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역사서 사기의 저자! 태사공 사마천의 여행기록 연구
사기의 저자, 인류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의 여행
순서
1.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
2. 사마천의 여행
1) 사마천의 여행시기와 경로
2) 사기의 견문사료
3) 사기의 여행자료
4) 전한시대 사마천여행환경과 방법
3. 마무리
1.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
개인적으로 인류 최고의 역사가라고 생각하는 사마천
개인적으로 인류 최고의 역사서라고 생각하는 태사공서 사기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중국 한나라때의 사람으로 아버지인 사마담이 태사령을 지내 그 영향을 받았다.
사마담이 사망하면서 역사가로서의 소명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마천은 태사령을 이어받아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태사공서 지금의 사기라는 이름의 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은 황제인 한무제의 미움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형을 피해 어찌저찌하여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는 궁형을 받아 몸이 훼손되어 고자가 되었고 이후 중서령의 자리에 올라 태사공서 집필에 매진해 완성시킨다. 사기는 사마천이 개인적으로 지은 사찬서(私撰書)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힌다. 편년체역사서술방식에서 벗어난 기전체 역사서로서 그 엄청난 개인적인 노력으로 현재도 그런 과거의 역사들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접할수 있다는데 정말 큰 감동이 전해진다. 사마천이 치욕과 수치를 못참고 자결하였다거나 사형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위대한 역사서 태사공서 사기는 존재하지 않을터..
20세, 사마천이 약관의 나이에 장강(長江), 회수(淮水), 산동(山東), 황하(黃河) 유역을 여행했다.
그 이후 여행이라기보다는 무제를 수행하는 차 일곱 번에 걸쳐 중국을 여행하였다. 당시의 여행상황을 고려한다면 여행이라기보다 탐험이라고 할 만하다. 약관의 나이에 직접 답사하고 여행한 그 견문과 경험이 사마천 본인에게도 많은 학습의 기회와 새로운 시야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것이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을것이라 짐작된다.
사마천이 여행한 시기와 여행경로, 그리고 이 여행경험이 사기에 어떤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그것이 사기 저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고 중국의 역사적변천과 시대적배경을 알아봅시다.
2. 사마천의 여행
1) 사마천의 여행시기와 경로
첫 번째 여행 | 원정元鼎 원년 (기원전 116) | 취재와 학습을 위한 여행 | 장안→장강․회수, 회계산 [동․남쪽] |
두 번째 여행 | 원정 5년 (기원전 112) | 낭중으로서 무제 수행 | 장안→옹, 공동산 [서쪽] |
세 번째 여행 | 원정 6년 (기원전 111) | 관리로서 서남이로 파견 | 서남이 [서․남쪽] |
네 번째 여행 | 원봉元封 원년 (기원전 110) | 봉선 참가, 무제 수행 | 낙양 방면, 태산 [북쪽] |
다섯 번째 여행 | 원봉 2년 (기원전 109) | 낭중으로서 무제 수행 | 산동지역 |
여섯 번째 여행 | 원봉 4년 (기원전 107) | 태사령太史令으로서 무제 수행 | 옹→탁록 방면 |
일곱 번째 여행 | 원봉 5년 (기원전 106) | 태사령으로서 무제 수행 | 스무 살의 여행경로의 연장 [동․남쪽] |
첫 번째 여행에서의 『자서』의 기록으로는
스무살 때 남방의 장강, 회수를 여행하고 회계산(會稽山)을 올랐으며 우혈(禹血)을 찾았다. 또 구의산(九疑山)을 멀리 굽어보았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떠간다. 북쪽 지역에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齊)와 노(魯)나라의 수도에서 학업에 열중했다. 거기에서는 공자의 유풍을 보기도 하고 추(鄒)의 역산(嶧山)에서 향사(鄕射)의 의례를 배웠다. 또 파(鄱)나 설(薛), 팽성(彭城) 땅에서는 어렵고 힘들었다. 거기에서 양(梁, 위魏)과 초(楚)나라 지역을 지나 돌아왔다. 그리고 천은 사직으로 나아가 낭중이 되었다.
왕국유가 장안에서 장강, 회수와 회계산을 찾아 강남을 찾은 원 경로 다음에 사수와 문수를 건너 장안으로 돌아오는 루트로 복원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강남, 강동을 찾은 것은 틀림없다.
두 번째 여행은 원정 5년(기원전112) 겨울 10월에 낭중으로서 무제를 수행한 여행이다.
