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y Mind&history

유럽 도시의 탄생- 영국 런던이야기(London history)

by Gloomy@ 2022. 9. 1.
반응형

유럽 도시의 탄생- 영국 런던London에 대하여

시작
1. 런던, 두 세기의 풍경
1) 변방에서 중심도시로
2) 런던
3) 도시의 팽창
4) East end - outcast london

2. 19세기 런던의 거리와 모더니티 속의 과거
1) 근대 도시환경에서의 모더니티
2) 런던의 하수구와 지하철
3) 도시의 밤풍경과 음란한 뒷골목들
4) 폐허에 대한 노스텔지어
5) 모더니티의 타자로서의 과거

1. 런던, 두 세기의 풍경
1) 변방에서 중심도시로
오늘날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자 유럽의 관문으로 그리고 국제적인 금융-문화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가 영국 경제를 넘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의 다른 도시보다 월등하게 높아진 것은 18세기의 후반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만 하더라도 런던의 도시 규모나 인구는 대륙의 경쟁 도시를 크게 앞지르지 못했다. 18세기 이전 런던의 인구 증가율은 매우 미미했으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산업화와 영제국의 확대 그리고 국제무역의 번영에 힘입어 급속하게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런던은 제정로마시대에 브리튼 섬에 주둔하는 로마군의 주요 병참기지였다. 그리고 브리튼 섬에서는 오직 런던만이 이런 의미를 충족할 수 있는 도시였다. 현재 구 런던 시를 가리키는 '시티the city'라는 표현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백년전쟁 이후 왕의 통치가 웨스트민스터궁(Palace of Westminster)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의회 역시 같은 장소에서 열리기 시작함으로써 런던은 상업중심지 시티와 행정중심지 웨스트민스터 시구를 포함하는,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런던의 성장은 근대국가 영국의 발전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전개되었다. 17세기 후반 이래 영국은 경쟁국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제치고 국제무역과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금융혁명, 산업혁명, 영제국 형성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같은 변화가 런던의 도시 풍경에 그대로 각인되었다. 1660년대에 ‘대역병Great Plague'이나 ’대화재Great Fire' 같은 재앙을 겪기도 했지만, 런던은 영국의 발전과 병행해 급속하게 성장했다.


2) 런던
1740, 50년대에 새뮤얼 존슨은 <영어사전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원고를 집필하며 런던에 체류했다. 존슨은 런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러워 했고, 특히 시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무역거래와 상업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더 나아가 런던이야 말로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이 집대성되는 곳이라 생각했다. “런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반경 10마일 이내 우리가 지금 자리한 이곳에 여타 세계가 가진 것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런던에 진저리 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말하자면 인생자체에 지쳐 버린 사람이다. 왜냐하면 “런던은 삶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존슨이 런던에 머물던 18세기 중엽 인구는 대략 67만명, 세기말에는 90만명선에 이르렀다. 존슨 시대만 하더라도 런던의 경제활동의 중심지는 시티였다. 해외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세계시장에 관한 여러 활동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사업장과 거주지는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시티 주민의 정점은 해외무역 분야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무역 상인 외에 국채와 주식 투자, 보험, 해운, 금융 등의 분야에서 새롭게 화폐자산을 축적한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화폐신용을 다루기도 하고 운송 중인 화물과 선박의 보험 업무에도 뛰어들었다.
18세기 후반에 인구가 이전보다 밀집되면서 도심 환경은 악화되었다. 불량한 하수 시설과 더러운 도로는 주민들에게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런던은 사실상 생태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그 타개책은 도심과 인접 지역을 재개발하거나 또는 그곳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심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광장이 조성되었고, 이와 함께 교외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물론 시티와 웨스트민스터 구의 좁은 도심을 벗어나면 아직도 빈민층 거주지가 도시의 팽창을 가로막았지만, 런던의 확대는 시대적 추세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주로 강북 지역의 서쪽 방향으로 새로운 주거지가 개발되었다. 웨스트엔드라 불리는 이들 지역에 캠버웰, 클래팜, 홀본, 패딩턴, 켄징턴, 첼시, 케닝턴 같은 새로운 시구와 주거지가 조성되었으며 주로 부르주아와 중간계급 상층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3) 도시의 팽창

