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春秋)와 춘추필법(春秋筆法)
시작
1. 『춘추』의 유래
2. 공자(孔子)의 생애
3.『춘추』의 시대적 성격
4.『춘추』연구 (춘추3전)
5. 춘추필법(春秋筆法)
1) 춘추필법의 정의
2) 춘추필법의 문체 및 형태
부록) 춘추연표
국립중앙박물관-
1. 『춘추』의 유래
『춘추』(春秋)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의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년)에서 애공(哀公) 14년(BC 481년)까지 12대(代) 242년 동안의 역사(歷史)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孔子, BC 552~BC 479)가 노(魯)에 전해지던 사관(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동주(東周) 시대의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공자(孔子)가 편수(編修)하기 이전에 이미 노(魯)에는 『춘추』(春秋)라고 불리는 사관(史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맹자』(孟子)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열국(列國)들이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도올(檮杌)’, 노(魯)에는 ‘춘추(春秋)’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魯)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孔子)가 스스로의 역사 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춘추』(春秋)이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편(篇)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글의 표현[文辭]을,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에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때문일 것이다.”
『춘추』(春秋)는 1800여 조(條)의 내용이 1만 6500여 자(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정명(正名)과 엄격히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해 사용했다. 이처럼 공자(孔子)는 『춘추』(春秋)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명분(名分)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오경-공자(孔子)가 편찬 및 저술에 관계했다고 하여 존중되는 경서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2. 공자(孔子)의 생애
공자는 중국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주(周) 영왕(靈王) 21년 음력 8월 27일에 탄생하여 주(周) 경왕(敬王) 41년 음력 4월 기축(己丑)에 73세(B.C. 551~B.C. 479)로 일생을 마쳤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며, 선조(先祖)는 송인(宋人)이라고 전해진다. 공자는 젊어서부터 뜻을 세워, 요•순•우•탕•문무•주공이 남긴 도덕 규범과 문물전장(文物典章)을 익혀 난세(亂世)를 구해 보려는 웅지를 품고 있었으며, 특히 주공을 이상적 인물로 추앙하였다. 공자의 중심 사상은 인(仁)이며, 그의 정치사상은 덕치주의(德治主義)와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주공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魯)나라의 관리가 되었으나, 그 뜻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모든 벼슬을 내던지고, 경륜을 펼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 올랐는데 B.C. 498년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그러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고, 13년의 유랑 끝에, 조국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유교 경전을 편찬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육예(六藝) 곧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과목으로 삼았고, 유교 경전의 편찬 사업은『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를 손질하고, 『악경(樂經)』을 바로잡았으며, 『춘추(春秋)』를 저작하고, 『역경(易經)』을 덧붙여 저술하였음. 공자는 B.C. 479년(노나라 애공 16년)에 73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길러낸 제자가 3천명으로 그 중에 육예에 통달한 자가 72인이었다. 『논어』는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그의 언행(言行)을 기록하여 놓은 책이며 중국•한국•일본의 각지에 문묘(文廟:孔子廟)가 세워져,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있으며, 성인(聖人)으로서 숭앙되어 ‘지성선사(至聖先師)’로 모셔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유교가 들어온 후,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한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 모셔지고,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석전제-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文宣王)를 비롯한 4성(四聖) 10철(十哲) 72현(七十二賢)을 제사지내는 의식.
3. 춘추의 시대적 성격
춘추의 시대적 성격은 한마디로 파괴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야욕충족에 혈안이 되어 사치와 방종, 교만과 인색이 전사회를 지배하는 전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풍조로 등장했다.
공자가 『춘추』를 편수한 노나라 은공 원년으로부터 애공 14년까지의 242년간을 춘추시대라고 하는바,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요, 순, 우, 탕, 문무(文武)의 왕도정치체제가 무너지고, 5백(제환공, 진문공, 송양공, 진목공, 초장왕)의 패권정치 체제가 대두하는 천하대란의 역사 변천기이다.
