 하여 공격했다. 군자소인론은 송나라 구양수의 붕당론에 의거한 것으로 진정한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고 소익은 이익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소인의 붕당은 없다고 하고 따라서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소인론은 주자에 의해 철저해져 주자는 군자, 소인의 변별을 철저히 하되 자기 당에도 소인이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과 임금도 군자당에 넣어야 한다는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을 제기했다.

 이들의 충돌은 1575(선조8)에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데에서 김효원 편을 동인, 심의겸 편을 서인이라 했다. 처음에는 동인의 세력이 강했으나 정여립 옥사를 과도하게 다루어 서인 정철의 죄를 논하는 과정에서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 하여 동인은 둘로 갈리었다. 그리고 남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시 화의론 주장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렸고 광해군 때는 대북이 우세했다.

 대북은 적자가 아닌 광해군의 약점 때문에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유폐하는 패악을 저질러 서인 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유발시켰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벌인 것도 문제시 되었다. 인조 때 서인 정권은 대북정권이 독주하다 스스로 분열하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남인과 소북 세력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사실상 정권은 서인들의 수중에 있었고 공신 출신의 공서와 사림 출신의 청서의 대립이 기본이었다. 당시 정권을 가진 층은 산림의 지지를 받아야 했으므로 산림의 여론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공신과 사림의 주장은 같을 수 없었고 병자호란 때 공서와 청서가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렸다. 여기에 남인이 낄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후금에게 항복한 이후로 명분을 잃어 사림들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없었고 김장생, 송시열 등 호서산림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들은 현실성이 낮은 북벌 정책을 밀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소현세자가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다. 효종 때에는 국왕이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각자의 목표는 달랐다.

 효종은 왕권 강화를 꾀하였고 송시열은 사림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 하였다. 하지만 효종 조에는 특별한 당쟁은 없었으며 서인 내부에서 산림세력과 청풍 김씨 외척 세력과의 경쟁 정도였다. 여기에 인조 이후로 성장해 온 남인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려 하였는데 이는 예송논쟁이라 일컬어지는 2차례 예송을 통해 나타난다.

 

 첫 번째 예송은 효종이 죽었을 때 인조의 후취왕비인 조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서인들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기년복(1년복), 남인 등은 차자이지만 왕이 되었으니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이 논쟁에서 지면 정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첫 번째는 서인이 승리했다. 예송 논쟁은 이론을 앞세운 권력 투쟁이었으며 이로 당쟁의 골은 더 깊어졌다.

 

 두 번째 예송은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조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문제였다.

송시열의 이론대로라면 조대비는 대공복(9개월복)을 입어야 하나 현종은 자신의 직권으로 1년복으로 확정 지은 뒤 서인을 축출했다. 두 차례 예송은 경전에 대한 해석 싸움에서 생긴 것이었는데, 송시열은 주자의 해석은 한 글자도 바꾸면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윤휴는 경전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고 마침내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고 그 추종

세력을 배척했다.

 숙종 조에는 당쟁의 골이 깊어진 서인과 남인 사이에 환국이라 하는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숙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척세력으로 당파를 치거나, 당파끼리의 싸움을 일으키는 방법을 썼다. 외척 청풍 김씨인 김석주는 송시열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다가 이 때 와서 서인을 무너뜨리고 남인을 끌어들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이가 갑인환국이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서인에 대한 처리 문제로 허적 등의 온건파가 탁남으로, 윤휴 등의 강경파가 청남으로 갈리었으나 주도권은 탁남이 쥐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남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꺼려 김석주를 시켜 1680(숙종6)년에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이가 경신환국이다. 서인의 도움으로 남인을 몰아낸 김석주는 김환 등을 시켜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을 임술고변이라 한다.