19세기 런던은 이전 세기와는 달리 급속한 인구증가를 보인다. 19세기 초 100만 명에 근접했던 런던인구는 1851년 268만명, 1901년에는 658만명에 이르렀다. 주변 지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인구가 유입된 결과였다. 또한 19세기 중엽을 분기점으로 잉글랜드 북서부,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동유럽 등 원거리 이주민이 급증했다.
급속한 인구유입은 도시의 지역 구성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 세기에 중간계급이 주도한 교외 개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런던의 전반적인 풍경은 전통적인 ‘도보 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즉, 18세기에는 좁은 도심과 빈민층이 거주하는 교외의 이분 구조가 도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주민들은 여러 이유 때문에 도심에 근접한 지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대적인 교외 개발은 중간계급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다. 물론 19세기 중엽에는 과도기적 현상이 남아 있었다. 빈곤한 이주민과 부유층이 공존하는 공간이 도심 지역 여러 곳에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세기 후반에 점차로 사라졌고, 부유한 중간계급 중심의 교외와 도심 근처 빈민층 거주 지역이라는 지리적 구분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로, 19세기 전반 산업혁명기에 런던은 산업 기반이 취약했지만 무역-금융 분야는 물론 그 밖의 각종 서비스 부문과 소비재공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한제(sweating system)를 바탕으로 하는 저가 의류 제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이와 아울러 가구, 양장, 피혁 등 소규모 자영업 또한 번창했다. 말하자면 런던 경제는 북서부 공업지대 못지않게 농촌 과잉잉구와 젊은 세대를 흡인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런던 도심은 새로운 이주민의 압력을 점점 감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두 번째로 교외 개발과 중간계급의 도심 탈출은 좀 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 경향은 도심의 과밀화와 새로운 가족 윤리의 대두가 서로 맞물려 전개되었다. 로런스 스톤에 따르면, 그 윤리는 ‘감성적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가정 중심의 핵가족’ 출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부부 관계 또는 부자 관계는 이전과 달리 애정에 토대를 두었다. 17세기 이래 중간계급 가정은 대체로 감성적 유대가 강했으며 가족 자체가 이전의 개방성 대신에 폐쇄성의 특징을 나타냈다. 여기에서 문제는 도심의 개방성과 새로운 가족 윤리가 양립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빈민층이 도심까지 몰려들자 중간계급은 그들과 공간적으로 떨어지려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그 해결책은 도심을 떠나 교외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18세기 복음운동의 영향이다. 복음운동은 평화로운 기독교 가정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다. 복음 운동가들은 도심의 불결함과 쾌락에서 격리된 가정을 중시했다. 자녀들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도 부모는 런던 도심의 위험들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복음운동과 새로운 가족 윤리는 중간계급은 물론, 고급 직종의 숙련 장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런던의 교외개발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클래펌에 복음 운동가들의 집단 주택단지가 들어선 이후 여러 곳에서 부르주아지의 교외 주택단지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템스강 북쪽과 남쪽에 새로운 교외주택단지가 계속 조성되었고, 이들 지역은 도로를 따라 띠처럼 집들이 들어서는 리본식 개발의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주나 건축업자가 다 같이 개발의 적절성과 인근 지역과의 조화를 고려하면서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주택의 형태는 단독 이층집 외에 한지붕 아래 두가구 이층집이 주류를 이뤘다. ‘두 가구 이층집’의 출현이야말로 중간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교외 개발의 성격 변화를 반영한다. 