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가 사상가 문장가 백탑파 이용후생론의 연암 박지원
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최근 남양주시 실학박물관을 다녀온후 깨달음을 얻어 실학가이자 문장가인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해 포스팅해도록 하겠습니다
열하일기 서평
1.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
충남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수택본은 총 26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 근래 번역본들은 그의 일행들이 연경과 열하를 두루 거쳐 온 과정을 기록한 도강록(권1), 성경잡지(권2), 일신수필(권3), 관내정사(권4), 막북행정록(권5), 태학유관록(권6), 환연도중록(권8)이 현대인의 합리적인 표기에 따라 정리되어 있었다.
연암(燕巖: 황해도 금천)이라는 호를 쓰고 있는 박지원(1737-1805)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문필가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보면 그가 왜 당시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에 학문적인 정열을 불태웠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집안 어른들의 청렴함과 부친의 벼슬길이 막힌 연유로 어릴 때는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전주 이씨 가문의 연인과 결혼을 하면서 그녀의 장인과 처숙부를 통해 비로소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과거 응시에 낙방하고, 그 당시 조선의 썩은 악습과 세도가들의 권력적 횡포는 검은 돈의 은밀한 유통과 출세를 위한 아부로 사회에 정의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때여서 벼슬에 대한 의지 역시 툴툴 털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박지원의 학문적 사상의 중심이 되는 이용후생(利用厚生: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함)이 그의 북학사상과 서학에 몰두하게 한 이유가 말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치부하여 북벌론이 대두하는 풍조였으나, 연암은 청일지언정 그 문화와 문명에서 조선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받아들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북학사상(北學思想)이다.
그는 또한 서양 세계의 자연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이해도 깊이가 있었지만, 부의 올바른 균형과 배분을 위해 토지개혁법을 주장했으며 조선의 악습 중 반상의 질서와 규범을 폐지하며, 근래에 새롭게 싹트고 있는 기업가 정신을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고귀한 태도로 믿고 있었다.
실학박물관-박지원
연암 박지원 일행은 1780년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 한양으로부터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 성경, 거류하, 산해관, 연경(북경)을 지나 열하에 이르는 약 2개월간의 대장정을 이루어냈다. 중국 일대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관찰하는 연암의 눈과 통찰력은 실로 대단했다. 무엇하나 거저 지나치는 법 없이 눈에 보여지는 문물에 담겨진 특성과 사용법 그리고 그 깊은 의미에 이르기까지 자기 나라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원리를 찾고 기록해 나갔다. 이 방대한 일기를 그때그때 쓰기도 했겠지만, 여의치 않을 땐 숙소에 도착해서 기록했을 텐데. 여행에 지친 몸을 찾고 부르는 일행과 대신들의 회합이 있어 피곤이 가중되었을 테고, 게다가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토론과 문예(文藝)를 그치지 않는 그의 성품을 고려하면 더더욱 이 많은 양의 기록을 남기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실학박물관-
열하는 지금의 승덕(청떠)으로 청나라 황제의 여름 피서산장이 있었던 곳이다. 청나라는 이런 피서의 문화가 있었기에 오히려 북경 안쪽 끝으로 들어가야하는 노곤함을 사신들에게 안겨주었다.
연암은 중국의 거대한 문명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온돌과 굴뚝의 합리적인 제작법에서부터 기와를 만들고 올리는 중국의 섬세한 기술들을 섬세한 연구로 꼼꼼히 적었다. 또한 백성들의 사업의 편리함과 군사력의 효과적인 증진을 위해 말을 길러 튼실한 종자를 보급하는 방법과 수레바퀴 구조의 과학적이며 효율적인 대안을 상세히 적었다. 이러한 용도들이 어찌 한번 눈으로 본다고 해서 온전히 터득해질 일이던가. 그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물어보고, 혹 기억에서 사라질까 예를 갖추어 가며 재차 부탁한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
조선으로 귀국한 연암은 3년여의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를 수정 보완하여 조선 사회에 내 놓았다. 신분의 귀천과 양반들의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호쾌하고 자연스런 문체와 당시 청을 오랑캐로 부르던 사회 분위기에서, 그 나라의 문물을 높이 평가했던 열하일기는 사대부 계층에서 극과 극의 반대되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진보적인 성향으로 실용주의에 문제를 제기한 이들로 인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일어나기도 했다는데. 민족의 정신과 미래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공존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그 슬픈 시대를 홀로 끌어안고 살아간 외로운 선각자.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 역시 그러한 연암의 정신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자기 아닌 남이 되어 자기를 보아야만 비로소 자기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성인은 이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고도 아무런 고민이 없었으며 외롭게 서 있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정양문을 지나 어느 누(樓)에서 읊은 박지원의 탄식. )”
2. 연암 박지원의 어록과 사상
연암 박지원은 실학가이자 사상가, 열하일기의 집필자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실은 그전에 대단히 뛰어난 이름난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더 뛰어나다. 연암집에서도 살필수 있고 대표적으로 예덕선생전과 양반전에서 그의 생각와 사상, 허례허식등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인간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란 물과 언덕과 같은 법.
