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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포석정에서 살해당한 비운의 왕 신라 경애왕릉과 배동 삼릉과 삼릉솔숲 방문후기

Gloomy@ 2024. 10.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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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루미입니다

오늘은 경주여행 경주역사여행 중 신라가 멸망당한거나 마찬가지였던 사건의 장소 포석정과 견훤의 신라 도읍왕성 경주침입후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사자였던 경애왕릉과 옆에 있던 배동 삼릉을 방문해봤습니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소나무외에는 볼거리도 없거니와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애왕릉과 누구의 왕릉인지도 확실히 않은 배동 삼릉은 소나무 그득한 피톤치드 산책로로서가 아니면 방문객이 별로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신라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새기고자 경애왕릉과 배동 삼릉을 찾아봤습니다 

경주 배리 삼릉으로 불렸던 배동 삼릉과 경주 경애왕릉 위치와 주소는 경주시 배동 산73-1입니다 붙어있기 때문에 거의 주소가 동일해보이는 듯하구요 경주 남산 기슭아래 삼릉숲과 삼릉탐방센터로 남산 오르는길 옆에 있습니다 

입장료도 없고 주차장도 없습니다 근처에도 주차가 마땅한 곳이 없구요

대중교통으로는 경주버스 505번, 507번 500번 506번 508번 버스를 타고 삼릉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앞입니다

위쪽으로는 근처에 포석정과 지마왕릉이 있고 아래로는 5km쯤 떨어져서 경주맛집으로 유명한 용산회식당이 있습니다 

형산강팔경이라는 삼릉솔숲입니다 소나무가 많은 대한민국에서도 특히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숲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합니다 안강형 소나무로 요새 인스타나 사진포인트로 삼릉솔숲의 자연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사진찍으로 출사오는 분들도 많다고 하네요 경주 남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옆이기도 하구요

배동 삼릉은 사적 219호로 신라 8대왕 아달라왕릉과 신라53대왕 신덕왕, 54대왕 경명왕왕으로 전해져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경주의 왕릉중에서 출처가 확실한 왕릉은 7기뿐으로 나머지는 아닐수도 있다는 거구요

특히 신라의 왕 3명이 거의 나란히 왕릉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 세명의 무덤일지는 지켜봐야할거 같습니다

아무튼간에 그렇게 알고 가는거지요 뭐...1871년 고종에 배동 삼릉에 묘비가 세워지기도 해서 그대로 전승을 그냥 따르는거 같습니다 

형산강팔경으로는 영일대, 포항운하, 부조정, 양동마을, 보문호 물너울교, 금장대, 월정교, 삼릉솔숲을 꼽는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형산8경에서 보문호 물너울교와 월정교, 삼릉솔숲을 다녀왔습니다

양동마을 민속마을도 가보고 싶었는데 동선과 시간상 이번 여행에서는 무리였네요 

배동 삼릉입구 아래쪽에 무심한 듯이 표지한 하나로 경애왕릉이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없으면 진짜 왕릉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판입니다

대릉원일대의 대형 고분군이나 다른 거대한 고분무덤과 무열왕릉에 비해서도 정말 좀 대우가 다르달까 형편이 없달까...

수도를 내주고 형편없이 사로잡혀 자살을 강요당해 살해당한 왕의 비운의 대접이 이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애왕릉은 사적222호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경애왕릉에 홀로 향해봅니다

경주 대릉원이나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에 가득가득했던 외국인들과 경주여행객들이 아무도 없는 이 현상을 곱씹어봅니다 경애왕은 삼국사기에 이르면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해목령은 이 경애왕릉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해목령 근처에 있는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게 누구 무덤인지도 잘 모르고 그렇겠거니 보는 것도 좀 문제는 있다고봐요 

삼릉계곡 입구 삼릉솔숲으로 지나가는 소나무들이 진짜 기이하고 특이한 자연적 분위기를 전해주기는 합니다 

그래도 경애왕릉으로 가는 길에 소나무가 좀 많이 깔려있어서 왕릉은 왕릉인가라는 생각도 들기는 했습니다 

신라 경주 경애왕릉 안내문입니다

경애왕은 신라 55대왕으로 출생년은 알려져있지 않고 927년에 사망했으며 이름은 박위응으로 신덕왕의 둘째아들이고 경명왕의 동생입니다 경명왕이 죽은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어려 대신 즉위하였으며 재위기간은 924년부터 927년까지입니다. 후삼국시대의 약해져만 가는 신라의 위기를 고려 왕건과의 동맹으로 돌파해보려 했으나 그로 인해 후백제의 견훤이 927년 신라에 직접 침입해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잡아 욕보인후 자살케하고 왕비와 궁녀들도 욕보였으며 실컷 약탈하여 돌아가는 길에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김부에게 왕위를 주어 경순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도성까지 마음대로 침입하여 능욕당할 정도로 이미 신라는 망한거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점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거의 망한 나라를 점령하는게 의미가 없었던데다가 고려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면 언제든지 다시 와서 정리할수 있었기 때문인데다가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기전에 신라 귀족들과 백성들이 고려로 떠나는것을 어느정도 방지하자고 함이었으나 뒤를 이은 경순왕 김부가 8년후인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 왕건에 항복합니다 

 

경애왕은 생년월일이 밝혀져있지 않을만큼 기록이 없어졌고 그저 포석정에서 제사 지내고 연회를 즐기다 견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협박으로 인해 살해된거나 마찬가지니만큼 경애왕의 기록은 많지 않고 황룡사에 백좌경설을 설치하 선승을 대접한 일을 백좌통설선교라 부르는 일이 남아있고 포석정에서 술마시며 놀다 지었다는 번화곡이 전해집니다

경애왕에게는 장남인 금성대군 박교순과 계림대군 박순현이 있었으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각각 울산 박씨와 계림 박씨의 시조가 됩니다 

이런 역사가 아니면 쾌청해보이는 소나무숲가운데 왕의 무덤일수가 있었으나 역사를 알고오니 이렇게 애잔할수도 없는 파란하늘 아래서의 경애왕릉입니다 왕릉과 소나무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구요 

보다보니 산책하러 오신 분들이 몇분 지나가기는 하셨습니다 

확실히 소나무군락들이 너무 멋있네요 

천년 왕조의 마무리가 이렇게 쓸쓸하고 공허할데 없으니 역사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영원한 것은 당연히 없고 마무리가 안좋을때는 나라와 후손, 역사에까지 뒤이어 전해질거라는게 좀 기분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왕릉으로 이렇게 남아 보존하고 있으니 그래도 로얄패밀리 왕족의 힘은 대단한거겠죠

배동 삼릉도 별다를거 없이 무덤 3기 붙은거 외엔 전혀 볼게 없었습니다 

역사공부가 아니면 굳이 경애왕릉과 배동 삼릉을 찾으실거까지는 없다고 생각이 들지만은.. 이왕 경주에 여행오셨으면 최전성기의 역사와 유물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운의 비극의 역사도 살펴보는 것도 공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경주에 밝혀진 왕릉7기외에 나머지 왕릉이 주인들이 나중에 밝혀진다면 그것도 좀 우스운 일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경애왕릉인줄 알고 왔는데 나중에 아닐수도 있고 김유신묘를 갔는데도 아닐수도 있고....

특히나 기록의 민족인 한반도 대한민국에서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기록이 후대에 비해 별로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라 경주 경애왕릉과 형산8경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소나무숲 삼릉솔숲과 배동 삼릉 방문후기 포스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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