이러한 주택 패턴은 건축과 존 내시가 리전드파크에 대규모 파크 빌리지를 조성한 이래 널리 퍼져 나갔다. ‘두 가구 이층집’은 한 지붕 아래 두 가구가 병존하면서도 각 가구의 전면과 후면에 1~3에이커의 정원과 후원을 덧붙인 형태였다. 19세기 후반에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를 통해 주택에 대한 표준 규제 조항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건축 기준과 위생 기준을 적용한 집들이 노동계급 상층에게까지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런던에서 교외의 발전은 아파트 위주의 도심 재개발을 통해 내포적 발전을 거듭한 파리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이 원인을 밝히기는 쉽지 않지만, 도시 행정조직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런던은 18세기 후반부터 웨스트엔드와 강북 지역, 그리고 19세기의 템스강 남쪽 지역까지 교외가 급속하게 확대되었지만 이 개발의 주체는 일정하지 않았다. 19세기 런던에서 유일한 행정조직은 런던시청은 시티의 90여 동업조합들이 선임한 참사회에서 시장을 뽑는 중세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런던 시청의 권한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인허장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것도 시장, 집행관, 참사회 등 위계 구조가 복잡했다. 1835년 자치도시법에도 런던은 포함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19세기 중엽까지도 시티 이외의 런던 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어떠한 행정조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런던의 교외팽창은 개별 토지 소유자, 특히 왕실의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진행되었다. 통합된 행정조직의 부재가 이 시기 비정상적인 교외 팽창을 더 가속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런던의 서부, 북부 그리고 남부 지역까지 교외 지역이 확대된 데는 철도의 역할이 컸다. 19세기에 증기기관차는 근대성의 새로운 표지였다. 산업화시대 수도의 팽창 과정에서 철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나라든지 수도가 철도망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철도망이 방사선형으로 형성될수록 수도로의 인구 집중을 자극했다. 사실 철도의 산업화의 시차와 관계없이 유럽 주요 국가에서 거의 동시에 도입되었다. 철도혁명이 영국 산업화의 종착역이었다면 대륙의 다른 나라에서는 산업화의 시발역이었던 셈이다. 런던에서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36년이다. 파리에서도 1842년에 이미 북부 노선의 일부가 개통되었다. 런던이나 파리에는 독일을 비롯한 후발 산업국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앙역이 없다. 런던에서는 개별 철도 회사들이 이미 조성된 도심의 근교에 터미널을 세우고 철도 노선을 깔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철도란 근거리보다는 원거리 교통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철도사업가들은 터미널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귀족 지주와 구 런던시의 금융가들 또한 철도가 초래할 무질서 때문에 도심에 터미널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에 앞날을 내다본 도시계획가들에게 제멋대로 분산된 철도역은 아주 비효율적이었다. 유럽 대륙에서와 같은 중앙역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각 노선을 운영하는 여러 철도 회사의 이해를 조정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1850년대 중엽 런던의 철도망은 버밍엄, 미들랜드, 북부, 이스트 앵글리아, 남부 해안, 브리스톨 등 전국 각 지방과 연결되었는데, 같은 세기 말 런던에는 유스턴 역, 패딩턴 역, 킹스크로스역, 세인트 팬크라스 역, 채링크로스 역, 빅토리아 역, 워털루 역 등 모두 열다섯 곳의 역이 자리 잡았다.

