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시대구분
(1) 일본원시시대와 일본고대시대
①원시·고대란 문명 이전 시기부터 고대국가가 완성되기까지의 시기.
②고대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 일본문화는 선토기시대, 조몬시대, 야요이시대를 거치며 발전했다.
③야마토시대에 일본열도에는 최초의 통일정권으로서 야마토조정이 탄생하였고, 이후 야마토조정은 대륙으로부터 율령제를 도입해 천황 중심의 율령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일본 원시.고대 시대이름과 연도구분
선토기(先土器)시대
조몬(繩文)시대―기원전 1만년- 기원전 3세기.
야요이(弥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야마토(大和)시대―3세기 말(4세기 초)-710년.
나라(奈良)시대―710년-794년.
헤이안(平安)시대―794년-1185년.
(2) 일본 중세시대
①중세는 고대국가가 해체되면서 천황과 귀족 중심의 지배에서 무사정권이 중심이 되는 무사사회로 전환해 나가는 시기.
②12세기 말에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14세기 중반에 무로마치(室町)막부가 탄생.
③15세기 중반의 오닌의 난(応仁の亂)을 계기로 일본열도는 무사들이 실력을 겨루며 항쟁하는 센고쿠(戰國)시대를 맞이하였다.
중세
가마쿠라(鎌倉)시대―1185년-1333년.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 : 1333년-1335년
남북조(南北朝)시대―1336년-1392년.
무로마치(室町)시대―1336년-1573년.
센고쿠(戰國)시대―1467년경-1573년.
(3) 일본근세시대
①근세는 전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시작되었다.
②16세기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
③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막부를 열어 이후 260년간 대대로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안정적으로 일본을 통치해 나갔다.
근세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1573년-1603년.
에도(江戶)시대―1603년-1867년.
(4) 일본근현대시대
①근대는 1868년에 천황 친정을 표방하는 메이지(明治)정부가 탄생하면서 시작되었다.
②메이지정부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의 선진국을 모델로 하는 근대국가를 지향하였으나, 천황주권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한하였다는 점에서 봉건적 성격을 온존시켰다.
③천황의 재위를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원호(元號)에 따라 메이지기, 다이쇼기, 쇼와기, 헤이세이기로 나눌 수 있다.
④1945년 8월 15일의 패전을 기점으로 현대가 시작된다.
근현대
메이지(明治)기―1868년-1912년.
다이쇼(大正)기―1912년-1926년.
쇼와(昭和)기―1926년-1945년--1945년-1989년.
헤이세이(平成)기―1989년-
레이와(令和)기 -2019년~현재 126대 나루히토
2. 죠몬시대
지금부터 약 1만 2천년 전 깨어진 돌을 그냥 사용하던 구석기 시대가 막을 내리고, 깨어진 돌을 갈아서 사용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색이 거무스름하고 낮은 온도에서 구워 두텁기는 하나 쉬 부서지는 토기를 사용하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토기에 새끼줄 무늬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를 죠몬(繩紋)시대라 부른다.
그들의 생활은 수렵, 어로, 채집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식량원을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며 살았다. 땅에 구멍을 파고 풀과 나뭇잎을 얹은 구덩식(수혈식) 주거를 만들어 생활했다. 크기는 평균 약 20제곱미터 4-5명의 가족이 살았고, 5-6 가족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꽤 좁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해변에서는 조개를, 산과 들에서는 멧돼지나 사슴을 잡는 수렵 채집 생활이 주를 이루었던 이 시대의 주식은 호두나 도토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죠몬 시대의 유적 분포를 보면 동일본에 집중되어 있다.
고야마 슈조는 죠몬시대 발전기 단계의 일본열도 전체 인구는 26만여 만 명이며, 그중에서 열도 서부에는 불과 2만 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추산했다. 그 이유는 동일본 쪽에 나무열매와 멧돼지나 사슴, 연어나 송어와 같은 물고기가 풍족하여 이것을 주식으로 삼는 죠몬인들이 자연 동일본쪽에 많이 살았을 것이란 설이 있다. 한반도는 일찍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사회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열도가 늦게까지 수렵, 채집 문화가 지속된 것은 죠몬 문화가 농경 단계의 한국 청동기 문화보다 풍요롭고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일본인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다음에 이루어진 야요이 문화가 수세기 동안에 도호쿠 지역까지 급속히 전파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인구는 가장 번성했던 죠몬 중기에 약 25만 명, 평균 수명은 3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죠몬 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출토품으로 토우와 동탁을 꼽을수 있다. 토우는 여자 모양이 많은데 토우는 사람을 괴롭히는 재앙을, 사람을 닮은 토우에게 전이시킨다는 설이 있다. 즉 사람을 대신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동탁은 야요이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기로 주로 긴키, 도카이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초기의 동탁은 발견된 형상으로 보아 어디다 걸어두고 소리를 내는 악기로 사용한 듯하다. 죠몬 문화는 기원전 4~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야요이 문화로 대체된다.