이러한 난세가 출현하게 된 동기는 물론 주나라 왕실의 도덕적 권위상실에서 연원한 천하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도덕, 윤리, 예법, 학문, 사상, 문화 등으로 맺어진 인간유대의 규범이 해제된 결과이다. 주나라는 문왕(文王)의 인정(仁政), 무왕(武王)의 정의로운 혁명, 주공의 예악 제정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도덕문명을 건설하여 당시인은 물론이고 후세의 사람도 그 어버이를 친하고, 그 어진이를 존경하며,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그 이로움을 이롭게 생각하여 신성한 왕실의 권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 10대 여왕(厲王:?~기원전 828)이 이익을 좋아하여 포악한 행동을 하니 백성이 궐기하여 추방하므로 궁궐에서 도망하여 14년 뒤에 죽었다. 이 14년 동안에 소공과 주공이 공화(共和)정치를 하였고, 제12대 유왕(幽王:기원전782~771)은 포사를 사랑하여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자주 봉화를 올려서 제후를 소환하였으므로 제후에게 신용을 잃고, 인척들에게도 신용을 잃어 신후(申侯)가 견융(犬戎)을 이끌고 유왕을 공격하여 여산에서 죽이고 주평왕(771~720)을 세웠다.
평왕은 즉위하여 약 300년 간 주나라 수도로 삼았던 호경(鎬京)을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의 침략을 피하여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니 주나라의 허약성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이와 같이 천자가 인민에게 축출당하고, 제후에게 살해되고, 오랑캐를 무서워하여 도피하는 거듭된 사건들로 인하여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제후들이 천자를 외면하고 각자 자구책을 도모하기 시작하여 시대가 변천하므로 공자는 평왕 49년부터 『춘추』를 엮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혼란은 걸·주의 전제독재에서 파생한 법도붕괴가 아니라 주나라 천자의 권위상실과 제후의 이반(離叛)으로 인한 왕실의 무기력, 그리고 경대부(卿大夫)의 관직세습으로 인한 제후의 통치권 상실로 도덕, 윤리, 법률, 제도가 붕괴함으로써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무력지배 질서가 대두했기 때문에 춘추의 242년 동안 주나라 천자는 13왕이 교체하는 가운데 그 형세가 갈수록 미약해지고, 제후들의 침략과 병탄은 갈수록 더하여 주나라 초기의 천여국이 이 시대에 100여국으로 줄었으니 그 가운데 비교적 큰 나라는 진(晉), 제(齊), 노(魯), 진(秦), 초(楚), 위(衛), 연(燕), 조(曹), 송(宋), 진(陳), 채(蔡), 정(鄭), 오(吳), 월(越)의 14개국이었다. 이어 춘추5패가 등장하여 강성한 오랑캐의 침략은 저지하였으나 춘추의 시대적 과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진(晉)나라가 3개국으로 분열하고, 100여 개국이 4개국으로 병탄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403~221)로 돌입하여 한(韓), 위(魏), 조(趙), 진(秦), 초(楚), 제(齊), 연(燕)의 7웅이 합종연횡책으로 쟁패전을 거듭하다가 끝내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왕권신성화를 꾀하는 데에 이르렀다. 춘추의 시대적 성격은 이상과 같이 양심이 실종하고 도덕질서가 무너진 세태를 바로잡지 못하여 끝없는 인류불행을 파생하고 성왕의 위대한 역사를 파괴단절케 했다는 지극히 불행한 성격을 가진다고 규정할 수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노나라 태생이다. 그가 살던 현시대는 하극상과 약육강식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공자는 그 시대의 혼란상을 보면서 저마다 자기 직분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부모는 부모,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말하여 각자의 직분을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과거를 거울 삼아 기강이 무너진 천하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취지로 『춘추』를 집필하게 되었다. 사건을 기록하는 기사(記事), 직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을 세워,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히 배격했으며,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집필하였다.
특히 선왕(先王)의 업적을 평가할 때에도 이 원칙은 예외없이 지켜졌다. 오직 정사(正史)를 기록한다는 신념으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 편년체의 효시인 『춘추』를 완성했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대의명분을 좇아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기록하는 논법을 '춘추필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의미로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인 동호(董狐)가 당시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함을 일컫는 말이다.