그러므로 길이란 다른데서 찾을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네. 사이에서 사유하기. 이것과 저것. 두 양변을 고정시키는 의미망자체를 의심하고 전복하는 사유. 즉 양변에 끄달리지 않고 둘 다를 벗어나 제3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것.
-아!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이용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이 될 것이다.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이 될 것이다.
그 ‘쓰임을 이롭게(이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후생)’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또 생활이 넉넉지 못하면 이제’덕을 바르게 펼(정덕)‘수 있겠는가.
실학박물관-박지원
-중국의 성곽과 궁실과 인민들이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있고 정덕, 이용, 후생의 도구도 예전과 다름이 없다.
하,은,주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 당, 송, 명의 아름다운 법률제도 또한 변함없이 남아있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수용하며 본받아야 한다.
더구나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과 한, 당, 송, 명 등 여러 나라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옛것임에랴.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때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데 분개하며 중화의 훌륭한 문물제도까지 물리치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만약 정말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싶다면 중화의 전해오는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습속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나는 비록 삼류 선비지만 감히 말하리라. 중국의 장관은 저 기와조각에 있고 저 똥 덩어리에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깨진 기와조각은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담장 어깨 위로 깨진 기왓장을 두 장씩 마주 붙여 놓으면 물결무늬를 이룬다. 네 쪽이 안으로 합하면 동그라미 무늬가 되기도 하고, 밖으로 등을 대어 붙이면 엽전의 구멍모양을 이루기도 한다. 기와조각들이 서로 맞물려 알쏭달쏭 뚫린 구멍들이 안팎으로 마주 비치면서 영롱하게 어우러지니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가 여기에 다 갖추어진 셈이다. 똥오줌이란 천하에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을 거름으로 쓸 때는 마치 금싸라기인양 귀하게 여긴다. 길에는 부스러기 하나 버려진 것이 없고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둘러메고 조심스레 말꼬리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모은 똥을 네모반듯하게 혹은 팔각송으로 혹은 육각형으로 혹은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으로 만들고 보니 천하의 제도가 다 여기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
-호곡장- 멋진 웃음터로구나 크게 한번 울어볼 만하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하겠나?’
‘그건 갓난아이에게 물어봐야 될 거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보고 발도 펴보니 마음이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경을 보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 자신이 위태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오. 소경의 눈에는 위태로운 내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뭐가 위태롭다 말이오.
-내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명심(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잘 달아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요술의 수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향원(겸손하고 삼가는 체하지만 속으로 그렇지 않은 위선적인 사람)이면서도 덕행이 있는 체 하는 것일 겁니다. 웃음 속에 칼이 있는 것이 아까 요술쟁이가 입속으로 칼을 삼키는 것보다 더 잔인하지 않을까요?
-소경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도로 눈을 감아야 하듯 우리 또한 보고 듣는 것에만 의존하는 분별을 멈춰야 생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연암은 위의 내용과 함께 그는 5가지 망령된 행동을 말하고 있다.
1. 양반이라고 뽐내며 청조 지배하의 한족을 경시하는 태도.
2. 한 줌도 안 되는 상투로, 중국인의 변발과 의복제도를 멸시하는 태도.
3. 명나라 시절 취했던 극도의 사대적 행동과는 달리 청나라 관리들에게 오만무례하게 대하는 태도.
4. 중국의 찌꺼기 문장을 학습한 주제에 청나라에는 좋은 문장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태도.
5. 한인들이 청 황제에게 반역으로 몰릴까 근신하는 모습을 두고 춘추의리를 모른다고 탄식하는 태도.
등을 기술함으로써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옳지 않은 태도를 지적했다. 위와 같은 생각이 북학사상을 계승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박지원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이서구등과 서울 백탑인근에서 어울린다하여 백탑파라 불리었는데 그런 교류도 많았겠지만 실항의 전개부분에서 서로 영향을 준 부분이 적지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실학의 전개는 경세치용파, 이용후생파, 실사구시파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형원의 역작인 반계수록에서의 변법적 국가개혁론과 서수록후등에서 실학의 싹트임을 찾아볼수 있으며 양득중이 영조에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말하며 반계수록의 책을 추천하였다. 대부분 그래서 유형원을 실학의 비조로 보는 시각이 많다.
