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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몽양 여운형 평전을 읽고 여운형의 생애를 살펴보다

Gloomy@ 2024. 11. 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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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몽양 여운형 평전 서평독후감포스팅합니다

출처-포털 여운형평전 리뷰

서평독후감 몽양 여운형 평전

 

-여운형의 생애

 

몽양 여운형은 1886년 출생하여 1947년 사망하였다

본관은 함양이며 경기도 양평출신이다. 어머니가 태양을 품는 꿈을 태몽으로 해서 아호를 몽양으로 정했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홍화학교로 전학, 우무학당으로 또 전학했으나 항일운동을 시작하며 졸업1개월전에 그만두었다. 이 시기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해 아내도 사망하고 몇 년뒤 어머니도 사망하고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녔던 홍화학교의 설립자 민영환도 을사늑약으로 자결을 선택하고 또 아버지도 사망하여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후 개신교와 YMCA등 활동을 하고 이후 중국유학을 떠나 난징의 금릉대학이나 남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신한청년당을 구성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 시기부터 전격적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게 된다.

임시정부에서 의정원의원, 외무부차장을 맡고 일본을 방문하였고 이후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몽골과 소련등을 방문하고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기도 했다. 이후 쑨원과 마오쩌둥, 호찌민등도 만나고 왕징웨이등과 교류하였으나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 조선으로 압송되어 3년형의 감옥살이를 하였다.

석방뒤 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이순신장군 묘소를 정돈하는 사업등을 추진하는 활동도 하였으나 손기정선수 일장기사건으로 중앙일보가 폐간되었다.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일본패망을 확신하고 귀국하여 1944년 조선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고 결성하였다. 일본패망이 확실시되자 일본총독부와 엔도총감은 여운형에게 일본철수의 교섭을 부탁하였고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조선인민공화공을 선포했으나 미군정이 무시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여운형의 정치적입지는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이후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모스크바3상회의결과에 따라 반탁과 찬탁사이에서 찬탁노선을 취했으며 좌우합작운동을 펼쳐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였다. 사회노동당을 창당하고 북한을 5번이나 방문하는등 노력을 기울여 좌우합작운동을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외면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여파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양평에 은거하였으나 몇개월후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려던 차 1947년 7월 종로구 혜화동에서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여운형의 묘소는 강북구 우이동 솔밭공원역 옆에 위치해있으며 경기도 양평에 몽양기념관이 있다.

 

1. 몽양 여운형의 시대적 상황

 

몽양 여운형은 1886년에 태어나 조선 근현대사에서 망국-식민-분단의 시작이라는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무렵의 조선의 형편은 극도로 어수선했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난 직후로서 구한말의 환경이었다.

조선왕조는 노쇠할 대로 노쇠했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조선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고 조선왕조는 근대에 이르러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세계정세를 파악하지 못했고, 대처할 준비도 능력도 없었다. 더욱이 친일, 친청, 친로 식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 발발과 더불어 갑오경장(1894)과 같은 특효처방을 발동해보았지만 을사늑약(1905)의 결과로 찾아왔다.

여운형은 그런 처지 속에서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선두에서 싸우고자 하였으며, 8.15해방이 되자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어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이후 김규식과 더불어 좌우합작 건국운동을 전개하고 좌측 위원장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하게 되었다.

 

2. 여운형의 활동

 

한일병합(한일합방)을 시작으로 식민통치, 민족분단으로 이어진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는 지금까지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상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친일 청산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안고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후 일제 잔재들을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한 과오로 친일반민족 세력들이 다시 득세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우리의 역사는 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변질되어버렸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넘어서서 민족의 자긍심에 타격을 주었고,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반민족세력들의 손에서 우리 역사는 한(恨) 많은 패배주의 역사로 기록되어왔다. 그러나 침략전쟁을 받지 않은 민족과 국가가 얼마나 있었을까. 한 나라의 역사를 평가할 때 중요하게 짚어야할 점은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의의 침략 앞에서 얼마나 지혜롭고 당당히 맞섰는가'이다.

따라서 침략에 항거하여 민족에 헌신한 지도자들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그 민족의 자긍심과 우수성을 높이는데 절실한 작업이다. 바로 '여운형평전'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여운형의 활동 시기는 크게 상해 망명기, 투옥 후 국내 활동기, 해방 직후 과도기로 나눌 수 있다.