3. 야요이시대
기원전 3세기 경이 되면, 고도의 농사 기술이 필요한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 문화가 북부 규슈 지역에서 시작되어 전 열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는 도구도 목기와 석기 대신, 금속기로 대체되어 청동기 제품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규슈 지역에서 출토되는 반월형석도, 유단석부 등의 간석기와 민무늬토기도 한반도 남부 지역과 동일하다. 이렇게 일보열도에 초기 농경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고도의 농업 기술이 갑자기 나타났다.
야요이(彌生)시대는 조몬 시대에 비해 큰 변화를 겪는 시대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고분 시대 이전 서기 3세기까지 6백년여 년간을 말한다. 1884년 어느 날 한 소년이 도쿄 대학 부근 야요이정의 조개무지에서 이 시기 문화의 특징을 가진 토기를 발견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가장 큰 변화로 벼농사의 보급, 금속기의 전파, 조몬 토기에서 야요이 토기로의 전환, 신분계급의 발생을 들수 있다.
벼농사와 철은 죠몬 말기에 대륙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도래문화인데 , 야요이 시대에 일본 각지에 퍼져 나갔다. 벼농사에는 나무와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철기 농구를 사용하게 된다. 쌀은 야요이인의 식생활을 바꿨고, 무엇보다도 보존이 가능한 식품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식품을 비축한자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원래 평등했던 사회가 점차로 불평등한 계급사회로 변해갔다. 고상식(高床式) 창고, 철기에 의한 농구의 개량 등은 수확과 부의 축적을 촉진시키고 심한 빈부의 격차를 가져왔다. 양식의 저장이 가능해지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 집단의 구성원수도 늘어나서 농작업이나 거기에 필요한 토목공사를 통솔하는 지도자가 한 마을의 부 자체를 관리하게 되었다. 마을의 권력자는 무력으로 마을을 통솔했고 토지 분쟁이나 물 분쟁이 일어나면 이웃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빼앗기도 하고 약한 마을 사람들을 노예로 삼기도 했다.
야마타이국
야마타이국은 일종의 연합국가이다. 그 왕은 중국의 왕조에 귀속하여<왜왕>, 곧 일본의 왕이라 칭했다.
대륙에서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고(기원전 221년), 한반도에서는 고대국가 고조선이 진나라를 계승하여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와 겨루다가 멸망하기도 했다.(기원전 108년), 왜의 소국들중에 몇몇 나라는 중국에 조공하는 등 적극적으로 그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려 인정을 받음으로써 왜국 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각축했다. 중국이 위, 오, 촉으로 나뉘어져 있던 삼국시대의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야마타이국을 통치한 사람은 여왕 히미코였다. 히미코가 통치하기 이전의 왜국은 전쟁이 지속되었다. 이에 각 나라의 대표가 회의를 열어 주술적인 힘을 가진 무당 히미코를 왕으로 삼고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30여 소국의 연맹장으로서 가끔씩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 활동을 편 건을 보면 어느 정도의 정치 권력을 행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남동생이 맡아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대의 왕권은 통상 제사담당 여성과 행정담당 남성이 함께 했다고 파악된다.
여왕은 239년에 중국의 위에 사자를 파견해서 위의 황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자수와 동경100매를 하사받았다. 히미코의 사후 이요라고 부르는 여왕이 즉위하여 위와 통교했지만, 266년 위에 이어서 건국한 서진의 견사를 마지막으로 야마타이국의 소식은 끊기고 이후 약 150년간 중국사서에서 왜국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세기부터 7세기 사이는 국토가 통일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4. 야마토시대
3세기부터 7세기 사이는 국토가 통일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야마토는 나라(奈良)현의 옛 지명을 뜻하며, 여러 부족으로 난립해 있던 소국가들이 야마토 정권에 의해 통일된 데서 유래되었다.
4-5세기경 기나이, 산요, 규슈 북부에 병립했던 지역정치집단이 규합하여 야마토 정권을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왕 히미코는 중국의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야마토 조정은 한반도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여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도래를 촉진하는 등 성숙한 문화 발전 양상을 가져왔다.