『한서』「무제기」에 따르면 장안에서 서쪽 지역 옹 땅으로 가서 오치를 제사지내고, 그 후에 농(隴) 땅을 지나 공동산(空桐山)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의 감숙성으로 들어가 황하 지류인 조려하(祖厲河)를 따라 돌아갔다고 한다.
세 번째 여행은 원정 6년(기원전 111). 사신으로 서남이(西南夷, 운남성 방면)에 파견되었다. 「자서」를 보면 서로는 파(巴), 촉(蜀, 사천성)의 남쪽으로 갔고, 남쪽 지역은 공(邛), 작(岝), 곤명(昆明) 방면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네 번째 여행은 원봉 원년(기원전 110)의 일이었다. 사마천은 서남이 사신에서 돌아온 뒤, 무제 일행을 따라 낙양 방면으로 간 것 같다. 그때 사마담은 낙양에 머물고 있어 봉선의식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사마천은 실의에 빠진 아버지와 대면했다. 저술을 위탁받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 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제를 수행했고, 바로 산동에서 북쪽 지역을 방문했다. 『한서』「무제기」에 따르면 일행은 태산에서 동쪽을 향해 해상을 돈 다음 요서(遼西, 요령성)의 갈석(碣石)까지 갔다. 여기에서 코스를 서쪽으로 바꾸어 북쪽 변방인 구원(九原,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시)을 통해 별궁인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다섯 번째 여행은 다음해 2년(기원전 109)에 낭중으로서 무제를 수행하여 산동 지역을 찾은 것이다. 『한서』「무제기」에 따르면, 봄에 구씨(하남성 언사시偃師市)에 행차하여 동래(東萊) 해변까지 갔다. 그리고 여름 4월에 태산에서 제를 올린 뒤, 황하가 범람한 호자(瓠子)를 향해 하천 제사를 지냈다.
여섯 번째 여행은 원봉 4년(기원전 107) 태사령으로서 무제를 수행했다. 『한서』「무제기」에 따르면 겨울 10월에 옹 땅에서 오치를 제사지낸 다음, 회중도(回中道)에서 소관(簫關, 영하회족 자치구 고원현)을 지나, 아마도 진나라의 직도(直道)를 거쳐 탁록(涿鹿, 하북성)방면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代, 하북성 울현蔚縣) 방면으로 돌아왔다.
왕국유는 여기까지 여섯 번의 여행으로 끝냈지만, 정학성(鄭鶴聲)은 그 뒤 일곱 번째의 여행을 추정했다. 그것은 원봉 5년 (기원전 106)의 일로, 태사령으로서 무제를 수행했다. 그 경로는 『한서』「봉선서」『한서』「무제기」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때는 남군(南郡)의 강릉에서 장강으로 간 다음 심 땅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의례를 거행했으며, 거기에서 심양, 종양, 북쪽 지역의 낭야를 거쳐 바다를 따라 태산까지 갔다. 이것은 스무 살 때의 여행에 뒤이은 남쪽 지역과 동쪽 지역 여행이라 할 수 있다.
2) 사기의 견문사료
『사기』논찬의 견문
태사공 왈, ……나 전에 서쪽으로는 공동산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탁록을 지나다, 동쪽 바다를 지나 남쪽 강회에 배를 띄우다. 원로들이여 황제 요, 순을 칭하는 곳에 이르면 풍속이 제가끔 독특하다. -「오제본기」-
태사공 왈, 나 천지신명과 명산대천을 돌며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발로 모시다. 그리고 방사와 제사관의 의중을 잘 살피다. -「봉선서」-
태사공 왈, 나 남쪽의 여산에 올라 우임금 묻힌 곳의 구강을 굽어보고 회계와 태황에 이르러 고소(산)에 올라 오호를 내려다보다. 동쪽의 낙예, 대비, 영하를 일별하다. 회수·사수·제수·탑수·낙수의 수로를 가다. 서쪽으로 촉의 민산과 이대를 보다. 북쪽의 용문에서 더 북쪽으로 가다. 이르기를, 엄청나지 않은가, 물이 이해를 같이하다니. 나서서 장작을 지고 가 선방의 둑을 막다. 호자의 시를 슬퍼하며 「하거서」를 짓다. -「하거서」-
태사공 왈, ……나 제나라를 지나 태산, 낭야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까지 나아가니 기름진 땅 2000리가 실하다. 백성들은 활달하고 지혜를 자랑하지 않는다. 천성인 것 같다. -「제태공세가」-
태사공 왈, 나 대량의 옛터를 지나가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나라의 다리를 부수고 하구를 끌어들여 대량에 물을 대니, 3월에 성이 무너지고 왕이 항복을 청하여 드디어 위나라를 쓰러뜨렸다고 하다. -「위세가」-