4. 『춘추』연구
『춘추』는 공자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전수해 오면서 6경의 하나로 받들어 유교인의 필독서가 되었으니 전국시대에 맹자는 춘추정신으로 세상을 바로잡아 천하문명을 재건해서 세계평화를 보장하려고 진력하였다. 그러나 6국을 멸하고 등장한 진(秦)나라가 왕권신성화를 꾀하면서 도덕정치를 주장한 유교를 탄압하여 경전을 불태우고 유림을 생매장하였기 때문에 공자와 맹자의 도덕학문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漢)나라 경제(景帝)와 무제(武帝) 때에 비로소 경사(經師)를 찾아 경전을 정리 복원해서 사람을 가르치게 되니 『춘추』는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 등의 3전(三傳)이 나왔으나 그 성씨만 겨우 남아 있을 뿐 이름은 이미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춘추』는 공자가 사학(私學)에서 가르쳤던 교육과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여 해설한 사람은 당연히 유학자였다. 따라서 3전의 해설내용이 대동소이한 가운데 다만 경문의 기록이 공양전과 곡량전은 “애공 14년 봄에 서쪽에서 수렵하여 기린을 포획하였다”에서 끝나는데 비해 좌씨전은 “애공 16년 여름 4월 공구가 졸하다”에서 끝나니 좌씨가 경문을 추가 삽입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협씨전(夾氏傳)과 추씨전(鄒氏傳)등이 있었다고 전하나 전한(前漢)말에 망실되었다.
『춘추』3전은 한(漢)나라 시대에 5경박사를 설치하여 태학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됨으로써 관학(官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경제(景帝)때에는 춘추공양전 박사를 두었고, 선제(宣帝)때에는 춘추곡량전 박사를 두었으며, 평제(平帝), 왕망(王莽)시대에는 춘추좌씨전 박사를 두어서 3전이 태학의 교재로서 우열을 다투었지만 후한(後漢)말 이후에는 좌씨전이 성행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공양학파가 형성되어 좌씨전을 위협하였으나 주를 이루지 못했다.
공자의 제자 좌구명(左丘明:魯人)이 지었다고 전하는 좌씨전은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및 인물평, 사회풍토 그리고 천문, 의학, 음악, 무속, 점법, 예법 등의 자료가 대단히 풍부하지만 현실주의와 운명론에 물들어 천하대의를 망각함으로써 역사비평의 기준이 철저하지 못하고,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의 문인 공양고(公羊高)가 지었다고 전하는 공양전은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고 임금은 법통을 세워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문화국과 친선우호하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천하대일통의 역사정신을 선양하며, 난신적자를 처단하고 시비를 가리며, 혐의를 분별하여 선악을 밝혀서 도덕과 의리를 고취하였지만 역사적 사실을 벗어난 논리적 비약이 많다. 역시 자하의 문인 곡량적(穀梁赤)이 지었다고 전하는 곡량전은 천하의 사업을 완수하고 천하의 정의를 밝히기 위하여 간결명확하게 경문의 뜻을 해설해서 합리적으로 복수론과 양이론(攘夷論)을 선양하였지만 문자해설에 치우쳤고 지나치게 생략하여 해설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미언대의-경문의 자그마한 표현의 차이 안에서 공자가 내세우는 대의를 읽어내려는 방법
5. 춘추필법(春秋筆法)
(1) 춘추필법의 정의
- 춘추필법이란 경문의 일자 일구절의 사이와 일장 일조의 내에서 겉으로는 간결하고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기술자의 호오나 포폄의 태도가 은폐되어 있는 것을 찾고, 바로 그러한 방식의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춘추필법은 편년사이기 때문에 어느 1년 속에는 다양한 사건이 각각 고립하여 기록되어 있지만, 연도순을 따라 일정한 사건이나 인명에 관련지어서 읽어가면 무표정하고 단조로운 기사 단문이 서로 연결되어 일관된 의미를 드러내고 독자에게 특정한 감명을 심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전통적 의견에 따른 춘추필법이라 하면 역사를 기록하는 자세에 있어서 천하 정의를 주체하여 시비선악을 공식적으로 평가하여 절대로 개인적인 견해나 감정들을 용납하지 않는 공명정대한 천하의 합당한 의견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다. 또한, 춘추는 왕정월(王正月)을 표제로 주나라의 정치 체제와 법률 제도가 당시의 사회를 통합하는 유일한 기강임을 알려주고, 주나라 천자에게만 천왕(天王), 붕(崩) 등의 최고의 존칭으로 높여 주나라의 정통성을 보장하여 천하를 분열하는 반란의 역적과 자칭왕(自稱王)의 난동을 막는데에도 의미를 부여하였다.