4) East end - outcast london
19세기 런던의 도심 개발은 토지 소유자인 귀족이나 특히 왕실의 주도 아래 이뤄졌다. 런던에서 도시 전체를 총괄하는 행정기관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은 콜레라 창궐 이후였다. 1832년의 콜레라 이후 공중위생, 상하수도 시설 개선, 도로 정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의 주도하에 제정된 1848년 공중보건법은 이러한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1849년 콜레라가 다시 내습했을 때 런던의 모든 지역은 무방비 상태였다. 1855년 수도지역정부법은 런던의 각 지역별로 이뤄지던 행정을 조정하고 계획하기 위한 법이었다. 물론 이 법에서도 런던 전 지역을 총괄하는 집중적인 행정기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획기적인 것은 상하수도, 도로 개설과 포장, 가로등 설치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통합된 기구 설치를 제안한 점이다. 이에 따라 수도건설국이 설립되었으며, 1850~1860년대에 대대적인 상하수도 정비와 도로포장 등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무렵 런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19세기 중엽 런던은 뉴욕과 파리를 합친 크기였고, 세기말에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는 변함이 없었다.

한편, 시티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엔드 지역과 구별되는 런던 동부지역은 19세기 중엽 이래 사회조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헨리 메이휴나 찰스 부스 등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이 지역에 관심을 둔 것은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였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에서 도시 빈민가를 뜻하는 슬럼(Slum)이라는 말의 기원은 실제로 대도시와 관련이 없다. 이 말은 1820년대에 처음 나타나는데, 물기가 있는 수렁의 뜻을 지닌 고영어 ‘slump'에서 나왔다. 이 말은 점차 산업도시에서 배수로 어려움을 겪는 구역 또는 그 열악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 말이 19세기에 도시 빈곤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영국 산업화의 특수한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처음에 슬럼이라는 말은 우기에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주거지, 즉 면업지대의 공장촌을 가리켰다. 그러나 철도의 시대에 이르러 그 말은 좀 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공업도시들이 성장하고 공장 주변 여기저기에 대규모 노동자 주택단지가 들어섰을 때, 이 말은 이전과 달리 가난한 빈민과 하층민이 살고 있는 열악한 주거지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또한 1880년대에 이스트엔드 지명 앞에는 항상 버려진(outcast)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브룩 램버트에 따르면 이 수식어는 이스트 엔드 삶의 경험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빈곤선 이하의 소득,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비롯하는 갖가지 불행이 ’버려진‘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의미들이다.

이스트엔드는 구체적인 행정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 경계도 일정하지 않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이스트엔드라는 지명은 오직 스텝니 구만 뜻했다. 그러나 1880년대 부스가 사회조사를 시작했을 때 조사 대상에는 스텝니 외에 화이트채플, 마일엔드, 세인트 조지, 베스널 그린, 포플러, 소어디치, 해크니구 등이 포함되었다. 18세기에도 이들 지역은 전원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고, 마일엔드나 베스널 그린을 중심으로 섬유 분야의 수공업 장인, 특히 견직공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에 왜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이 빈민가로 변모했을까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층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었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말부터 이 구조에 변화가 일었다. 우선 빅토리아 시대에 런던 도심과 웨스트엔드 지역에 대형 석조 건물과 대형 전시 공간이 잇달아 세워졌는데, 이 공사장을 따라 건축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런던 도심에 몰려들었다. 공사장 인부들은 자연스럽게 시티 인근의 싸구려 숙박 시설에 머물렀다. 대형 석조 건물은 그 규모만큼이나 공사 기간이 길었으며 그만큼 공사 인부들도 급증했다.
다음으로 런던항의 부두 증설과 더불어 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부두 노동자 수도 급증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스트엔드에 주거지를 마련했다. 하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부두 노동자들 외에 하역 작업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분야의 고용 또는 늘었다. 통메장이, 밧줄제조공, 목공 등이 정규적인 일감을 맡았고 그들 밑에는 여러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있었다. 1887년 비어트리스 포터는 웨스트-이스트 인디아 부두를 비롯한 주요 선창 회사를 방문해 부두 노동자 실태를 조사했다.
또 다른 한 요인으로 동유럽 이민 증가를 지적할 수 있다. 이민자들 상당수가 이스트엔드에서 삶을 꾸려 나갔다. 19세기 전반에는 아일랜드 이민이 그리고 1880년 초부터 폴란드와 러시아의 유대인 이민이 이스트엔드로 몰려들었다. 1880년대에 러시아 정부가 임시규제법을 제정해 유대인을 속박하고 추방하려는 정책을 폈고 이에 부응해 해운업자들이 해외로 이주하려는 유대인을 부추겼다. 당시 동유럽 난민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목적지는 런던이었는데, 이는 서유럽 국가 가운데 영국만이 이민자에게 별다른 규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0년대부터 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200만 명의 동유럽 유대인이 이민 대열에 합류했으며, 그 가운데 적어도 15만 명이상이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의류-제화-가구 제조 분야에서 성행한 고한제가 이 지역의 인구 유입을 자극했다. 고한제란 도매상이나 중매상의 하청일감을 맡은 생산자가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력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방식은 새로운 생산기술, 시장 수요의 변화 그리고 저임 노동인구 증가라는 새로운 환경의 산물이었다. 재봉틀과 동유럽이민 그리고 기성복을 비롯한 싸구려 제품 수요 증가가 바로 이런 환경에 해당한다. 예컨대 양복업의 경우 기존의 고급 정장 외에 저가 기성복 수요가 늘면서 이러한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만한 새로운 생산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동유럽 이민들이 런던, 특히 이스트 엔드에 정착해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 의류와 제화업 분야는 고한제 생산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재봉틀과 같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미숙련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이후 동유럽 유대인들은 이스트엔드 지역이 빈곤의 대명사로 불리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스트엔드의 유대인사회는 20세기에 들어와 급속하게 변모한다. 이민 2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영국화에 적극적이었으며, 근면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나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었다. 도시 슬럼가에서는 대체로 빈곤의 세습과 재생산이 문제가 되곤 한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빈곤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기보다는 단절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떠난 자리에는 주로 인도계 뱅골인과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이 들어섰다.