태사공 왈, 나 공씨의 글을 읽고 그 사람과 만나는 상상을 하다. 노나라에 가서 중니의 묘당, 거북, 예기를 보다. 많은 학생들이 정성을 들여 그곳에서 예를 배우다, 나 그곳을 기웃거리며 돌아갈 줄을 모른다. -「공자세가」-
태사공 왈, 나 기산을 오르다. 그 산 위에 분명히 허유의 무덤이 있다고 하다. -「백이열전」-
태사공 왈, 나 예전에 설 땅을 지난 적이 있다. 그 시골 마을에 폭걸의 자제들이 많아 추나라·노나라와는 다르다. 그 이유를 물으니 맹상군이 천하의 폭군들을 불러들여 간사한 이들이 설나라 안으로 흘러들다. 대충 6만여 호나 된다니. 맹상군이 손님을 좋아해서 기꺼이 불러들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 -「맹산군열전」-
태사공 왈, 나 대량의 옛터를 지나 이문이 어디 있는지 묻다. 이문은 성의 동문이다. 천하의 공자들 또한 지사를 좋아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동굴에 숨어 사는 신통군 이라는 은자를 접하고는 고유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름은 제후의 관을 쓰고 있지만 모두 허울뿐 고조는 여기를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제사지내게 해서 제사를 끊이지 않게 했다. -「위공자열전」-
태사공 왈, 나 초나라에 가서 신춘군의 고성을 바라보는데 궁성이 융성해지려는가. -「신춘군열전」-
태사공 왈 나 이소, 천문, 초혼, 애영을 읽고 그 뜻을 슬퍼하다. 장사에 가서 굴원이 스스로 몸을 던진 강을 보다. 여전히 눈물은 흐르고 그분의 인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도다. -「굴원·가생열전」-
태사공 왈, 나 북쪽 변방에 갔다가 직도로 돌아오다. 가서 몽념이 진나라를 위해 쌓은 장성과 성채를 돌아보다.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직도를 연결하니 그야말로 백성들의 힘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구나. -「몽념열전」-
(진나라의 장군 몽염은 사기에 몽념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태사공 왈, 나 회음에 가다. 회음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신은 행색이 보잘 것 없을 때에도 그 뜻만은 남들과 달랐다고 한다. 어머니가 죽자 가난해서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데도 바로 땅을 높이 다져 무덤을 만들고 그 옆에 민가를 두었다고 한다. 재가 그 어머니 무덤을 보니 참으로 그러하다. -「회음후열전」-
태사공 왈, 나 풍, 팽 땅에 가다. 나이 든 전직관리들에게 물어 옛 소(하), 조(참), 번쾌, 등공의 집, 그리고 그 자취를 더듬어보니 들었던 것과 달랐다. 그들이 개를 도살하거나 비단을 팔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고조의) 후광으로 한 왕조에서 이름을 떨치며, 그 공덕이 후손에게 미치는지를 알았으랴.-「번·역·등·관열전」-
스무 살이 되어 남쪽의 강남·회수에서 놀다가 회계에 올라 우임금의 무덤을 찾다. 구의산을 찾아 원수·상수에 배를 띄우다. 북쪽의 문수·사수를 건너 제·노나라의 수도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공자의 유풍을 보고, 추의 역산에서 향사례를 배우다. 파·설·팽성에서 고난을 겪고 양·초나라를 지나 돌아오다. -「태사공서」-
지금 나 천은 벼슬을 하사받아 낭중이 되다. 사신이 되어 서쪽으로 파·촉 이남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공·작·곤명을 공략했으며, 돌아와서는 명을 받들다. -「태사공자서」-
이때 천자(한 무제)는 처음으로 한 왕조의 봉선의식을 거행하다.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에 머물고 있어 의식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다. 그래서 아들 천이 사신에서 돌아오자 아버지와 황하·낙수 사이에서 대면하다. -「태사공자서」-
3) 사기의 여행자료
제2회: 원정 5년 안중으로 무제 수행
겨울 10월, 옹 땅에 행차하여 오치를 제사지내다가 마침내 농 땅을 지나 공동산에 오르고, 조려하를 따라 돌아오다. -『한서』「무제기」-