중국 상해로 망명한 여운형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한다. 1919년 1월 세계1차대전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한 것이 바로 신한청년당이다. 또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국내외에서 3·1만세운동을 추동 거사케 한 중심세력으로 신한청년당을 지목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실들을 비추어볼 때 신한청년당 대표와 상해 거류민단장을 역임한 여운형의 활동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상해시절 여운형이라는 이름을 해외에 널리 떨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1919년 11월 동경에서 일본 정객들과 벌인 담판이다. 상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여운형을 회유해 볼 속셈으로 일본 정치가들은 그를 초청한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행을 택한 여운형은 적의 심장부에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일거에 제압한다. 당시 일본이 제시한 자치운동을 반대하고 자주독립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함으로써 그를 회유하려던 일본 정객들을 역으로 설득하고 돌아온 것이다.

여운형을 동경으로 불러들인 일본 척식장관 고가는 회담과정에서 몽양의 인품과 견식과 신념에 감화되어 작별에 임하여서는 몽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서 태어났으면 나도 그대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총독부에 불을 질렀겠다. 내 계책이 성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대에게 가장 깊은 경의를 표한다."

 

고가는 여운형이 동경을 떠날 때는 직접 나와서 "여운형 만세!"까지 불렀다고 한다.

1929년 일제에 체포된 여운형은 3년을 복역한 후 조선중앙일보사장, 조선체육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일제 통치 말기 침략자들은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강제 징용·징병 등 대대적인 민족 말살 정책을 편다. 이때 일제로부터 강연과 원고를 강요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친일 협력 인사로 변절하거나, 아예 두문불출하며 은둔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시대상황상 여운형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시각이 아직도 존재한다.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기정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과연 그가 본심으로 그랬을까?

손기정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때 조선중앙일보사장이자 조선체육회의 회장이었던 여운형은 조선일보 호외를 발행하여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했고 이 손기정일장기삭제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까지 당했던 일화가 있다.

그 어떤 친일파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경찰에게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을까.

결과적으로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어 복권되어 어느정도의 역사적평가가 끝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운형에 대한 그런 시각 자체가 안타깝다.

 

차라리 중국이나 미주지역에 거주했다면 최소한 일제의 탄압이나 회유는 면할 수 있어 소신을 지키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민족지도자들을 이용해 청년들을 일제에 협력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단순한 탄압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민족지도자들을 변절시킴으로서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케 하고, 자기 민족에 대한 혐오감마저 조장함으로서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속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운형은 일제에 협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들을 피해 은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정확한 시대통찰력으로 건국동맹, 농민동맹 등 지하조직을 결성해 해방 후를 대비했다. 이는 세계 정세 판단과 일본패망에 대한 확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일제에게 치안을 넘겨받아 미군정이 수립될 때까지 건국준비위원회를 운영하며 치안유지와 과도 임시정부 구축에 온 힘을 쏟는다. 그의 노력 덕택에 해방 직후 무정부상태의 혼란에서 우리 민족은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구성하려는 여운형의 자주적인 노력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편향된 극우, 극좌 세력들은 여운형의 중립적 자주노선을 기회주의로 매도하기 일쑤였다.

 

여운형에 대해 당시 주한미국대사 랭던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이 가급적 빨리 한국에서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라고 평해 그의 정치 노선에 대한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있다.

해방 후 여운형은 수 차례 테러를 견뎌냈지만 결국 1947년 7월 19일 친일반민족세력들의 사주를 받은 괴한들에 의해 62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만일 반민족행위자들이 하등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사회라면 역사에 대해 누구도 경외감을 갖지 않을 것이며 사회적 정의는 실천되기 어려울 것이다.

여운형은 정적(政敵)들마저 탄복하게 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정치적으로는 편향된 시각을 경계하고 자주적인 노선을 고수한 사람이다. 여운형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을 올바르게 평가한다는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사회적 정의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3. 마무리

 

『 내가 이번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외 식자들을 만나 조선 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당국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중략)...

3월 1일에는 내지에서 독립운동이 돌발하여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곧 대한민족이 전부 각성하였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게는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인가!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다는 것은 한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새벽에 어느 집에서 닭이 울면 이웃집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된 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다. ...(하락)... 』

 

1919년 11월 27일 몽양 여운형은 동경(도쿄) 제국호텔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피식민 국가의 지도자가 제국주의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 가서 피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외쳤다. 아무리 일본이 신변보장의 약속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누가 이렇게 적지에 뛰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여운형은 아울러 많은 어록도 남겼다.