결과적으로 대도시 슬럼 지역은 급격한 산업화 이후 인구 지붕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다. 19세기 이스트엔드의 슬럼화는 영국사회의 내적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의회 인클로저에 따른 이농민 증가, 도심 개발, 런던 항 확대 등 여러 요인들이 구 런던시 외곽 이스트엔드 지역에 노동인구 유입을 자극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제국의 중심 도시라는 런던의 위상이 이 지역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런던은 영제국의 심장부였고, 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의 저렴한 노동력을 끊임없이 흡수해 왔다. 이러한 흡인력이 작용하는 연결선을 타고 영국 본국만이 아닌 외부 세계에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영제국 해제 이후 영국 경제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런던은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0년 대 이후 영국 경제의 회복과 함께 런던은 주목받는 도시로 재탄생했다.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서 시티의 위상은 유로화 도입 이후에 오히려 더 높아졌으며, 오늘날에는 유럽을 포함해 서구 문화의 추세를 가장 먼저 가늠할 수 있는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베스널그린에서 스텝니에 이르기까지 템스 강변에서 떨어진 이스트엔드 지역 상당 부분은 지금도 대표적인 빈민 지역으로 남아 있고 뱅골계 이민과 카리브해 흑인들이 거주자 인종 집단의 주류를 이룬다. 런던 도심과 대비되는 오늘의 이스트엔드는 여전히 제국 지배의 유산을 간직한 셈이다.