제3회: 원봉 원년, 봉선에 참가하여 무제를 수행 봄 정월, 구씨에 행차하다.……갔다가 마침내 동쪽 해상을 순행하다. 여름 4월 계묘일, 돌아가는 길에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다. 내려와서 명당에 앉다.……태산에서, 다시 동쪽 해상을 돌아 갈석에 이르다. 요서에서 북쪽 변방의 구원을 거쳐 감천으로 돌아가다. -『한서』「무제기」-
제5회: 원봉 2년 낭중으로 무제를 수행
겨울 10월, 옹 땅에 행차하여 오차를 제사지내다. 봄, 구씨에 행차하여 마침내 동래에 이르다. 여름 4월, 돌아가는 길에 태산에서 제를 올리다. 호자에 이르러 결하를 바라보며 따르는 신하와 장군이하 군사들에게 명하여 모두 장작을 지고 강둑을 쌓게 하다. 호자의 노래를 짓다. -『한서』「무제기」-
제6회: 원봉 4년, 태사령으로 무제를 수행
겨울 10월, 옹 땅에 행차하여 오차를 제사지내다. 회중도를 지나 마침내 북쪽으로 해서 소관, 독록, 명택을 거쳐 대에서 돌아와 하동에 행차하다. 봄 3월, 후토를 제사 지내다. -『한서』「무제기」-
제7회: 원봉 5년. 태사령으로서 무제를 수행
겨울, 갔다가 남쪽을 순행하고 성당에 이르다. 우순을 구외에서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섬 땅의 천주산에 오르다. 심양에서 강에 배를 띄우고 가다가 물 속의 교룡을 화살을 쏘아 잡다. 배로 천 리를 올라간 다음 종양을 서둘러 나와 성당·종양의 노래를짓다. 드디어 북으로 낭야에 이르러 바닷길을 따라가며 지나는 곳마다 명산대천을찾아 제를 올리다. 봄 3월, 돌아가는 길에 태산에 이르러 봉의식을 거행하다.……여름 4월, 돌아가는 길에 감천으로 행차하여 태치를 제사지내다.
-『한서』「무제기」-
4) 전한시대 당시 사마천의 여행환경과 방법
먼저 한의 교통수단을 이해하려면 그 전 왕조인 진의 교통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은 진이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망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치도의 건설도 한 몫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은 또 다시 도로건설로 백성들의 삶을 시달리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진시황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때문에 진시황의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치도(馳道)의 건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다음으로 황제의 순행과 별궁을 알아보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유명한 여행이 바로 황제의 순행이다.
위에서 말한 치도(馳道)가 황제 순행의 루트가 되었던 것이다. 일행은 화북의 육로를 여행할 때는 마차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이동하지만 산동성 연안 쪽이나 남쪽 지방의 장강 유역 등을 돌아볼 때에는 배를 이용하였다. 이때에는 수송용 작은 선박이 아닌 대형 선박을 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황제의 순행 규모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선박의 건조 시설은 두 줄로 나란히 침목을 깐 활도(滑道)가 있고, 그 양측의 지목으로 신체를 받치는 구조였다.
황제의 순행에서 나타나는 선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관리들의 여행은 어떠했으며 관리들이 여행하기에 수반되었을 검문소와 숙소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한나라 때에는 평상시에 관료들이 지방관으로 부임하거나 출장, 공공물자의 수송, 문서의 전송 등에 따른 왕래를 하였다. 이것의 예로는 군대의 출동, 사신으로의 파견, 관료의 군현·왕국으로의 부임, 군·국에서 중앙으로 회계보고 등을 위한 출장, 또 군사나 재물을 이송하거나 공무출장, 군현내부의 출장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관료들의 이러한 이동을 여행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여행에서 주목되는 것은 검문소와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 그리고 숙소 및 음식이다. 한 왕조에서는 장안부터 동부의 함곡관 등의 검문소가 있었다. 이것은 「혹리열전(酷吏列傳)」에 나오는 영성(寧成) 이야기에 나타난다.