사건을 조작한 것에 조지겸 등 일부 서인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송시열이 고변의 주도자를 두둔하고 훈척 세력과 야합하자,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비판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김석주와 송시열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노론들이 반기를 들었고 숙종은 이를 서인 타도의 기회로 삼아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죽음을 당하고 많은 서인들이 화를 당했다.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경신환국과 기사환국은 화를 입은 사람이 100명이 넘은 대형 사건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붕당 공존과는 달리 당파 사이에 잔혹한 권력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숙종이 의도적으로 빚어낸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694(숙종20)에 서인 김춘택이 남인을 몰아내려 한다는 함이완의 고발과 동시에 서인 김인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영조의 어머니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음모를 고발했다. 하지만 숙종은 전자의 고발만 집권당인 남인에게 취조하게 하였는데 별안간 심문하던 남인 인사들을 처벌하고 서인을 기용하는 갑술환국을 단행하였다. 이 미심쩍은 사건의 실상은 김춘택이 영조의 어머니와 짜고 남인의 실상을 고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갑술환국 직후 장희재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빗발쳤으나 소론은 장희재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죽자 결국 장희빈과 장희재를 죽였다. 숙종과 세자와의 사이는 벌어졌으며 따라서 노론은 연잉군을 밀기로 하였으나 숙종이 죽고, 세자가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되었다. 하지만 경종의 즉위 이후에도 노론의 집권은 계속되었다. 노론은 경종을 퇴진시키려 하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였는데 이 두 세력의 충돌은 1721년의 신축환국과 이듬해에 임인옥사로 나타났다. 신축환국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을 경종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노론세력을 쫓아낸 것이며, 임인옥사는 노론 측이 경종을 죽이려 한다는 고발을 계기로 노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다. 두 사건을 신임옥사라 한다. 신임옥사로 많은 노론 인사가 변을 당했다.

 이제 당쟁은 예송과 같은 정책 대결이나 정권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료가 국왕을 선택하고 충역의리를 결부시키는 처절한 정쟁으로 바뀌었다. 노론은 있지도 않은 왕세제 제도로 집권욕을 채우려 했으며 소론은 이를 반역으로 몰아 처참한 당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5) 탕평정치기

당쟁이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극단으로 치닫자 숙종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대두되어 왕권을 중심으로 타협을 통한 탕평정치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1741(영조 17)에 전랑권, 언론권, 한림회천권이 혁파되기 전까지 사림정치는 유지되었다.

 탕평정치는 영조, 정조 같은 유능한 국왕의 존재시에는 왕권으로 붕당의 타협을 조성하여 일시적으로 당쟁을 가라앉히지만, 탕평당이 생기고 이들이 다시 외척이 됨으로써 외척 세도정치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정조 사후 어린 왕이 서자 견제 세력이 없는 척신세도정치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탕평정치기는 사림정치기에서 척신세도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노소론간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신의 집권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도했다. 그가 노론의 지지로 왕이 되었어도 노론만 지지할 수는 없었고 이인좌의 난 이후 그것은 더욱 절실해져 양 당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 균형을 유지하려했다. 그리고 소론 온건파의 손으로 신임사화에서 받은 노론 인사들의 죄를 풀어줌으로써 자신의 입지 또한 강화시켰다. , 치세 전반기에는 소론탕평을 그 이후로는 노론탕평을 실시해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1741년 이조전랑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되자 사림정치 틀이 무너졌다.

 

 또한 영조는 군사체계를 정비하여 군권을 확립하고 유교 경전에 열의를 보이고 개혁정치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여 말년에는 전제국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1749(영조25)15살 세자에게 주요 업무 외 정무 일체를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1762(영조38)년에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세자 주변에 소론계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추측 할 수 있다. 임오화변으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가시화되고 이는 정조 때 정국의 주요 변수가 되었다.

 

 정조는 세손 때 벽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었고 왕이 되고 나서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세손 시설 그를 보호하던 홍국영을 승지로 발탁하고 금위대장, 수어사 등의 여러 책임을 맡게 하고 규장각을 설치해 측근을 모음으로서 홍국영의 세도 정치가 실시되었다. 홍국영의 누이가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소생 없이 죽자 홍국영은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고 결국 1779(정조3)에 축출되었다. 이후 정조는 채제공, 정약용 등 기호 남인 세력을 끌어드려 남인, 소론, 노론 삼당의 연립 정권을 세웠다. 한편, 초계문신제를 실시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하고 수원에 새로운 성을 쌓고, 장용영을 설치하는 등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또한 산림무용론(山林無用論)을 내세워 노론의 이념을 무너트리고,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내세워 자신의 말에 거스르는 사람을 제압했다. 그는 개혁정치에 뜻을 두어 서얼들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고공법을 제정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해 일반 평민들을 보호했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문운을 일으켰다.