2. 19세기 런던의 거리와 모더니티 속의 과거
1) 근대 도시환경에서의 모더니티
유럽의 도시들은 합리적인 원칙이 적용가능한 공간을 만들려는 도시계획에 의해 19세기 중후반에 근대적인 모습을 갖춘다. 과거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어둡고 숨겨진 골목의 구석들을 들추어 내어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은 근대적 도시를 구획하는 기본이었으며, 과거의 형태들을 제거한 대가로 얻게 된, 현재 속에 공존하는 유령과도 같은 기억의 잔상들이 바로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더니티의 공간적 논리는 격자형 또는 방사형으로 구획된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 공간계획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근대적 도시는 거리들이 합목적적으로 늘어서며 중앙 집중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런던은 근대적 도시로 만들기 위한 요구들을 공간적으로 적극 구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속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런던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분리해내어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키기보다는 옛것과 새것, 파괴와 건설, 고풍과 기술을 한 자리에 융합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영국식 모더니티의 조형 방식으로 자리 잡지 않았나 생각된다.
모더니티의 개념에 대해서는 18세기 후반 이래로 수많은 차원의 논의가 있어왔고, 최근 포스트모던 관점에서의 재평가가 있기까지 끊임없이 복잡한 논점들을 생성해왔다. 그 중 중심이 되는 개념은 분별적인 시간성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더니티는 과거와의 분명한 시간적 단절로 이해되는데, 이 개념은 현시대의 삶이 변화했다는 인식을 가져온 동원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된다. 모더니티는 달라진 공적생활의 재현이며, 변화된 사회에 대한 군중의 경험과 모더니티의 경험은 거의 유사어로 취급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를 해체시키는 위험요소들로 채워져 있는 변화와 파괴의 역동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동적 변화의 개념은 빅토리아 중기 런던을 가시화하기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런던에서의 도시 개선이란 한편으로는 도시의 과거를 개선된 현재로부터 결별시키는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과거를 모더니티의 서사 속에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작업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런던의 경우 변화와 파괴란 더 이상 균형이 맞지도 않고 해결되지도 않는 도시화의 과정에서 어떻게든 과거를 그냥 내버려두고 싶은 태도가 자아낸 모호함의 산물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2) 런던의 하수구와 지하철

근대적 도시계획 작업이 곳곳에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런던거리의 불만족스러운 비유는 삽화본 런던뉴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시가 몸체라면, 배수 및 하수망은 몸을 윤활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19세기 중반의 런던은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이미 건강을 해칠 만큼 비대하게 부풀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1860년대 중반 저널리스트인 살라는 런던의 썩어가는 빌딩, 깜깜한 뒷골목들, 그리고 미로 같은 거리를 조목조목 지적하는데 몇 쪽이나 할애했다. 살라는 도시가 그렇게 썩어버린 이유는 국가 차원에서 건들지 못하는, 유행에 뒤떨어진 사유재산권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그는 합리적이고 계획된 도시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리사욕 채우기에 정신없는 독자적인 민간단체에 도시 정비를 맡길 것이 아니라, 단연 정부에 집중된 권한을 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보다 앞서 1854년 삽화본 런던 뉴스에서는 “런던이 필요로 하는 것” 이라는 제목 하에, 런던은 첫째 도로망의 상호 연결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둘째, 배수 및 하수 체계가 시급하며, 셋째로 템즈 강을 가로지는 교각이 필요하고, 넷째로 도시를 관통하는 주도로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조목조목 지적한 바 있었다.