영성은 남양군 양현 사람으로 제남군의 도위에서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중위, 내사로 승진한다. 그러나 외척의 비방으로 하옥된다. 그 뒤 고향으로 도망쳐 오게 되는데 이때 전(傳)을 위조했다고 한다. 이 전은 검문소를 통과할 때 필요한 증명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 관리들은 여행 중 숙소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최근 돈황군의 한 현에 있던 현천치(懸泉置)라는 숙소 유적에서 3만2000점이 넘는 한간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제 때부터 전한 말, 왕망, 후한시대의 문서라고 한다. 여기에는 관리들이 규정에 따라 거마를 정비 받거나 현의 숙소나 치(置)·우·정(亭)에 숙박하고, 제공하는 음식이 신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반 백성들의 여행은 찾아보면 일반 백성들의 여행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 될 수 있다. 대부분은 전쟁에서의 군사 행동이고 또한 국가의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곳에 동원되는 인력들의 이동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종군과 요역의 형태는 사적인 여행은 아닌 것 같다. 사적인 여행으로는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나 교역·수송 등을 위한 왕래들을 들 수 있다. 여행의 대부분은 황제나 관료·관리·군대·수졸·요역·이민·유형 등 국가와 관련된 공적인 이동이었다. 때문에 고대의 여행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여행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3. 마무리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과 그의 저술인 사기는 빛을 못볼수도 있었다. '이릉의 화' 라는 사건을 겪은 뒤에도 사기저술에 열중한 것은 태사령으로의 직분의식과 당천관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의 유언이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컸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발분의 저서이기도 하다.
사마천이 넓은 중국 땅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확인하고 답사하며 거기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여행은 사기 저술에 대한 그의 생각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사가로서 답사(견학)를 통하여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의 과정은 역사를 공부하는 자들이 본받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젊은 날의 여행은 나중에 「사기」의 사실로 연결되는 귀중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사기는 무려 52만6천500자에 달한다고 한다. 그냥 베껴쓰라고해도 못할 지경의 작업이다
사마천의 여행에서 다섯가지 포인트를 꼽는다면
첫째, 고대의 풍토·지리와 교통루트의 정확한 정보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기』에는 전쟁과 반란, 제국의 왕래, 지방으로의 부임 등 사람들의 이동과 관련된 기술이 많기 때문에 당시의 지역적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황제의 의례·봉선과 산천 제사에 수행하여 각지의 사회나 재정상태의 실상을 직접 목격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기』「봉선서」, 「하거서」, 「평준서」에 반영되어 있는데 사마천은 낭중으로 혹은 태사령으로 무제를 수행하는 역할을 하면서 당시의 사회나 재정상태를 직접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각지를 방문하면서 가졌던 인상이 『사기』의 역사관에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이 황제를 역사의 시조로 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풍토가 그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마천이 황제나 요·순·우임금의 사적지들을 방문했고, 거기에서의 감격들에 의해 씌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째, 주변의 여러 민족들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여기서는 서남이 지역으로의 여행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무제시대에는 벌써 흉노를 비롯한 남월·조선·서남이로 파견되었고 거기에서 남월·대하 루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 흉노와의 외교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비교해봄으로써 주변지역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
다섯째, 여행지에서 보고 들었던 인물들을 통해 인물의 평가에 강약을 두는 등, 『사기』를 구상하는 데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굴원, 회음후 한신, 오자서 등의 인물들을 통하여 그들을 이야기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시켜 평가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마천의 여행은 그의 역사관과 세계관·인간관에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기초가 훗날 역사적 사실을 편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천의 사당 가는길에 사필소세史筆昭世라는 현판이 세워져있다고 한다.
사필소세란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역사가로서의 비판의식과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는 의지, 중요한건 꺽이지 않은 마음!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와 기록, 사료를 집대성하여 남겨야 한다는 그 숭고한 사고와 의식에 존경을 다시 표한다.
참고문헌
사마천/정범진역, 『사기세가史記世家』(상),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세가史記世家』(하),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열전史記列傳』(상),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열전史記列傳』(중),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열전史記列傳』(하),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표·서史記表·書』, 까치, 1994
사마천/정범진역, 『사기본기史記本紀』, 까치, 1994
후지타 가쓰히사, 주혜란, 『사기를 탄생시킨 사마천의 여행』, 이른아침, 2004
다케다 다이준, 이사헌, 『사마천과 함께하는 역사여행』, 하나미디어, 1993
서평독후감 사기 교양강의, 한자오치 사마천의 통찰력
사기 교양 강의 저자 : 한 자오치 옮긴이 : 이인호 출판사 : 돌베개 출판년도 : 2009년 중국 사기 연구의 최고 권위자 한자오치의 사마천의 사기 이야기를 한권에 담은 책 한자오치의 북경tv 최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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