 이런 바탕 위에 정조는 갑자기 교서를 내려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구별해 전자는 옳고, 후자는 그르다는 판정을 내리되, 관련된 사람들의 처벌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노론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12일 만에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6) 외척세도정치기

 정조 사후 순조가 11살에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벽파 김구주의 누이로 정권은 심환지, 이시수 등의 노론 벽파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시파 세력과 정조의 측근들을 죽이고 1801(순조 원년)신유사옥을 일으켜 이가환, 정약용 등 천주교와 관련된 남인을 정계에서 쫓아내어 남인은 재기불능이 되었다. 하지만 정조로부터 순조의 보호를 부탁받은 김조순의 지위는 흔들 수 없었고 김조순의 딸은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

 이에 정권은 김조순에게 돌아가 그는 여러 지위를 역임했고 풍양 조씨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어 벽파 세력을 제거하였다.   1804(순조4)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그녀가 곧 죽자 기댈 곳이 없는 벽파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순조조 이후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계속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김조순은 송시열의 북벌론을 계승하고, 학문적으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낙론을 이어받았으며, 북학 수용에도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안동 김씨 가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 할 수 없던 순조는 19세가 되던 해 친정에 나서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1827(순조27)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대리청정을 하게 된 세자는 반 안동 세력을 기용하고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소론, 남인, 북인 일부도 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안동 김씨 대신 비변사 당상도 맡게 되었으며 이에 김조순은 여주에 은거하다 1832(순조32)에 죽고 말았다. 세자는 정치적 야심이 있었으나 1830(순조30)에 죽고 말았다. 세자가 죽은 뒤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세자의 측근인 김로, 이인보 등은 처벌 받았으나 왕실의 외척인 풍양 조씨는 건재했다.

 

세자 사후 순조가 다시 친정을 하였는데, 세손의 후사를 조인영에게 부탁함으로써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순조가 죽고 헌종이 8살이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이에 조정은 안동 김씨와 조인영 세력 간에 균형을 유지하였다. 헌종이 19살이 국정을 주도하고자 하였고 그는 외가 쪽인 조인영계를 두둔하였으나 두 가문의 연정 체제는 변함이 없었다.

 풍양 조씨들은 김정희 등의 도움을 받아 서학은 배격하되 고증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조인영은 사림정치를 표방하였으나 그들이 공론의 주체가 되는 것은 반대하였다. 즉 이 시기의 산림은 세도 가문의 시녀로 전락하여 서학을 배척하는 전위대로 활용되었을 뿐이었다. 헌종은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군권강화를 꾀하였으나 왕권이 세도 가문에 매몰되어 제대로 권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헌종이 아들 없이 죽자 순원왕후 명으로 사도세자 후손인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인 원범이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이번에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정권은 안동 김씨에게 돌아갔고 풍양 조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헌종의 탈상을 앞두고 철종의 정통에 관하여 전례 문제가 일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철종을 순원왕후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이하전 같은 대수도 맞고 출중한 왕위 계승자가 있음에도 불구, 안동 김씨 세력은 그들의 세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원범을 찾아내 허수아비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철종의 왕비까지 안동김씨일가가 되면서 본격적인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비판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안동 김씨들은 온갖 비행을 저질렀고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외세, 안으로는 민란으로 나라는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당쟁이라기보다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철종이 아들 없이 죽자 이에 대왕대비 조씨가 이하응의 12살 둘째아들을 고종으로 삼았고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하고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러나 국정의 모든 권한이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안동 김씨 세도가 대원군의 세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대원군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력을 내치고 당파,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독자적인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전국의 많은 서원을 헐어버리고 경복궁을 중건했으며,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은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종의 왕비를 명성황후 민비로 간택했다. 왕비의 조건은 고단한 집안이어야 하며 자신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고종과 궁인 이씨 사이의 아들을 첫 손자라며 귀하게 여기자 그 때부터 민비는 대원군을 미워해 민승호 등 외척 세력을 끌어들여 민씨 세력을 형성하고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을 탄핵하게 한다. 민비의 공격과 쇄국 정책의 부작용으로 대원군의 10년 세도가 무너지고 여흥 민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민씨 정부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자 개화파들은 내정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에 유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그러던 중 선혜청 당상 민경호가 밀린 군대 월급을 엉망으로 지급하자 군란이 일어났다. 군사들이 민비를 죽이려 하자 민비는 도망가고 다시 대원군이 들어와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민비는 고종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청나라로 하여금 대원군을 납치하게 하게 하여 다시 민씨 정권이 서게 된다. 후에 민씨 정권이 친러정책을 쓰자 일본의 요구로 대원군이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금족령이 내려졌다. 민비는 러시아와 청국을 이용해 일본을 반대하다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선시대 당쟁사