런던의 상수 공급 및 매수와 관련하여 개혁의 임무를 맡아 수행했던 정부관료는 에드윈 채드윅이었다. 빈민 법안 및 보건 위원회의 전문 관료이던 그는 건강한 도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위생과 공중 보건에 대해 알리고자 적극 노력하였으며, 특히 하수 체계와 지도를 결정적으로 연결시킨 사람이기도 했다. 지도는 근대도시를 한 눈에 시각화해주고,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지도제작은 19세기 중반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런던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모더니티의 문화가 근거로 삼는 것은 도시의 구조이다. 구조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질서가 결정되기 때문인데, 그 구조를 만드는 일이 바로 지도의 역할이었으며, 구조 그 자체가 새로운 미학을 예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도와 함께 보행자들이 느끼는 공간 개념에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지하철의 등장이라고 생각된다. 지하철을 타는 보행자는 방향감과 위치 감각이 사라짐과 더불어 오직 지도상의 노선에 의존하게 된다. 1863년 세계 최초로 런던에서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어느 한 지점에서 내렸다가, 다른 지점에서 올라오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공간이동의 개념이 사라지고, 시간의 흐름이 공간 이동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만든 지도 아래에는 지하통로의 존재가 숨겨져 있으며, 도시를 깨끗하게 만드는 근대적인 시도 배후에는 억압된 더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모더니티란 결코 깨끗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3) 도시의 밤풍경과 음란한 뒷골목들
빅토리아 여왕 재임 초기인 1840년대에 가스 불빛은 런던의 밤을 환하게 만들었다. 어떤 문필가는 런던이 유럽에서 가장 밝은 도시일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가스 불빛은 근대 도시를 위해 필수적인 쾌적함을 제공하였다. 밤의 거리에 공적 질서를 유지하게 해주었고, 삶을 편안하고 문명적인 양상으로 바꾸어놓았다. 도시 거리의 등은 밤의 무질서를 억제하여, 낮의 질서처럼 이성의 공간으로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스등은 어둠을 투명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환상을 제거하지는 않은 채 모호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밤의 분위기를 완전히 정복해버리는 대신, 그 시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악마적인 면모를 그대로 흡수해내었다.
이렇듯 가스등은 런던의 밤의 측면을 거부한 조건이기도 했고 확장시켜준 조건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술과도 같이 도시공간에 대한 경험을 시각적 욕망의 모드로 바꾸어놓았다. 환하게 비추어진 상가의 창, 댄스홀 등이 뿜어내는 불빛의 스펙터클은 산업화된 근대 도시를 말해주는 특징이었다. 가스등으로 인해서 크리몬 가든과 같은 유흥지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그런 유흥지에서의 행동은 품위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당시의 부르주아적 규범과 질서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몬 가든과 같은 유흥지는 원칙에서 벗어나도 되는 익명성의 장소였다. 익명성 덕택에 그곳에서는 평화로운 가족 나들이와 노골적인 매춘이 공존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가스 불빛은 무질서적이고 비도덕적인 측면을 완전히 제거해내지는 못했다.
가스등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은 1870년대 말 전기등의 등장으로 인해 소멸되고 말았다. 전기등은 가격이 저렴하고 환경적으로 더 깨끗하며, 열기가 덜하면서 더 강한 광력을 가지고 있었다. 1890년대에 이르면 가스등은 ‘옛 빛’으로, 전기는 ‘새 빛’으로 일컬어졌으며, 옛 빛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경쟁력이 없어지게 되고 말았다.
1850~1860년대에 런던정부는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일관된 근대화의 결로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옛 런던에 더럽고 어둡고 구불구불한 뒷골목들을 정리하여 음침하지 않은 환경으로 만들고자 했다. 음란한 욕망이 전시되어 있던 거리는 더러운 골목에 포함되었고, 외설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는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화를 맞은 도시는 차별화된 양상의 전통적 소비구조 대신 도시의 거리를 대거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흐름으로 구성된 대중 소비의 새로운 형태를 창출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움직이고 지나치고 멈추거나 구경하고 상상하곤 했다.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변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모더니티의 양면성이, 모더니티의 역설적인 모습이 구현되고 있었다.