초기국가 단계가 아닌, 연맹왕국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야마토 조정은 무기, 농기구의 원료인 철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문물이 倭에 대량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5세기에 들어서 야마토 조정은 본거지를 가와치로 옮겨 중국의 남조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중국 사서에는 이 시기 야마토 조정의 수장을 왜의 오왕(五王)이라 하였다. 왜의 오왕은 국내에서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이라고 칭했다. 이는 중국과 다른 별개의 천하관를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이 시기 전방후원분인 오진 천황릉과 닌토쿠 천황릉 등이 조성되었다. 그 규모로 볼 때 강력한 왕권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는 야마토 왕권 내부의 정치혼란이 있었으나, 게이타이 천황의 등장으로 야마토 조정에 의한 지배가 서서히 강화되었고, 한반도와의 교류는 크게 후퇴하였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반까지 일본 열도에 거대한 고분이 나타나기 시작 한다. 전방후원분 또는 열쇠 구멍형 고분이라 불리는 이 고분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지만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기내 지방과 남규슈의 미야자키 지방이다. 고분에는 많은 부장품이 묻혀 있는데 주변에 사람, 동물, 집, 배 등을 만든 토용이 나타난다.
일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정권이 언제쯤 성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유력한 호족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워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생각되며 문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이다.
오진 천황, 닌토쿠 천황의 능이라고 전하는 왕릉의 거대함과 정교한 공예품으로 된 수많은 부장품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고분 속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과 공통된 특징을 가진 유물이 많이 부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 속에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져서 건너간 것도 있지만 그것들을 모방하여 일본에서 제작한 것도 있다.
일본 고대역사서
일본서기 일본의 신화시대부터 지토천황시대까지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
고사기 오노 야스마로 일본천황가의 전승된 암기내용을 역사서로 기술하여 편찬한 역사서
5. 나라시대
694년 직통천황 때 아스카 땅에 당나라 장안의 도시계획을 본 딴 등원경(후지와라쿄)이 만들어졌으나 얼마 후 그 북쪽에 새로이 평성경(헤이조쿄)을 지었다. 이 평성경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발전하게 되며 이 시대를 나라시대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수도가 평성경에 있던 710년부터 784년까지를 구체적으로 나라시대라고 한다.
645년 대화개혁 이전의 수도는 유력한 호족 중 최고인 천황의 거주지 상징에 불과했으나 율령체제 이후로는 천황의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고 정치ㆍ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야했다. 나라시대에 대화왕조는 중앙집권체제에 걸 맞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새 수도의 조영, 화폐주조, 국사편찬 등의 사업을 차례로 실행했다. 또 676년 통일을 달성한 신라와도 문화적인 면에서는 극진하게 교류를 진전시켰지만 외교관계를 둘러싸고 긴장된 관계가 지속됐다.
나라시대의 문화는 최전성기인 성무천황(쇼무천황)의 연호를 따서 천평문화(텐표문화)라고 부른다. 이 문화는 수도 평성경에서 화려한 생활을 한 귀족중심의 문화이며 당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이다. 8세기 당시 동아시아는 중국은 당나라의 최전성기였으며 한국은 통일신라시대, 일본은 나라시대로 국제성이 풍부한 시대였다. 야마토왕조는 8세기에 당으로 견당사를 10차례(1년에 4차례) 보내 많은 문화를 수용했다. 나라시대는 여전히 한반도 문화의 영향도 크게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당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당문화의 귀족성, 국제성은 수도 장안의 규모와 풍물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장안성은 당제국의 귀족적 위용을 과시목적을 지밀하게 건설하여 마치 만국박람회 같은 분위기였다. 동아시아문화권이 내용상 발전을 이루어 완성을 보게 된 것도 당문화의 영향이다.