 2. 마무리- 조선시대 정치와 사회

 조선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사림들의 등장과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당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처음 조선사를 접했을 때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끊임없이 분화하고 당파성을 강조하며 권력 투쟁을 했던 것이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라고 여겼다.

 조선시대의 당은 대의 민주주의를 적용하기 위한 시스템인 정당(party)과는 확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탄생한 것이다. 정당이 이념을 공유하며, 정강을 가진 조직이고, 각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며 권력을 잡기 위한 장치라면, 조선시대의 당은 학연과 지연과 혈연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함께 하는 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의 당은 전근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사대부들의 공론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쳐갔고, 대의명분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렇기에 언관들을 추천해서 사대부들의 공론을 형성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조전랑(이조정랑, 이조좌랑)자리를 두고 동인과 서인이 분당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훈구파들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들이 중앙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은 이후, 사림들은 자체 내에서 경쟁하며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인과 서인이 분열된 이후 동인들은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북인과 남인으로 다시 분열하게 됐다. 북인들은 다시 광해군에 대한 지지 여부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남인들은 서인 처리를 두고 강경파는 탁남으로, 온건파는 청남으로 분화됐던 것이다. 이렇게 같은 당에서 주요 사안에 대해 온건파와 강경파, 혹은 주류와 비주류들이 대립하고 분열을 하면서 새로운 당이나 당파가 출연했고, 당과 당 뿐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당쟁과 대립은 더욱 거세져갔던 것이다. 이들 당들의 기반은 학연, 지연, 혈연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학문적으로 노론은 기호학파인, 이이와 송시열계를, 소론은 역시나 기호학파인 성혼과 윤선거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반해 남인은 영남학파인 이황, 조식계에 근원을 두고, 또 사림들은 저마다 지역의 서원에 기반으로 두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은 겉으로는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어서, 시대가 흐를수록 당쟁은 격해져갔다. 대북과 소북의 경우만 해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존명(尊明)과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으로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실상은 광해군을 다음 보위에 오르게 하느냐,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느냐의 권력 투쟁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당쟁이 점점 권력투쟁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정권투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옥사나, 처형도 이루어지면서, 공존이나 상생이 아닌 숙청과 보복이 이루어지면서, 당쟁의 폐해는 점점 커져갔다. 이런 가운데 당쟁은 사림들만의 권력투쟁이 아니었다. 왕 또한 왕권을 강화시키고,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이 당파를 통해 저 당파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당 교체를 통한 환국을 시도하면서 당과 당 그리고 왕 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당쟁의 승패가 엇갈리는 양상도 나타나게 됐던 것이다. 보통 조선 망국의 한 원인으로 당쟁을 꼽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의 당쟁은 분명히 공존이나 상생보다는 정적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기는 했다. 그런 폐단은 분명히 있었지만 조선정치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림의 등장으로 상호 비판과 견제가 가능했고, 청렴과 공직에 대한 자세를 강조하고 관료들의 도덕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 또 공론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쳐간 것은 조선왕조가 5백년이상 존재할 수 있었던 데 큰 힘이 되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조선의 망국은 오히려 사림의 당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외척과 세도정치의 여파가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척과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일부 벌열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일방적인 정국 운영과 부패 그리고 외세의 침입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조선이 망국으로 이르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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