4) 폐허에 대한 노스텔지어

벤야민은 파리를 연구하는 저작들에서 모더니티를 지속적인 단선의 발전과정이나 인간의 노력과 성취의 정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보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폐허의 존재에 대해 지적하는데, 그가 말하는 진보란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최근의 것 사이의 복합적인 상호 관련성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또한 새로움은 그것이 본래 위치해있던 맥락이 사라지고 난 후, 즉 외양이 파괴되고 소멸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
잔존해있는 폐허로부터 과거를 읽을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읽어야 한다는 벤야민의 시각은 런던이라는 도시를 설명하기에도 적합하다. 런던의 변화 역시 파괴와 재건의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옛것과 새것을 병치시키는 것은 18세기 픽처레스크 미학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한 것들을 새 것에 끼워 넣음으로써 새 것에 대한 거부감 없이 아주 편안한 미적 경험을 하게 만드는 식이다. 픽처레스크 스타일은 연속성보다는 불규칙성, 전체적인 시각보다는 파편적으로 순간순간 펼쳐지는 장면에 그 미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도시의 폐허 이미지는 공허의 재현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이 더 이상 그 곳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연속성을 보여주는 농촌 이미지보다는 변화의 힘에 초점을 맞추는 도시 이미지에서 폐허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폐허는 변화의 경계에서 옛것이 감상적으로 제시된 양상이다. 즉 모더니티는 과거의 형상을 취하여 공허하게 의미화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새 것의 분위기를 예기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빅토리아 시대는 개선을 보여주기 위해 옛 도시와 결별하는 마지막 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시 개혁가는 도시를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은 채, 자신이 속해 있는 당대를 별개의 역사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 지고 다시 표현되며, 그 덕분에 과거는 결코 완전히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는 달라진 지금을 말하기 위해 집착으로 보일 만큼 계속해서 현재 속으로 끄집어내진다. 과거의 흔적을 지워내고자 할지라도 옛것은 결국 논해져야만 하며, 사리지는 최후의 그 순간 과거는 더더욱 강조되어 최고조가 된다. 그러나 옛 것은 새 것을 결코 위협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시 픽처레스크의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붕괴된 지역, 옛 거주지, 살 곳을 잃은 인구들은 기분 좋은 개선의 이미지들을 예견한다. 폐허는 공공에게 새것이 곧 등장하리라는 기호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5) 모더니티의 타자로서의 과거
근대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은 주로 시각적인 것이며 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도시는 그 내부에 수많은 단편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내는 재현의 복합체이다. 수천 개의 눈 속에 반영되어 있는 그 이미지들은 도시를 이루고 있는 모더니티의 특성을 추출해내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미지를 통해 살펴본 런던의 거리는 과거의 그림자를 끌고 가려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리고 여기’라고 하는 단일한 시공간적 경험의 틀로는 19세기 런던 거리의 모너니티를 설명하기 어렵다. 런던의 모더니티는 과거를 제거하기보다는 과거의 존재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나타나며, 당대의 물질적 경이감을 표현하는 그림 속에는 거의 언제나 과거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다는 자각이 교차하고 있다.
도시 복합체 안에는 많은 혼란스러운 것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 면모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없는 미로와 같다는 점, 그리고 과거는 끝이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가졌지만 늘 열려있는 것이고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는 파리를 분석한 벤야민의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모더니티란 합리적 사유가 지배적인 상태를 일컫지만, 미신, 무지, 공포, 그리고 강박과 도취와 같은 비합리적인 힘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옛것과 새것,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상호 침투되어 있는 공간에서 모더니티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새것이 아니라 옛것이고, 현재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이다. 낡고 쓸모없고 유행에 뒤떨어진, 모더니티의 타자로 자리 잡은 옛것들은 오히려 진보적이고 개선된 새것의 현실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타자는 지금의 새것도 영원한 새것이 아니라, 곧 시대에 뒤진 옛것이 되어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암시한다.
런던의 과거는 정체된 하나의 모습을 갖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다시 써지고 다시 이미지화된다. 과거 도시의 어둡고 더럽고 무질서적이고 음란한 측면은 깨끗하고 질서있고 도덕적인 모던도시를 품게 한 요소였으며, 새로운 런던을 낳게 만든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티는 과거의 조건들을 재조명하는 과정이며, 19세기 런던이라는 도시공간은 그 과정을 적극 주선하는 에이전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60~1870년대 런던의 거리는 전체적으로 커다란 물리적인 변형의 비전을 제시해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움직임과 개선, 그리고 정체와 파멸이 융합된 어떤 것이었다. 근대 런던을 표상하는 이미지들은 한 순간, 한 면모만을 추출해내지 않는다. 통합적인 시간성으로 당대를 제시하기보다는 과거와 현재라는 이중적인 시제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의 조건들을 시각화하는것, 이것이 바로 19세기 후반 런던거리에 스며있는 모더니티의 표출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마크 기로워드, 『도시와 인간』, 책과 함께, 2009.
이영석,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서양사론』81집, 2004.
이영석,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 푸른 역사, 2003.
이영석·민유기 외, 『도시는 역사다』, 서해문집, 2011.
이주은, 「19세기 런던의 거리와 모더니티 속의 과거」, 『미술사학보』 33권, 2009.

반응형

댓글 28

  • 이전 댓글 더보기