 

정무총감 미즈노: 그대는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느냐?

몽양: 그대는 조선을 통치할 자신이 있는가?

 

-고마신사 방명록에 친필을 남기며-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데 주인의 심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번째 테러 후-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

 

-오늘날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남더러 이리 가라 저리가라 손가락질만 하고 있어. 그나마 그릇된 방향으로 마치 수탉이 세차게 싸우노라 돌진해 나가다가 서로 방향 감각을 잃고 저만치 빗나가버리는 것과 같거든.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 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미군정이 방북을 반대하자- 내 집 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웬 상관이냐.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의 지하 운동 시대를 생각해 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딪힌 후에 "너는 누구냐?"고 묻고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말하며 껴안고 어쩔 줄을 모르던 혁명 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몽양 여운형은 우리 나라에서, 대한민국에서 특이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다.

아니, 지극히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특이하게 보이는 것이다. 몽양은 1929년 일제에 붙잡혀 3년형 선고를 받은 후로부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고급 관리들과도 친분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타협적이기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제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무총감(총독부 제 2인자) 등이 찾아와 대외 정세 등 그의 정치적 견해를 물으러 그를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패망 직후 여운형을 찾아 치안 유지에 대해 그와 면담을 했던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몽양을 좌파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몽양은 중도적 인물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자주적인 독립과 통일 정부 수립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우익에서는 그를 '빨갱이'라 밀어붙였던 것이었고, 좌익에서는 그에게 '기회주의자'라 비난하였던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좌우합작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찬탁과 반탁운동사이에서 찬탁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친소련, 공산주의자, 빨갱이등으로 오해받은 여운형은 결국 정치적테러의 희생양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가 온전히 좌익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대화와 일화에서 언급된다.

이임수: 여 선생, 조심해야죠. 헌병이 길거리에 득실거리잖우.

왜 좌익만 만나는거요?

몽양: 해방이 됐다고 좋다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어찌 내쫓겠소?

해방된 이 마당에 좌익 우익이 어디 있소. 양심적인 사람이면 다 손잡아야지.

남관(이임수의 호)도 우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내시오.

내 얼마든지 만나주고 같이 일하리라.

 

기자: 사람들이 당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본인의 소감은?

몽양: 당신들은 중국의 손문을 아는가?

기자: 안다.

몽양: 손문이 공산주의자인가?

기자: 아니다.

몽양: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손문은 당시 외래 침략세력에 짓밟혀 있는 중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연로(連露) 용공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한국은 현재 두 사람의 외국손님이 안방과 사랑방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해방자요 요인인 것이다.

미국을 끼고 소련을 나쁘다, 소련을 끼고 미국은 나쁘다고 말한다면 되겠는가?

고마운 두 손님을 잘 모시다가 하루바삐 두 손님은 모셔 보내고 우리 손으로 우리 살림을 꾸려나가야 한다.

내가 소련에 대해서 말하면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고, 내가 미국사람과 말했다 하면 소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친미주의자니 우익이니 말한다.

우리는 두 손님의 좋은 의견을 적절히 받아들여 5천년 연면히 이어 내려온 아름다운 강산에 이상적인 신생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다.

 

『 몽양이 비명에 숨졌을 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말과 행동을 조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몽양이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 미국과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적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 랭던 공사)』

 

몽양 여운형이 쓰러지고서도 75년..

조선은 독립했으나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어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국가를 이루고 계속 발전해온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분단국가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아직도 좌우익대립같이 보이는 정치행태를 보이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정치인은 좌익, 우익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양 진영을 다 포용할 수 있는 몽양 같은 정치인인 것이다.

 

* 참고문헌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93

몽양 여운형의 평전을 쓴 이기형씨는 시인으로 여운형의 제자였으며 여운형의 비서를 지냈다. 여운형의 6촌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여운형이 직접 주례를 섰다. 이후 월북하여 투옥되기도 했고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처벌도 받았다. 이후 국가보안법폐지와 이라크파병반대운동등에 참여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 고문, 민족예술인총연맹 고문들을 지냈다. 시집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으며 2013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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