나라시대의 천평문화는 호국사상의 근간인 불교와 관계가 깊었으며 대표적인 건축은 동대사, 법화당과 정창원이 있다.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인 동대사의 대웅전과 금동의 불상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이런 대공사는 일본전국의 역량이 집중되었고 성무천황이 호족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에 호응한 전국의 호족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상당한 경제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746년부터 752년까지 6년에 걸친 대공사에는 준공식 때 중국, 인도, 한국 승려들이 1만 명이 참가했는데, 이 거대하고 화려한 행사를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즉 그만큼의 국력이 있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성무천황은 정창원도 건립했는데 정창이란 나라시대의 사원이나 관청에 있는 창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키며 그 일부를 정창원이라 불렀다. 정창원은 삼각형의 각재를 짜 올려서 지은 교창양식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그리고 정창원에서 신라 8세기 중엽 경(신라 경덕왕 14년, 755년)에 작성된 서원경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어 신라시대 백성의 생활상과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동대사의 보물은 궁중이나 귀족들이 기증한 물건도 수납되어 있다. 무기류ㆍ문방구ㆍ악기ㆍ유희품ㆍ복식품 등 당시 최고품 뿐 아니라 문서류, 의약품도 보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나라시대 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귀중한 세계의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출중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시대의 역사와 문예는 다음과 같다. 우선 역사서에는『고사기』와『일본서기』가 있으며 672년 천무천황이 임신의 난을 일으킨 후 백제세력을 추출하고 천황이 되자 국사를 개편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와 천황제 확립을 위해 편찬케 한 것이다.『일본서기』를 계승하여 편찬된『육국사』는『속일본후기』『일본후기』『속일본기』『문덕실록』『삼대실록』을 의미한다. 지지는『출운풍토기』등 5개의 풍토기가 현존하고 있다.『풍토기』는 713년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제국에서 만든 지명의 전설, 산물 등 기록을 편찬한 관찬의 지방지이다.『풍토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로서『고사기』『일본서기』와 함께 일본고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예로서는『만엽집』과 회풍조가 있는데 최고의 한시집이다. 특히 문학면에서는 일본 특유의 시가형식인 화가를 집대성한『만엽집』20권이 8세기 중엽에 편찬되었다. 내용은 인덕천황부터 시작하여 759년까지의 장가, 단가, 선두가, 4516개의 시가가 수록되었고 작자는 위로는 천황과 황족, 아래로는 무명의 농민, 무사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망라하였다. 향찰이 번창하던 때, 일본은 천무천황 시대로 시인가객들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순 우리말을 한문으로 편찬한 시가 만엽집의 노래형식이 우리의 전통 노래형식과 많이 비슷하다. 만요가나라는 독특한 표기법 사용했으며 이는 고사기에서 사용된 한문사용을 나타내준다.
나라시대에서 한국고대문화는 여러 문화에 지대한 영향뿐만 아니라 어문학 분야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한문의 전파 이래로 귀족들 사이에서 중국의 한시 제작능력자가 대기출현하였으며 오랫동안 구전에만 의존했던 일본전통문예가 문자문학으로 정착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한 셈이다. 『만엽집』에는 한국을 금과 은이 많은 보물의 나라, 빛깔이 아름다운 한국의 옷이나 비단 등 한국을 우러러보는 시각과 표현이 많으나 『일본서기』에는 야만인이란 표현이 이때부터 종종 나타나 일본의 국가의식이 생성되기 시작되었다고 본다.
6. 헤이안시대
나라시대는 794년 환무천황이 경도 분지에 새로운 평안궁을 건설하면서 끝난다. 나라시대 후반에 이르자 귀족이나 사원에서는 토지를 개발하고 사유지를 넓힘으로써 공지공민제를 기반으로 한 율령제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794년 평안경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부터 원뢰조(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겸창막부(가마쿠라)를 열 때까지 정치문화의 중심이 평안경에 있었던 약 400년 동안을 평안시대라고 한다. 조정은 이 시기부터 에도시대가 끝날 때까지 약 1100년간 경도에 머물렀다.
『신찬성씨록』에는 경도 주변의 명문가 천명 중 삼분의 일이 도래계의 자손인 것으로 쓰여있다. 도래계 씨족 중에는 신라계의 진씨와 가야계의 한씨, 그리고 고구려계의 고려씨가 대표적인 씨족이었다. 진씨는 씨족적 결속력이 강하여 인구면에서 고대호족 중 가장 컸다. 한씨는 진씨에 비해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씨족 중에 이성이 많았던 호족이다. 한반도로부터 도래의 물결은 평안시대에도 계속되었으나 도래인을 동북지방 등 미개지로 보내어 지는 등 차별대우가 시작되어진다. 끝내는 도래인의 입국을 막고 심지어는 추방당하는 일로 번져 외부와의 차단으로 인한 국풍문화의 전파를 더욱 촉진시켰다.
국풍문화는 10세기 이후 12세기 무렵까지의 문화로서 등원문화(후지와라)라고도 한다. 대륙문화의 영향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일본적인 문화가 일어나게 되어 이를 국풍문화 또는 등원문화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일본풍 문화를 성립시켰다. 국풍문화는 나라, 평안문화에 비해 역동성은 떨어지나 우아하고 부드럽다. 미적인 감각에서 특징이 있는 문화였다. 이 시대에는 ‘가나문자’를 만들어 일본인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국문학이 융성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리는 대화회(야마토에)(일본전통그림)가 발달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가나문학의 작품은 9세기 말에서 10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인정되는 『죽취물어』(타케토리모노가타리)는 동화처럼 재미있는 가운데 귀족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 깃들어 있다. 일본의 산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은 11세기 초에 자식부가 쓴 장편『원씨물어』(겐지모노가타리)이다. 문학 외에도 나라와 평안시대에는 서도와 회화도 많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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