또한, 의미있는 사건을 선택하는 탁월한 안목과 사건의 개요를 요약 및 함축하여 간결명확하게 표현하는 기사적(記事的)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로 인해 춘추는 의미있는 사건이 있으면 연월일시를 기록하고, 중대한 사건이 아니면 이를 생략하였으며, 사건 기록에 있어서도 내용의 중대성을 초점으로 하여 첨삭을 하였으니 긴 문장은 45자나 되고 짧은 문장은 단지 1자에 그쳤는데 춘추는 전체가 16,500여 자로 1,800여 조항의 사건을 기술함에 그 문체가 중복하거나 서로 똑같은 것이 별로 없다.
*호오-좋고 싫음, 또는 그것을 가려내는 것
*포폄-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
(2) 춘추필법의 문체 및 형태
직서법
- 춘추대의를 분명하게 밝히는 필법으로 사건의 주동자와 그 행위를 밝혀 그 선행이나 과실을 역사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문체이다. 춘추필법의 제 1의로서 덕행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주어 선행이나 공적이나 훌륭한 말이 있는 사람을 결코 은폐하지 않았으 며, 죄악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징계하여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라도 사건의 처 음과 끝을 끝까지 추적하여 권력으로 비행을 숨긴 사실을 모두 폭로하였다.
*춘추대의-도리에 맞고 합당한 것을 잘 판단하는 의리
삭제법
- 허위 조작 사건은 역사자료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춘추필법의 제 2의 이다.
평범한 사건과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행사와 사이비들의 위선을 가장한 행동은 모두 삭제하여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춘추를 읽을 때에는 그 삭제된 내용까지도 짐작하여 역사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약론법
- 사실의 한 부분을 간략히 비평하여 권선징악하는 문체로, 어떤 사건의 결말에 잘못됨이 많아서 시작은 좋게 출발했어도 끝이 사악하거나, 뜻은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게 된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 간략하게 경계하게 하여 그 과실을 용서하고 덮는 필법이다.
은유법
- 사실의 성격을 은근히 다른 일에 비유하여 다소 비판하면서도 그 공적을 인정하는 문체이다. 특히, 어떠한 사건이 뜻밖에 일이 잘 되어서 결과가 아주 좋으며, 별로 노력하지 않았어도 성공하고, 불행 속에서 행운을 잡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면 그 허물을 덮어 주기 위하여 비유법으로 암시만 하고, 그 성공을 인정하는 은악양선(隱惡揚善)의 필법이다.
*은악양선-악을 숨기고 선으로 가장하는 것
존칭법
- 춘추필법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존칭은 조직 집단의 핵심 주체의 1인 에게만 한정하고 그 이외에는 모두 평등하게 호칭하였으므로, 만약 천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천자가 주어이고, 그 이하 제후및 경대부는 종속어 및 결합된 언어로 하였으며, 제후의 모임에 노나라 임금이 참석하면 반드시 노나라 임금을 공(公)이라고 칭하여 주어로 하고, 제후 및 경대부는 종속어로 하였으므로 춘추필법에 있어 주어는 모임의 중심체이고, 회의의 주석임을 의미한다. 즉, 어떤 외세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기사, 정명,포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춘추필법의 깊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서 생각 할 때 은유, 삭제법의 원칙, 즉 속사비사의 서법은 공자의 개인적인 주관으로 쓰여진 필법이므로, 춘추에 기록된 은유적 표현은 굳이 필법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즉, 역사의 기술은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역사학의 근본 원칙이 성립되지 않은 서술자의 일반적인 심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필법이란 서술자가 쓰는 방식의 문체가 아니고 독자가 읽는 방법의 문체인 것이다. 읽는 사람의 주관성을 기술한 사람의 객관성으로 전환하려고 할 때 춘추의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속사비사-비슷한 말이나 사건들을 열거하는 것
부록) 춘추연표
기원전 771년 :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서주(西周) 멸망.