3. 중국을 향하는 연행길의 역사
'연행燕行'이란 조선시대 국가의 외교사절로 중국 정부를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명나라 때까지는 천조天朝인 중국의 황제를 배알한다는 뜻으로 '조천朝天'이라 하였으나,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운 뒤에는 청의 수도인 연경(현재의 북경)을 다녀온다는 뜻으로 '연행'이라 한 것이다. 병자호란(1637년)이후 조선말까지 약 250년간 700회 이상의 사절단이 청나라를 다녀오게 된다.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행은 절행(節行)이라 한다. 정조사正朝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나중에 세폐사歲幣使로 바뀜) 등으로 매년 10월말이나 11월 초순에 출발하여 12월중에 연경에 도착하고 약 2달간 머무른 뒤 2월에 출발하여 3월말이나 4월초에 귀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사행은 비슷한 시기에 중복되는 폐단이 있었으므로 1645년 (인조23년)부터는 통합되어 운영되게 된다. 1790년 연행을 다녀온 서호수의 '연행기'에 따르면 순치 을유년(1645년)에 칙유로 정조사, 동지사, 성절사, 세폐사를 합하여 한번에 가게 되었는데 명칭은 동지사이고 매년 한번씩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정기연행 외에도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파견되는 임시사행이 있었는데 1780년 (정조4년) 연암이 다녀온 연행길도 청나라 고종(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떠나는 진하사進賀使라는 임시연행이었다.
실학박물관-
별행(別行)이라고도 하는 임시사행에는 중국의 대조선 정책이나 외교적 처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사은사(謝恩使),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거나 청원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즉위나 칠순ㆍ팔순, 황자(皇子)의 탄생 등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進賀使), 황제를 비롯한 황실에 상이 났을 때 가는 진위사(進慰使), 국장(國葬)에 분향하는 진향사(進香使), 중국이 조선에 대해 오해하고 있거나 역사서를 비롯한 공식문서에 조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기재한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변무사(辨誣使), 중국 황실에 정변이 있거나 황제가 요동 지역을 순행할 때 가는 문안사(問安使), 조선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가 있었다.
연행사절의 규모는 정해져 있지가 않은 듯한데 여러 연행기록으로 짐작해 보면 정3품이상 당상관인 정사와 부사, 총지휘관격의 서장관, 역관 3인, 공물과 물자를 관리하는 압물관 24명 등 30명의 공식사절과 마부, 하인들을 합쳐 인원 250명에 말 200필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또한 비공식 사절로 역관, 의원, 화원, 사자관, 군관 등도 참여하게 되는데 특히, 자제군관이라 하여 정사나 부사의 자제나 친지를 사절단에 수행하게 하였다. 연암의 경우에도 정사인 박명원이 삼종형이었므로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연행사절에 참가하게 된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주요 사행인물로는 부사 정원시, 서장관 조정진, 수석역관 홍명복, 의원 변계함, 상방비장 노이점 정각 박래원 주명신, 하인 득룡 장복 창대 시대 등이다.
이 연행에 대하여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라는 이유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와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생존을 위한 고육책이었다 할 것이다. 물론 사림파의 집권 이후 실용외교에서 출발한 사대가 정권의 안보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명분론으로 변질되는 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연행을 통해 경제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게 되는데, 주로 역관들을 통해 대규모 국제 상거래가 이루어지게 되고, 연행사 중 당대의 지식인들은 같은 한문문화권이었으므로 필담(筆談)을 통해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학문적 지평을 넓히게 된다. 이 지적 한중교류사의 시작은 담헌 홍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765년 중국에 연행하게 된 담헌은 북경에서 당대 석학인 엄성, 육비, 반정균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하고 우정을 나누게 되는데 이것이 선례가 되어 이후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북학파 여러 학자들이 연행길에 중국석학들과 교유하게 된다.
연행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막부 바쿠후를 향했던 통신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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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류는 이후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으로 이어지게 되고 '세한도'(歲寒圖)를 탄생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문학적 측면에서는 연행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여행기를 지으면서 방대한 연행록 문학이 형성되게 된다.
현재 약 407종이 넘는 연행록이 남아 전하는 데 그 중 노가재 김창업의 '노가재 연행일기', 담헌 홍대용의 '담헌연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3대 연행록으로 친다. 이것은 1832년 씌어진 김경선의 '연원직지'라는 책에서 위 3권을 '삼가(三家)'의 연행록으로 꼽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김경선은 이 삼가의 연행록을 역사기술의 예에 빗대어 '연행일기'는 편년체(編年體)에 가까워 순하고 착실하며 조리가 분명하고, '담헌연기'는 기사체(記事體)를 따랐는데 전아하고 치밀하며, '열하일기'는 전기체(傳記體)와 같은데 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해박하다고 적절한 평을 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삼가의 연행록 중에서 연암의 '열하일기'에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열하일기'가 '연행일기'와 '담헌연기' 서술방식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창안하였고, 깊은 성찰과 독창적인 사유방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일화와 여행의 흥미로운 장면을 핍진한 묘사와 탁월한 문장력으로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입문으로는 돌베개가 출판한 김혈조선생이 엮은 열하일기전집 1,2,3권으로 엮여진 책을 추천합니다
너무 책 내용이 방대해 읽기조차 힘들거 같다면 역시 돌베개가 출판한 박수밀씨가 쓴 열하일기 첫걸음을 추천합니다
이 두 책이 제일 일반적으로 열하일기를 접하는데 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이라는 21세기북스 구범진씨가 펴낸 책도 새로운 시각에서 읽어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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