기원전 770년 : 유왕(幽王)의 아들 의구(宜臼)가 정무공(鄭武公) 등의 도움을 받아 낙양에 주를 재건. (동주 시대 시작)
기원전 722년 : 춘추(春秋)의 기술이 시작되다.
기원전 685년 : 제환공(齊桓公) 즉위.
기원전 660년 : 위(衛)가 북적(北狄)에게 일시적으로 멸망했으나 제환공의 도움으로 부활했 다.
기원전 659년 : 진목공(秦穆公) 즉위.
기원전 651년 : 제환공(齊桓公)에 의해 규구의 회맹이 이루어짐.
기원전 645년 : 제(齊)의 재상 관중 사망.
기원전 643년 : 제환공(齊桓公) 사망.
기원전 638년 : 송(宋)과 초(楚) 사이에 홍수의 싸움이 벌어져 송(宋)이 대패.
기원전 637년 : 진문공(晉文公) 즉위.
기원전 635년 : 반란으로 인해 주(周)의 왕이 진(晉)으로 피신했다가 도움을 받아 왕위에 복귀함.
기원전 632년 : 진(晉)과 초(楚) 간에 성복의 싸움이 벌어져 진(晉)이 승리. 진문공(晉文公) 천토에서 회맹.
기원전 628년 : 진문공(晉文公) 사망.
기원전 624년 : 진(秦)과 진(晉)의 전투에서 진(秦)이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621년 : 진목공(秦穆公) 사망.
기원전 614년 : 초장왕(楚莊王) 즉위.
기원전 606년 : 초장왕(楚莊王)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 근처에 이르러 주(周)의 사신에게 구 정(九鼎)의 무게를 묻다.
기원전 597년 : 진(晉)과 초(楚) 간에 벌어진 필의 싸움에서 초(楚)가 승리.
기원전 577년 : 진(晉)의 속국인 정(鄭)이 초(楚)의 속국인 허를 토벌했으나 초(楚)의 공격 으로 정(鄭)은 초(楚)에게 복속.
기원전 575년 : 정(鄭)을 놓고 진(晉)과 초(楚) 간에 언릉의 싸움이 벌어져 진(晉)이 승리.
기원전 551년 : 공자 출생.
기원전 546년 : 진(晉)과 초(楚) 사이에 미병(전쟁을 멈춤)의 회담이 열려 화의가 성립.
기원전 532년 : 제(齊)에서 안영과 사마양저가 중용되다.
기원전 506년 : 오(吳)가 초(楚)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임.
기원전 496년 : 오(吳)가 월(越)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오왕 합려는 이때 입은 부상으로 사 망.
기원전 494년 : 오(吳)가 월(越)에게 승리를 거두다.
기원전 481년 : 노애공, 획린(獲麟)하다. 공자, 춘추기술을 끝내고 붓을 놓다.
기원전 479년 : 초(楚)가 진(陳)을 멸망시켰다. 공자 사망.
※ 참고문헌
남기현, 춘추공양전, 자유문고, 2005.
서정기, 새 시대를 위한 춘추, 살림터, 1997.
이계명, 중국사학사강요, 전남대출판부, 2003.
좌구명, 춘추좌전,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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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학원 초중고 대학교에 이어 동명여중 동명여고까지 폐교? (17) | 2023.05.09 |
머리맡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10여년째 걸어놓고 자는 남자 (16) | 2023.05.01 |
천주교 순교자 순례사적지 순교자인가 역적인가? 황사영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의 묘 방문후기 (11) | 2023.04.10 |
나당연합군에 맞선 백강구전투(백촌강전투)와 사료고찰 (15) | 202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